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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기의 역사 이야기

fabiano 0 1408  

====1887년 최초의 전등, 경복궁을 밝히다====

⊙ 전등이 처음 켜지던 날의 풍경
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습니다. '아~!'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점화된 것입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견한 지 고작 8년만에 서울에 전등이 켜졌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기는 문명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등 가설에는 큰 돈이 들었습니다. 궁정에 제일 먼저 전기불이 켜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발전 설비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16촉광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 건달불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때의 발전기 조립·설치·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의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전기기사가 맡았습니다.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탄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렸는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 했다 합니다. 발전기 가동으로 연못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후로, 전등을 일러 물고기를 끓인다는 뜻인 '증어'(蒸魚)라 부르기도 했구요. 또 성능이 아직 완전치 못한 탓에 자주 불이 꺼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꼭 건달 같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건달불'(乾達火)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 111년 전 景福宮에서 있었던 일

@ 1887년 3월 6일 景福宮의 電氣 點燈

景福宮 내의 乾淸宮은 1872년 大院君이 香遠亭 북쪽에 세운 궁전으로 高宗皇帝는 이곳 에서 政事를 보고, 외국 使臣들도 접견하였음.
朝鮮은 1882년 5월 22일 濟物浦에서 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미국과 국교를 수 립 하였음, 미국 初代 全權公使로 임명된 푸트(Lucius H. Foot)는 高宗을 알현하고 외 교사절단(報聘使)을 요청하여 1883년 9월 8일 兪吉濬 등 10명으로 하여금 미국을 시 찰케 하였음.
외교사절단 일행은 서양의 첨단 과학 문명을 견학하고 귀국 후 朝鮮 政府의 對美 外交交易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음. 그 이후 高宗皇帝의 어명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電燈所(현 발전소)가 설치되고, 마침내 1887년 3월 6일 乾淸宮에 전등이 점화되었음.


@ 兪吉濬과 뉴욕 헤럴드 신문사 인터뷰 기사 내용


報聘使 일행의 한 사람이었던 兪吉濬은 당시 미국 시찰 도중 神의 조화라고 불리우던 에디슨전기회사의 대단위 전기 시설을 둘러본 다음, 뉴욕 헤럴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음.

뉴욕 헤럴드 신문, 1883. 10. 15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관람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몰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비로소 전기가 어떻게 켜지는지 알게 됐다. 또 지금까지 사용하던 석유등보다 값싸고 편리하며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2. 高宗皇帝, 에디슨社의 전기를 도입하다

@ 전기도입과 관련하여 당시 高宗의 心境을 기록한 내용

高宗皇帝는 壬午軍亂과 甲申政變을 겪은 이후 항시 자기 주위에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리 피난을 하기 위해 轎夫 20명을 宮城 북문에 대기시켰음.

그리고 고종은 "변란이 항상 밤에 일어나니, 밤을 낮처럼 밝게 하라"고 지시함.


@ 전기시설 주문

1884년 9월 4일 조선 정부는 당시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에디슨社의 전기 시설을 왕궁에 설치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냄. 푸트가 워싱턴 미국무장관 후렐링휘젠(F.T. Frelinghuysen)에게 보낸 서한과 회신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음.

에디슨씨를 대리하여 朝鮮에 電燈과 電話 설치 및 운영권을 신청한 바 있으며 또한 朝鮮公使의 美國 시찰 결과에 의하여 에디슨씨에게 朝鮮에 있는 宮殿에 電燈시설을 설치하여 줄것을 주문한 바 있사오니 善爲周施하시길 바랍니다. - 駐韓 美國 公使 푸트
‘京城電氣 60年’沿革史 京城電氣(株) 발행

@ 에디슨, 朝鮮의 전등 및 전화시설 독점권 신청과 총대리인 임명

朝鮮 政府로부터 전등 설비 대금을 받은 에디슨은 프레이자(Everett Frazar)를 조선 총대리인으로 지명하고, 駐韓 美國 公使 푸트를 통해 전기 설치 독점권을 신청함.

'Edison requests exclusive concession Electric Light Telephon Corea'

이 독점권 신청처리를 요청받은 駐韓 美國 公使 푸트와 朝鮮 政府와의 구체적인 교섭내용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음.

전등시설이 發注되자 에디슨은 1885년 6월 4일자로 프레이자를 에디슨 전등플랜트사업의 조선 총 대리인으로 지정하고, 설비확충 및 기계판매를 위한 권한을 부여하였음.

@ 景福宮 始燈日을 밝히는 내용

高宗 24년 2월12일(양력 1887년 3월6일)宣廳日記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음.

"…更后, 李鵬烈奉政院直下標信, 祇受兵曹后, 開建春門, 出送右營使·後營使·海防使·日官一員·主事一員·刑曹書吏二名·電機所牌長二名後, 三更量卽閉還納."

다시 뒤에 李鵬烈이 政院에서 直下한 標信(궁중에 急變을 전할 때나 궁궐문을 드나들 때 標로 지니던 門標)을 받들어 兵曹에 祇受한 뒤 建春門을 열고 右營使, 後營使, 海防使, 日官 1명, 主事 1명, 刑曹書吏 2명, 電機所牌長 2명을 내보낸 다음 三更(밤 11시∼오전 1시)쯤 문을 닫고 표신을 돌려 주었다"라는 뜻임. 여기서 電機所란 지금의 발전기를 설치한 장소를 말하며, 牌長은 원래 관청이나 일터의 人夫를 거느리던 우두머리인데, 여기서는 맥캐이와 또 한사람의 전기기술자를 말함. 이들이 電機所에서 三更까지 근무하다가 退闕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그 시간까지 발전설비를 가동하여 景福宮의 전등에 점등하였다는 것을 의미함.

@ 朝鮮의 전기시설 도입은 東洋 최초의 전기사업

조선 정부가 開化事業의 일환으로 또는 그의 상징적 플랜트로 도입한 景福宮의 전기 설비는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후 7년 5개월 만의 일이며, 전등 설비를 발주한 지 2년 6개월만의 일이었음. 이것은 中國 北京의 紫金城과 日本의 宮城보다도 약 2년을 앞선 선구적인 사업이었음.


@ 에디슨 다이나모(Edison Dynamo) 발전기와 系統圖


1. 에디슨 다이나모(Edison Dynamo) 발전기

1887년 3월 6일 景福宮과 乾淸宮을 밝혔던 이 발전기는 미국 에디슨社에서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약 1미터 정도이며, 설비 용량은 7kW 3대와 엔진 및 보일러 등으로 구성되었음. 당시 설비 도입가격은 2만 4,525달러로 16촉광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으며, 발전 연료는 석탄이었음.
에디슨 다이나모 발전기

2. 발전기 系統圖

香遠池에서 물을 끌어들여 보일러 안으로 들여 보내면 열에 의해 증기가 발생되는데, 이 증기가 엔진으로 들어가면 엔진을 돌릴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됨. 그리고 엔진을 돌리고 힘이 약해지면 이 증기는 온도가 높은 물로 바뀌게 되어 다시 香遠池로 들어감.

3. 발전기 설치 장소

景福宮내 香遠亭 북쪽의 醉香橋와 御井 사이에 설치되었음.
醉香橋와 御井 사이에 발전기를 설치한 이유

香遠池와 인접하여 發電用水의 取水가 용이하고주변의 공간이 넓어 시설물 설치에 적합하며 闕內의 중심부에 해당하여 각 殿閣에 配電이 가능하였음.


@ 乾淸宮의 전기 점등과 安尙宮의 追憶談

111년전 乾淸宮의 전기 점등을 보았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景福宮에서 오랜 기간을 근무했던 安尙宮이 1936년 安謙 (당시 京城電氣株式會社 監理課長, 燈火史硏究家, 일본인)과 면담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음.

“香遠亭 가교와 御井의 중간지점에 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큰 탱크 같은 것도 3개 있었다. 그 건축물 내부에 색색의 기계가 설치되고 서양인이 감독했다. 궁내의 대청과 庭에 커다란 燈籠 같은 것을 달아 서양인 손으로 기계가 움직이면 遠雷와 같은 소리가 울렸으며, 또 못(香遠池)의 물을 퍼올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뜨거운 물이 흘러 나오더니 낮을 속일 정도로 무서운 빛이 흘러나와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3. 景福宮 始燈의 장애물들

@ 蒸魚는 亡國의 징조 여론

전기의 발전으로 香遠池의 수온이 높아지면서 물고기들이 죽은 채 수면으로 떠오르는 蒸魚 현상이 잇달아 발생했음. 역대 史書와 圖讖設에 의하면, 蒸魚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라에 불길한 일을 가져온다는 것이었음. 따라서 조정의 일부에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궁궐의 전기 발전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음. 당시 사헌부 장령이었던 池錫永은 장문의 상소문을 통해 전기를 사치풍조라고 비난하였음.
전 규장각 교리 林爰相은 노골적으로 전등가설에 불필요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지적하였음.

@ 에디슨社, 朝鮮 政府의 전기관리책임자 여권신청서 美國 國務省에 제출

朝鮮에 전기공사와 점등을 위해 에디슨 전기회사는 전기기사인 맥케이(William Mckay)를 朝鮮 전기관리책임자로 임명하고, 1886년 9월18일 朝鮮에 입국하기 위해 美國 國務省에 여권신청서를 제출함.

@ 駐韓美國公使 록힐(W.W.Rockhill)의 청원서

乾淸宮에서부터 성공적으로 점화되었던 景福宮의 전등사업은 맥케이의 죽음으로 차질을 가 져왔음. 1887년 3월 8일 乾淸宮의 전등소에서 맥케이는 그의 권총을 조작하던 한국인 旗手(맥케이의 호위와 시설의 경비담당)의 우발적인 誤發로 총격을 입고 다음날 아침에 사망함. 당시 이 사건은 국가적 문제로 비화되어, 朝鮮 政府는 한국인 기수를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으나, 이 사건을 맡았던 駐韓 美國 公使 록힐은 맥케이의 遺言("고의로 쏜 것이 아니므로 처벌 받아서는 안된다")에 따라 무죄방면을 朝鮮 政府에 청원하였으며, 같은 해 3월 19일에 外部大臣 金允植은 무죄방면을 약속하게 됨.

@ 景福宮의 點燈 중단

外部大臣 金允植과 프레이자(Everett Frazar, 朝鮮 총 대리인) 사이에 있었던 문서내용은 다음과 같음. 프레이자가 1887년 4월4일 서신에서 "가지고 간 전등은 이미 起工하였다고 하는데, 완성이 되어 계속 사용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문의한 데 대하여 金允植은 "전등은 수개월 전에 이미 起工하여 궁중에 세웠는데 매우 安堅(편리하고 튼튼함)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사감독인 맥케이가 뜻밖에 暴死하여 전등 설비는 잠시 停工中"이라고 회신함.

이렇게 공사가 중지되었던 景福宮의 전기 설비는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887년 9월 1일에 새로운 전기기사 두사람을 雇聘함으로써 다시 운영이 재개되었음.


4. 高宗皇帝, 漢城電氣會社를 세우다

@ 1898년 1월 26일, 高宗은 단독출자로 朝鮮 최초의 전기회사인 漢城電氣會社를 설립

-農商工部에 전기사업 신청 및 허가

당시 조선의 황실은 한반도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러시아의 감시를 받고 있던 시기이고, 조 정 역시 親러파 각료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高宗은 그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전기사업을 착수함.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인 1898년 1월18일 農商工部 大臣 앞으로 전기사업 신청서를 제출함. 신청자 이름은 李根培과 金斗昇 두 사람임. 이들에 의해 漢城 내에서의 전차, 전등 그리고 전화설비시설과 운영권이 신청되어 같은 해 1월 26일자로 허가를 받아 漢城電氣會社가 설립되었음. 이것이 電力事業의 효시로서 올해가 電力事業을 시작한 지 100년째가 되는 해임.

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鐘路에 르네상스식 2층 社屋(서울 종로구 종로2가 8번지, 현재 長安빌딩 자리)을 건립하였음. 대지는 533평에 지상 건물 3동 203평의 규모였음. 그러나 착공 및 준공일은 분명치가 않음.

"전기철도에서 종로에 一大二層屋子를 건축하여 近己 竣工하였거니와 …"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01년 9월말에서 10월초 사이에 준공된 것으로 보여짐.


@ 1900년 4월 10일 鐘路에 민간 최초의 電氣 點燈

-1909년 日韓瓦斯株式會社가 韓美電氣會社를 매수한 다음 경성지점으로 사용.
-1915년 鐘路警察署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1929년까지 사용.
-그 뒤 朝鮮總督府(체신국 보험감리과와 통신과)에서 사용.
-1935년 합자회사 伊藤商店에 매각된 뒤부터는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건물은 철거되고 지금은 長安빌딩이 자리잡고 있음.

@ 1900년 4월 10일 鐘路에 민간 최초의 電氣 點燈

漢城電氣會社는 전차 운행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하던 것을 1900년 4월 9일을 기하여 淸]#里에서 西大門과 南大門 노선을 밤 10시까지 연장 운행하였음. 또한 밤이면 승객이 많은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의 조명을 밝게 하기 위해 4월 10일부터 鐘路에 세 개의 가로등을 점등하였음. 이 전등은 실로 우리 나라 민간 사회에 켜진 최초의 電氣 點燈으로 1966년부터 이 날을 '電氣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음.

@ 근대적 교통수단 電車 운행

당시 漢城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 한 것은 電車였음. 漢城 주변의 성외곽까지 주요 간선도로를 연결한 電車로 인해서 漢城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갖춘 東洋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음.


5. 漢城電氣會社가 韓美電氣會社로

@ 美 公使 알렌, 朝鮮 政府에 전기사업 관련 채무액 상환 요구

1902년 8월1일 駐韓美國公使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콜브란(Henry Collbran)의 전기사업 채무상환에 관해 조선 정부 外部大臣署理 崔榮夏에게 서신을 보냈음. 다음은 그 내용. 콜브란이 요구한 금액 150만원은 3년간 한성전기회사의 각종 설비와 운영비로 누적된 채무 169만 원 중 처음 高宗皇帝의 출자금액 19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임. 당시 150만원은 조선 정부 1년 예 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큰 금액임.
駐韓美國公使 알렌은 조선 정부가 이 금액을 갚지 못하면 계약에 의거 회사를 콜브란 소유로 만들어 타인에게 양도하겠다고 경고함.

@ 外部大臣(臨時署理) 趙秉式의 항의 書翰

이 항의 書翰에는 콜브란의 부당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였음. 상환요구액의 기준자료인 장부 원본을 제시하지 않았음. 전차사업과 전등사업에서 발생한 모든 이익금이 한성전기회사가 아닌 콜브란 개인 상사의 수입으로 전환되었음. 청구한 금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20만원의 규모(德沼線 선로공사와 漢城 상수도공사)는 아직 착공 도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상세히 나열하였음.

알렌은 조선 정부가 이처럼 많은 채무를 지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 미국인에게 채무를 지게 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朝鮮 政府가 무분별한 사업 추진으로 이러한 사태가 초래하였다고 비난하였음. 한편 高宗皇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례 없이 강경한 자세를 표명하고, 漢城電氣會社의 認許狀을 취소하라는 下敎까지 내린바 있음.

@ 漢城電氣會社 사옥 星條旗 게양 사건

漢城電氣會社의 채무 분규는 곧 일반 국민에게 알려졌음. 콜브란은 朝鮮 政府가 채무를 상환할 기미가 없자, 상환 기한인 1902년 8월 15일을 한달 앞둔 7월 중순에 鐘路의 漢城電氣會社 사옥에 게양했던 太極旗를 내리고 星條旗를 올렸음. 이로 인해 시민들의 美國人에 대한 감정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음.

콜브란과 朝鮮 政府의 채무 분규가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朝鮮人들 사이에는 콜브란에 대한 거센 반감이 일기 시작하고 끝내는 電車 안 타기 운동까지 벌어짐.

@ 漢城電氣會社 채무 상환

- 朝鮮 政府는 1904년 1월 21일 국토의 戰場化를 방지하기 위해 局外 中立을 선언
1894년의 淸日戰爭에 이어 러시아와 日本이 다시 우리 나라의 분할 점유 문제를 놓고 다 투다 끝내 결렬되자 마침내 露日戰爭이 일어났음.

- 美國을 友好國 이상의 同盟國으로 생각
美國은 朝鮮과 修交한 최초의 西洋國으로, 전등 설비를 공급하고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 설립과 改新敎를 소개하는 등 경제, 문화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나라였음. 朝鮮 政府와 高宗皇帝는 美國人들을 계속 이 땅에 남아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보호를 받을 생각으로 電氣事業으로 인한 채무를 상환하기로 하고 日貨 70만엔을 제의, 이에 합의하기에 이름.

1904년 8월 1일 韓美電氣會社는 코네티컷州法에 의하여 회사설립을 마치고, 朝鮮에서 정 식으로 발족한 후 鐘路에 있는 社屋에 韓美 兩國旗를 게양함.


6. 昌德宮의 전기 역사

@ 昌德宮의 전등 점화

朝鮮 政府는 昌德宮 電化 計劃에 의한 시설 확충이 필요함에 따라 高宗의 勅敎로 제2 電燈所(발전소) 신설을 추진함. 1894년 5월 30일 이의 竣工으로 昌德宮에도 전등이 점화됨.

高宗은 昌德宮의 電氣點燈과 때를 맞추어 1894년 5월 7일 이 곳으로 移御하였다가 같은 해 6월26일 景福宮으로 還御함.

@ 仁政殿 (昌德宮 내) 전등 설치

高宗의 下敎에 의해 仁政殿에 설치된 전등은 金銅으로 처리되었음. 등안의 장식이 황실을 상징하는 李花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기성품이 아닌 주문 생산에 의한 것으로 보여짐.

景福宮 香遠亭 가에 있었던 朝鮮 최초의 전등이 사라지고 없음에 따라 우리 나라 초창기 전기 역사를 말해 주는 유일한 유물로 남아 있음.


⊙ 신문별 電力事業 관련 보도기사 내용 (皇城新聞, 독립신문, 帝國新聞, 大韓每日申報 )


1.皇城新聞

-1898. 12. 29 : 전기철도 건설 추진 및 착공
-1989. 1. 20 : 배전선 도난사고
-1899. 5. 5 : 전차 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20 : 전차운행 방해 사고
-1899. 12. 22 : 용산선 개통
-1900. 4. 9 : 전차운행 시간 연장
-1900. 6. 8 : 전차사고
-1900. 6. 19 : 전차사고
-1901. 1. 30 : 덕소선 선로 건설
-1901. 6. 18 : 전기사업
-1901. 8. 19 : 전기사업
-1902. 1. 7 : 한성전기회사 사옥
-1903. 7. 11 : 전차안타기 시민운동
-1903. 7. 24 : 전차안타기 시민운동
-1906. 4. 20 : 마포선 부설
-1908. 1. 21 : 부민회의 전차요금인상 반대운동
-1908. 6. 24 : 부민회의 전차요금인상 반대운동
-1909. 7. 24 : 한국인 종업원 태업
-1899. 1. 16 : 배전선 도난사고
-1899. 5. 4 : 전차 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19 : 전차 상업운행
-1899. 5. 27 : 전차운행 규칙 및 폭동사건
-1900. 1. 11 : 용산선 개통
-1900. 5. 19 : 전차운행 시간 연장
-1900. 6. 18 : 전차사고
-1900. 7. 16 : 전차사고
-1901. 5. 17 : 전기사업
-1901. 8. 16 : 전기사업
-1901. 10. 4 : 한성전기회사 사옥
-1903. 6. 16 : 전차안타기 시민운동
-1903. 7. 16 : 전차안타기 시민운동
-1904. 8. 3 : 한미전기회사 발족
-1908. 1. 19 : 부민회의 전차요금인상 반대운동
-1908. 3. 24 : 부민회의 전차요금인상 반대운동
-1909. 7. 21 : 한국인 종업원 태업
-1909. 8. 7 : 한미전기회사 매각에 한국인 종업원 태업

2.독립신문

-1898. 2. 26 : 전기철도 건설
-1899. 5. 2 : 전차운행 규칙 및 운임
-1899. 5. 4 :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5 :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20 : 전차운행 방해 사고
-1899. 5. 27 : 전차폭동 사고


3.帝國新聞

-1898. 8. 10 : 경인철도 건설 추진 및 착공
-1898. 9. 14 : 동대문철도 건설 추진 및 착공
-1898. 9. 15 : 경성전기철도 건설 추진 및 착공
-1898. 10. 21 : 홍릉선 전기철도 건설 중지 촉구
-1899. 4. 21 : 홍릉선 전기철도 통행 불편
-1899. 4. 29 :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1 :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5 :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
-1899. 5. 20 : 전차 상업 운행
-1899. 5. 22 : 전차운행 방해 사고
-1899. 5. 30 : 전차폭동 사건


3.大韓每日申報

-1906. 7. 19 : 마포선 부설
-1907. 12. 22 : 전차 임금 인상 광고
-1910. 5. 26 : 고종의 지주처리 문제


The Energy Economic News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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