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황태자의 첫사랑 - 하이델베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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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 하이델베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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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대학옆에서 연주하는 거리 악사들
◈세월을 느끼게 하는 하이델베르크 성



뒤에서 손 흔들어주는 이들을 멀리하고 우리는 역을 향했다. 단 둘이 되었을 때 밴(VAN)을 탄 독일 젊은이가 우리 곁에 차를 세웠다. 자기와 함께 호수가로 캠핑가지 않겠느냐 묻는다. 다음날 이 자리로 당신들을 데려다주겠다는 요지다. 잠시 갈등을 느낀 후 그의 친절과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빨간색의 전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이체(ICE;Inter City Express)는 ‘도시간 열차’라 부르고 독일이 자랑하는 기차로 굉장히 빠르다. 우리가 가는 곳은 유명한 대학도시 하이델베르그이다. 몇 시간 안 걸려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한다.
하이델베르크는 인구 14만명의 작은 도시로 중세풍 도시, 대학 도시, 관광 도시이다.
철학자의 길, 고성, 학생감옥, 옛 도서관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도시 중앙으로 네카 강이 흐르고 그 강위로 오래된 칼 테오도르 다리가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황태자의 첫사랑' 이란 희극 또는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1386년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220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곳이다.

기차에서 내려 습관처럼 여행자 information센터를 간다. 이런! 안내양이 국적을 물어봐서 South Korea라고 하니 한국어로 된 안내지도를 내어준다. 할렐루야! 고맙기는 했지만 게르만족의 완벽함이 섬뜩하게 와 닿는다. 이 무서운 장사 속을 보고 감짝 놀랐다. 그러나 Win-Win이 아니겠는가?
고색창연한 대학도시인 하이델베르그에서 아침 안개를 타고 와서 적시는 웅장한 종소리가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종소리를 아침에 들으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성령교회와 시청 건물을 지나 코른 마르크트 광장에 이르면 황금빛을 띤 성모마리아 상이 보인다.
여기서 경사진 길로 올라가야 하이델베르크 성과 전망대에 이르는 푸니쿨라(계단식 산악열차)를 타는 곳이 나온다. 역에서 하이델베르그성까지 구경 삼아서 걸어 올라가기로 하였다.

짐이 무거운 필자는 낑낑거리는데, 선배는 모른 척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언덕과 골목길을 돌고 돌아가서 성까지 걸어서 올라가니 등에는 땀으로 흥건하다. 강에서 100m 붉은 사암으로 된 성은 더 이상 세련된 궁전은 아니었다. 낡은 창문과 돌 틈으로 나무씨가 날아와 싹을 터서 초록을 자랑하고 있다. 성은 곳곳에 상처로 세월의 아픔을 짐작케 한다. 성은 낡았고 스스로의 몸으로 오래된 세월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나의 유적지같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보면 네카강이 보인다.
네카 강에는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칼 테오도르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면 이 다리를 건너면 ‘철학자의 길’이 있다. 이 곳에는 칼 테오도르 왕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동상이 있다. 헤겔과 야스퍼스 등이 산책을 하고 사색에 잠겼던 ‘철학자의 길 ’이다. 이 길이 지혜의 여신 아테네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같다.

하이델베르크성은 13세기에 짓기 시작했지만 가장 유명한 부분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많은 군주를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성 내부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은 오토-하인리히 관과 프리드리히 관이 있다. 프리드리히 관의 성 아래로 내려가면 칼 테오도어 왕 때 만들어진 거대한 와인통이 있다. 세금 대신 징발한 와인을 저장하는 이 통은 길이 9m, 높이 8m인 와인통은 22만1726ℓ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30년전쟁을 비롯한 잇단 전란으로 황폐해졌는 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옛날에 이렇게 큰 술통을 두고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성위에서 市內와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네카강이 눈에 전부 들어온다. 강에는 유람선, 요트, 레져용 배들이 유유하게 흘러간다.

이 곳에서 예전에 파독 광부나 간호원으로 왔다가 정착한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미국에서 관광 온 교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커다란 술통 옆에는 와인 시음장이 있다. 성에는 위정자의 옛 영화와 권력을 짐작하게 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는 이 대학 출신으로 역사에 기여한 학자들의 흉상들이 입구에 서 있다. ‘알트 하이델베르크(마이어 페스트作)’의 주인공인 하인리히 왕자가 공부한 곳으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대학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오랜 전통과 역사는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이 대학의 학생 깜빵은 아주 유명하다. 움직여야하는 동물들이 움직임이 단절되는 것은 대표적 본능에 대한 좌절이다. ‘감옥에서의 사색’은 참으로 비상(飛翔)하는 사색이라 생각된다. 동적인 인간이 몇 평의 감방에 갇힌 억압은 한 없이 비상하는 사색을 만들기도 한다. 달마가 9년 동안 벽과 마주하며 참선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이런 감옥 생활의 억압이 꽃으로 현화(顯華)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 네루는 감방 안에서 13세의 외동 딸, 나중에 수상이 된 인디라 간디와 2년 반동안 편지로 세계사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계속된 편지 196통이 모여 유명한 네루의 <세계사 편력>이 되었고 네루는 인도의 수상이 되어 인도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남아공화국 넬슬만델라는 27년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남아공의 인종분규를 훌륭히 해결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이 학교 깜빵은 젊은 혈기로 술을 마시고 싸우고 행패를 부린 학생, 싸움꾼, 술마시고 사고친 학생들이 주로 이용했을 것같다.
이들의 좌절과 고뇌가 스민 수많은 낙서들이 학생감방의 감회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풋 냄새 풍기는 젊은이들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런 역사적 산물이 아직도 남아서 관광객을 기다라며 그 과거와 대화하고 있다.
우리 감방은 아직도 볼펜 같은 것을 맘대로 소지할 수 없고 검열 또한 심하다. 필기도구가 흉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젊은 치기는 유치하고 부끄럽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 그리운 추억이 된다. 맥주집 아가씨를 두고 결투하기도 하고 승리한 자의 환호와 패배자의 좌절과 회한도 낭만이 되어 차가운 벽을 통해 전해온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물 옆에는 짚시풍의 옷을 입은 남미 계열의 키 작고 피부도 약간 가무잡잡한 그룹이 모여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한다. 동전과 지전 몇 장이 기타박스에는 놓여있다.
기타 ,팬플릇, 피리, 케스터네츠, 북 등으로 연주를 한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El Condor Pass”를 연주하는 팬플룻 음(音)이 한참동안 여운이 되어 내 발걸음을 따라온다.

음악은 참 사람을 맑게 정화하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유, 수학적 계산, 엄격한 제도, 규칙 등에 시달린 사람들은 음악은 좋은 동반자이다. 엄격한 사람일수록 음악으로 풀어야한다.
부드러움 속에서 강함이 나온다지 않던가?
예(禮)를 그렇게 강조한 공자가 악(樂)의 전문가였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예악일치(禮樂一致)를 주장한다.

예는 형식이나 제도 격식 같은 것이라면 이것은 음(陰)이다. 악(樂)은 자유롭고 즐겁고 가벼운 양(陽)이다. 예악일치(禮樂一致)는 이렇게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에 음양의 이치에 벗어난 것은 없다.

한국에서도 《황태자의 첫사랑》은 영화가 상연된 적이 있다.

근엄한 궁정에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해서 조부의 밑에서 자란 황태자 칼 하인리히는 세상물정을 경험할 겸 하이델베르크로 유학하게 된다.
로텐옥센(붉은 황소)이란 주점이 있는데 이 주점에서 케티는 여급으로 일을 했다. 케티도 양친이 안 계셔서 동병상련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요안나공주와 정혼해 논 상태였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조부인 대공(大公)이 급환이라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는 2년 후에 꿈에 그리던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여 케티와 재회하였으나 다시 이별한다.
평민과 왕족이 결혼할 수 없는 사회적 관습 때문에 어쩔 수없이 헤어져야 했다.

황태자와 평민의 사랑, 높은 신분과 낮은 신분의 사랑 등 극적인 요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변 길을 따라 역으로 향한다. 자전거 하이킹하는 젊은이들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나는 터벅터벅 걸으면서 가장 원시적인 걸음에 대해서 잠시 한탄해 본다. 이렇게 하이델베르그를 떠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역에서 우리는 마인쯔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인쇄의 성지-마인쯔

마인츠의 역에서 내려 유스호스텔까지 가는데 길이 너무 멀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한 바가지쯤 흘렀다. 체감거리가 4-5km 남짓할 것 같다.
다행히 동행한 어여쁜 아가씨 두 명이 있어서 힘을 얻어서 걸을 수 있었다. 1시간 남짓 걸으니 숲 속에 유스호스텔이 나온다. 거기 있는 집은 물에 젖은 펜 그림이 번진 것처럼 희미해서 환상 같은 숲 속의 집이었다.
피곤하고 배가 고프고 안식이 그립다.
종자가 거의 다른 색깔 속에서 생활하다보니 외롭다.
춥고 배고파 객수가 더할 때는 아주 토속적인 우리 음식으로 향수를 지워버리는 것이 좋다.
오늘은 내 식성에 맞추어 식사준비를 하였다.

금발과 푸른 눈들을 피해 넓은 잔디 밭 한구석 나무 아래서 된장국을 끓였다. 호박과 양파 감자는 프라이부르그 시장에서 충분히 사왔다.
찌개를 끓일 때 감자는 제일 먼저 집어 넣어야한다. 다른 것에 비해 익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된장을 코펠에 풀고 감자를 넣고 호박을 넣은 다음 양파를 맨 나중에 집어넣는다.
마지막으로 향신료(seasoning)로 간을 맞춘다. 마무리는 소금과 마늘로 하면 된다.

하늘에 흰 구름이 떠있고
쌀밥엔 기름끼가 흐르네.
저마다 누려야할 식사가
언제나 자유로운 곳....

냄새가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줄이면서 포식을 한다. 된장찌개가 워낙 독특한 방향을 풍기는 것이라 그들의 개인주의가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술을 한잔 마시고 그리운 벗들 가족들 그리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이들에게도 엽서를 썼다.

이곳에는 자전거도로가 사통팔달로 잘 나 있어서 온 시민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고 있다.
튼튼한 다리는 남자에게는 위대한 영광(?)을 선사하고 여자에게는 아름다운 각선미를 선사한다.
남성의 위대한 영광(?)은 최고의 여성을 만든다.
유럽의 역 앞에 수백 여대의 자전거가 주차되어있어 출퇴근을 자전거와 기차로 하고있는 모습이다. 자동차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전거는 모든 교통기관을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버리자말자.
서울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는 차보다 자전거가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거대한 공룡처럼 달려드는 거리에서 자전거는 좀 위험하다.

구텐베르크와 고려 금속활자
마인쯔에 오면 사람들이여,
구텐베르크를 기억해다오!
그리고 구텐베르크를 알면
한국의 고려장경을 생각해야 된다오.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상정고금예문’은 구텐베르크보다 약 200년가량 앞섰다고 하는데 세계적 공인이 아직 안된 모양이다. 그러나 1972년 유네스코가 공인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말기1392년 백운화상이 지은 책이라고 한다.
병인양요는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병인사옥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리델 신부는 텐진에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는 전에 2차례 조선을 침략하였다가 실패한 프랑스에게 조선 침략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프랑스 침략계획을 미리 안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더욱 탄압하고 변경수비에 철저를 기했다. 이 해 9월 로즈 제독의 인솔로 양화진(절두산 성당 부근)을 거쳐 밤섬이 있는 서강까지 와서 측량을 하며 지도를 만들었다.
10월에는 다시 7척의 군함에 1,000명의 수병을 이끌고 물치도(작약도)에 나타나 강화도를 한 달간 점거하였다.
그러나 양헌수 등의 활약으로 11월 10일 프랑스는 철수하였다.
이들이 철수할 때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그래서 이 책은 불행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직지심체요절’이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한다.
‘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가 찍은 성경보다 70년이나 빠른 것이라 한다. 이들은 이런 문화재의 가치를 이 전부터 알고 어떤 상황이건 기회가 되면 수집하고 약탈해 왔다.
그 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최근에 다시 들은 소식은 최고의 금속활자로 구텐베르크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아직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목판인쇄물
금속활자뿐 아니라 ‘무구광정다라니경’도 목판인쇄물로선 세계 최고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와 흥미롭다. 무구광정다라니경(706년 인쇄 주장)은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도중에 발견되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인 인쇄술에 대한 종주국 자리를 내줄 형편에 놓인 중국은 1996년 12월 이 인쇄물이 중국 낙양에서 인쇄된 뒤 한국에 전래된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측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종이가 신라의 닥종이이고 서체가 한국전통서체임을 증거로 들고 있다.
중국측 최초의 목판본인 ‘묘법연화경’인쇄가 중국 주장대로 690년이라는 점도 의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만약 '무구광정다라니경'이 한국 것이란 입증이 되도 중국 판본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 될 수 없다.

묘법연화경의 글자체가 중국 주장과 달리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또한 인쇄연도가 나와 있지 않은 점 등 중국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각설하고 마인쯔는 유럽최고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살았던 곳이다.
그가 제일 먼저 찍은 책은 무엇일까?
최초로 인쇄한 책은 다름 아닌 바이블이었다.
고려의 금속활자로 이들은 불교의 바이블을 찍었다.
하여간 종교의 저력이 무섭다.
쿠텐베르크의 성경은 기독교 경전이고, 직지심체요절은 불교경전이다.
종교는 동서를 막론하고 초월적인 위치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유럽대륙의 책은 전부 합해 겨우 3만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금속활자로 많은 양의 책이 찍히게 되면서 정보화사회 학문과 정보 지식의 공유가 시작되는 활자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원래 직업이 장신구를 만들던 금은 세공사였다고한다.
구텐베르크의 장신구가 아닌 글자 세공의 시도가 인류문명에 거대한 사건의 단추가 된 셈이다.

 출처 < 김규만의 배낭에 담아온 西道東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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