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서당(書堂)
내 블로그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fabiano 0 1067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송나라 때 관사복(管師復)은 스스로 와운선생(臥雲先生)이라 자호하며 전원에 묻혀 살았던 사람이다.
인종(仁宗)이 그를 불러, "경이 전원에 살며 얻은 것은 어떤 것인가?"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둔덕 가득 흰 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못 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 없네.
                   
滿塢白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
 
 
라 하였다.
언제나 흰 구름 자옥한 둔덕, 그 구름을 밭삼아 다 갈아볼 날은 과연 언제이겠는가.
못 위에 둥두렷이 떠오는 밝은 달은 제 아무리 낚아 채도 한량 없는 무진장이다.
그러니 어떻다는 말인가?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에는 흔적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月光穿沼水無痕
 
 
대나무 그림자는 바람에 일렁이며 섬돌 위를 빗질한다.
그래도 섬돌 위의 먼지는 그대로이다.
달빛은 연못 밑바닥을 뚫고 비친다. 물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푸른 바다 배 간 자취 찾을 길 없고                     
청산에는 학 난 흔적 볼 수가 없네.
                     
滄海難尋舟去迹  靑山不見鶴飛痕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 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효용 가치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저편으로 울려 오는 떨림, 그 떨림의 미묘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에게는 단지 입상함으로써만이 진의할 수 있는 묘오(妙悟)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명나라의 사진(謝榛)은 그의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를 지음은 핍진한 것은 마땅치 않다.
마치 아침에 가서 멀리 바라보면 청산의 아름다운 빛이 은은하여 사랑스럽고, 안개와 노을은 변화무쌍하여 무어라 이름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 보면 별반 기이한 경치가 아니고, 오직 돌 조각과 몇 그루 나무일 뿐이다. 멀고 가까움에 본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니, 妙는 어렴풋함에 있어, 그러한 속에서 비로소 솜씨가 드러나게 된다
.
 
 
시에서 입상진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아니면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도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 뿐이다.
마치 멀리서 본 산이 아름답지만 막상 올라서서 보면 바위돌 몇 개, 나무 몇 그루 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고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아름다움을 거짓이라고 거부할 일은 아니다.

<어부사시사〉에서 "강촌의 온갖 꽃이 먼빛치 더옥 됴타"고 노래할 줄 알았던 고산 윤선도는 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다. 
소월이 말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도 그 뜻이다.
양파의 껍질은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는다.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찢어 발기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 뿐이다.
멀리서 바라보이던 은은하고 아름다운 산의 모습은 간 곳이 없게 된다.

0 Comments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61 명
  • 오늘 방문자 321 명
  • 어제 방문자 1,392 명
  • 최대 방문자 14,296 명
  • 전체 방문자 1,316,185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0 개
  • 전체 회원수 71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