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誌의 탄생 - 1908~1918년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은 나라의 외교권을 탈취하고 마침내 1910년에 일어난 한일합방의 늑약은
망국의 비운 속에 국권의 상실을 가져와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악랄한 식민정책은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강탈해 갔다.
이를 전후하여 사회 문화계에는 새로운 문물제도를 수용하기 위한 다방면의 개화운동이 일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 문예활동이었다.
李人稙과 李海朝가 각각 <血의 淚>와 <自由鐘> 등 新小說을 발표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온 청년 최남선이 1908년 11월에 최초의 문화계몽誌인 <少年>을 창간하고 나왔다.
이 본격적인 월간 종합誌 <소년>은 우리나라 新文學의 효시가 되며 그는 여기에 자신의 新體詩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발표하고 역사. 지리. 우화 등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는 <光文會>를 창설, 고문헌의 정리 보존에 힘쓰면서 20여 종의 <六錢小說>을 간행하는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발행 중지된 <소년>誌에 이어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 <새별> <學之光> <청춘> 등의
잡지를 계속 발행하여 新思潮의 도입과 봉건타파,민주정신 확립의 계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근대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광수가 同 <청춘>誌에 단편 <소년의 비애>와 <어린 벗에게>를 발표하고 이어 <매일신보>에
근대 최초의 장편 명작 <無情>과 <개척자>를 연재하고 나섬으로써 우리나라는 이른 바 [二人文壇時代]를 이룬다.
딱지본(육전소설 六錢小設)
딱지본은 1923년부터 신문관에서 주로 문고본으로 발행된, 값이 싼 소설책들을 말한다. 이 시기에 와서 고소설은 19세기말에 도입된 근대적 인쇄 기술에 의해 납활자 인쇄물의 문고본인 딱지본, 즉 육전소설로 널리 보급된다. 납활자를 사용한 조판 인쇄는 공정이 매우 빠르고 비용이 저렴하게 들었기 때문에 18,19세기에 유통되었던 고소설의 방각본 출판과 세책업에 비해 현저하게 신속하면서도 폭넓은 소설의 보급,유통을 이루어지게 하였다. 판형은 주로 B6판의 소형이고 값이 싸서 6전으로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고 휴대용으로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신소설(新小說)
개화기 소설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통용되기도 하나 그 내포는 서로 다르다. 이 용어는 일본에서 쓰이던 것인데,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보였고 이듬해 《혈의 누》가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新小說 血의 淚’라고 밝힘에 따라 이후 보편적인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인직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이 이전의 고대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 형태를 창출하였던 바, 신소설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지칭한다.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최찬식의 《추월색》 등이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