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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 커피 이야기

fabiano 0 1293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에디오피아의 양치기 소년 칼디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지 1000여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며 네들란들 상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지 170년 후의 일이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때에 커피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러시아인이 전했다고 하는 이도 있고 일본인이 전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없다.

이때는 외국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시대적인 분위기 탓인지 커피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에 고종에 대한 독극물 사건이 일어나면서 커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극에 달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 커피 맛을 본 사람은 고종황제였다. 1896년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때 고종은 식사 후 후식으로 세자이던 순종과 함께 담소하면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그 후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수시로 커피를 찾았다. 고종에게 평소 앙심을 품었던 김홍륙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매수하여 임금과 세자의 커피에다 독을 넣게 했다. 다행히 고종은 입에 넣었던 커피 맛이 이상하자 뱉어내 목숨을 구했다. 세자인 순종은 한 모금을 마셔버렸다. 그것이 연약한 체질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근무하던 손탁을 통해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든 고종은 그녀에 대한 신임이 남달라 러시아 공사관 입구에 2층 양옥 지어 주었다. 손탁은 이 건물의 아래층에 밥과 차를 파는 음식점을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커피숍 정동구락부다. 손탁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미인계 전략으로 한국에 건너와 사교계에 활동하며 한국인 고관대작들을 주로 만났다고 한다.

일반 서민들이 커피를 접한 것은 1900년대 초반 프랑스 상인이 나무꾼들을 대상으로 공짜 커피를 제공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나무 장수와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상인은 시중에 나도는 나무를 독점하기 위해 잔꾀를 부려 자신에게 나무를 파는 나무꾼들에게 선심용으로 커피를 한 사발씩 제공했다.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이상한 국물은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당시에 나무꾼들은 이를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이 탕국을 마시기만 하면 나무꾼들은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야릇함을 느꼈다.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그 때부터 이‘양탕국’ 한 사발씩 마시면 힘이 절로 솟고 인삼 녹용보다도 더 좋은 보약이라고 순식간에 장안에 소문이 돌았다.

나무꾼들은 너도나도 나무를 지고 프랑스 상인에게로 몰려갔다. 나무를 팔고 ‘양탕국’ 한 사발 주면 물먹듯이 단순에 비워버렸다. 매일 풀 만 먹고사는 사람이 속에 기름기를 빼는 독한 커피를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먹어치우는 것을 본 프랑스 상인은 혀를 내둘렀다. 몸에 좋다며 빈대도 잡아먹는다는 우리나라 보신문화(補身文化)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던 모양이다. 그 ‘양탕국’바람에 우리나라 나무 장수 가게는 파리만 날렸다.

단골 나무꾼들도 그 ‘양탕국’한 사발 바람에 완전히 안면을 바꾸었다. 값을 올려주겠다 해도 쳐다보지 않았다. 프랑스 상인의 커피 미끼에 코가 끼인 나무꾼들은 ‘양탕국’한 그릇을 더 먹겠다고 발바닥이 불이 나게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렸다. 프랑스 상인은 나무를 얼마나 끌어 모았는지 산더미 보다 더 큰 나무 무더기가 수십 동이 되었다. 프랑스 가게 앞에 줄을 선 나무지게를 바라보면 우리나라 나무 장수들은 속이 부글부글 끌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양탕국’을 구해서 줄 수도 없고 ‘저 놈의 양탕국’ ‘저놈의 양탕국’ 때문에 우리 집 망했다며 연신 신세만 한탄했다.

한국인 나무장사는 ‘양탕국’ 파동에 밀려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힘이 솟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처음과는 달리 속이 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이 배에 기름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양탕국’은 그나마 있는 기름기 마저 빼어버렸으니 배가 안 아프면 그것이 비정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무꾼들은 그 비싸고 맛 나는 ‘양탕국’이 속을 쓰리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속이 아파 드러눕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 것을 눈치챈 프랑스 상인은 그 때부터 커피를 아주 연하게 타 돌리면서 나무를 계속 끌어 모아 비싼 값으로 되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20년 이전에 서울 다동(茶洞)에는 전통 다방이 많았다. 이 중 궁녀 출신이 운영하는 한 곳에서 ‘양탕국’을 팔아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커피는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어 부유층이 아니면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

일반인들은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좋다는 소문만 듣고 다방에 오면 무조건 ‘양탕국’을 시켰다. 잘 먹고 커피 값을 낼 때는 열에 열 사람이 가격에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고 한다. 어중간한 한량들이 주로 기생들을 데리고와 커피를 마시러 왔는데 한 그릇이 모자라 두 그릇 세 그릇을 시키는 사람은 보통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큰 사발에 시켜 국 마시듯이 후후 불어가면서 마셔 댔다.

먹성 좋은 사람들은 밥을 말아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했다. 이것을 본 외국인들은 세상천지 별종을 본 것처럼 기겁을 했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덩치는 큰놈이 한 모금도 안 되는 잔을 앞에 놓고 몇 번을 입에 갔다 대는 것을 보고 “목구멍도 못 적시겠다”“남자새끼가 간지럽게 먹는다”며 오히려 힐끔 힐끔 쳐다보며 놀려댔다. 이처럼 많은 일화를 남기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중화 된 커피는 6·25 동란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PX를 통하여 인스턴트 커피가 급속히 보급되면서였다.

이 때부터 다방도 급속히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의 커피는 거의 다 밀수품으로 매우 귀했다. 다방에서는 찾는 사람은 많고 구하기는 힘들다 보니 담배꽁초를 삶아서 색깔을 낸 ‘꽁피’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이 ‘꽁피’는 구석진 다방이면 공공연히 행해 졌다. ‘꽁피’는 커피와 섞어서 팔았는데 육안으로 전혀 구분이 어려웠다. 입안이 약간 화끈거리는 것을 빼놓고는 달짝지근한 것이 한마디로 꿀 맛 이었다.

대부분 커피를 처음 마셔 맛을 몰랐기 때문에 누구하나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1960년대 말 커피 수입으로 인한 연간 비용이 780만 달러에 이르자 정부는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국내 커피제조업체 설립을 승인하게 된다. 1970년대 전후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생산하게 된다. 미원음료가 원두커피를, 동서식품이 미국의 제널럴 후드사와 기술제휴로 맥스웰 하우스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커피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분명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커피의 기원과 전래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1세기 초반 에티오피아에 칼디라는 목동이 가뭄이 계속되자 풀을 찾아 멀리까지 염소 떼를 몰고 갔다. 그날따라 염소들이 어떤 나무의 잎과 열매를 먹더니 평소보다 더 껑충거리며 즐겁게 뛰어 노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목동은 염소들이 먹는 열매를 직접 따먹어 본다. 자신도 마음이 황홀해 지면서 골치 아픈 잡생각이 없어지고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 신기한 열매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 열매는 귀중한 인간의 친구로 자리잡게 된다. 함께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목동들은 그 열매를 갈아 동물의 지방과 섞어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먼길을 떠날 때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다녔다고도 한다. 아랍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인 수니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커피를 음료로 마셨던 것이 아니라 긴 밤 동안 기도드리면서 잠들지 않게 하는 약으로 사용했다. 또 칼디 목동의 전설과는 달리 아라비아의 이슬람교 승려가 커피를 처음 마신 뒤 전파했다는 설이 있다. 1258년 아라비아의 승려 셰이크 오마르가 공주를 사랑한 죄를 짓고 추방된다.

허기에 지친 오마르가 이산 저 산을 헤매다가 우연히 한 마리의 새가 빨간 열매를 쪼아먹는 것을 보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그 열매를 따먹었다. 이상하게도 피로가 풀리고 활력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 열매를 이용하여 약을 만들어 많은 환자들을 구제했다. 그 공로로 그 동안의 죄가 풀리고 성직자로서 존경받을 받게 된다.
( 장병길기자 )


[ 출처 : 경남도민일보 (
http://www.dominilbo.co.kr ) 2003. 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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