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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淸 敎育隊(삼청교육대)

fabiano 0 2511  

三淸敎育隊 
 
내가 복무했던 부대의 유격장은 5공 초기 무렵에 삼청교육대로 운용됐었다.

제 8 보병사단. 일명 오뚜기 부대. 군대에 가기전엔 그저 그 곳을 힘든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맞나?!)에 있는 11사단과 서로 행군거리 경쟁을 벌이는 곳 정도. 입대 전에 여자친구와 술자리에서 오뚜기나 백골같은덴 안 갔으면 좋겠다란 얘기를 했었는데, 말하기가 무섭게 그 곳으로 떨어지다니. 정말 말은 함부로 할게 못되나 보다.

고참에게 8사단은 과거 삼청교육대 였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에 신병집체 교육 땐 당시 입소한 이들의 훈육을 맡았다던 2대대 주임원사로 부터, "삼청교육대와 관련해서 사람을 패 죽인 뒤 세워서 시멘트를 부어 그대로 발라 버렸다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란 언급을 들었다. 글쎄.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까? 사람들이 이 곳에서 부지기수로 죽어나간건 사실인데, 상당수가 연고도 없는 이들, 후일에 찾을 사람도 없으니 그런 식의 처리를 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유격을 뛰러 유격장에 갔을 땐, 교관으로 부터 "사열대와 그 담벽의 기둥이 드러날 정도로 연병장의 지대가 낮아진 건, 삼청교육대가 있을 당시 땅이 이렇게 깎여 나갈정도로 하도 굴려대서 그런 것"이란 다소 허풍스런 소리를 들었다. 아무튼 나도 20 여년전 영문도 모른채 많은 이들이 끌려와 두들겨 맞으며 굴렀을 그 장소에서 그렇게 굴렀다.

그 때 까진 삼청교육대와 관련해 모두 듣기만 한 사실이다. 직접 본 것도, 문서나 사진자료를 확인 한게 아닌, 순전히 전해 내려온 얘기들을 들었던 것 뿐이다. 이런 것 쯤이야 굳이 8사단 출신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밖에서도 알아낼 수 있는 것 들이였다.

하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역사적 현장의 증거를 잡게 되었다. 대대 작계인 문암리 불무산에 작업을 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불무산 정상에 있는 버섯진지에 도색작업을 하기 위해서 였는데, 버섯진지는 말만 진지지 사실상 벙커다. 산 속을 깎아내고 그 속을 시멘트로 작업한 벙커. 기관총이 놓여질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참호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흙더미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지붕의 형상을 한 게 삐죽나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버섯같다고 버섯진지라 불렸다.

내부 구조물의 녹을 벗기고, 도색을 하며 벙커 내부를 분주히 돌아 다녔는데, 그 내부가 정말 넓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층까지 있는 방 여러개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이런 건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런 산 꼭대기에 장비들이 올라올리도 만무하고, 자재들은? 하늘에서 헬기로 공수했을까?" 이런 저런 감탄사를 연발하던 와중에 벽면에 희미하게 쓰여진 글씨를 발견했다. 시멘트가 굳기전에 못으로 쓴 글씨였다. 그 내용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삼청교육대. ○○○, △△△, ■■■

- 1982년, ◎월 ◇ 일. 

 

그렇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 거대한 벙커는 삼청교육대 입소자들이 건설한 것이였다. 아......오전에 연병장에 신나게 맞아가며 구른 뒤, 오후엔 트럭에 자재들과 함께 실려왔을 그들. 맨몸으로 올라도 땀이 흥건해지는 산에 시멘트푸대와 철골을 지고 끝도 없이 날랐을......그 상황이 안봐도 비디오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삼청교육대"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이란 부분은 8사단 유격장인 박달유격장 입구에 있는 돌기둥에도 부대마크와 함께 새겨져 있는 문구다. 빨간 핏빛 정자체로 "피도 눈물도 없는 박달 유격장" 이라고 적혀있는데, 이 걸 보니 아마도 당시엔 "피도 눈물도 없는 삼청교육대"라고 적혀 있던 걸 후일에 "삼청교육대"를 지우고 "박달유격장"이라고 새겨 넣은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날마다 작업 때문에 트럭에 실려나가고, 들어올때마다 보게 되는 문구니, 이들 머리속엔 "피도 눈물도 없는"이란 글귀는 머리속에 인이 배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건축물엔 늘 시공사와 책임자가 새겨진 머리돌을 박아넣는게 관행인데, 이들 역시 벙커를 제작하며 시멘트가 굳기 전에 잊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과 날짜를 새겨 넣었다. 아마도 각 조 조장 쯤 되는 인물들이였을 듯.

예전에 8사단 부대모표인 오뚜기가 박힌 군복을 입고 예비군을 받은 뒤 시장을 지나 걸어오는데 주변에서 상인들이 8사단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쑥덕 대던 소리를 들으며 지나쳐온 기억이 있다. 삼청교육대 당시 끌려온 사람들이 수만에 달했다고 하니, 오뚜기 모표만 봐도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이 전국에 가족과 친구들 까지 다 합한다면 정말 어마어마 할 거란 생각이 든다.

5.18과 더불어 역사의 불행한 기억으로 떠올리게 되는 삼청교육대. 아마도 부대에 있었다면 한창 유격준비를 하고 있을 후덥지근한 6월. 한 여름에도 서늘한 벙커안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삼청교육대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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