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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국보1호 양주동 박사의 추억

fabiano 4 1320  

오늘의 역사를 보니 1977년 2월4일 어제가 양주동박사님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합니다.
나의 기억속에는 무슨 프로인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멋진 재담으로 청취자를 즐겁게 해주셔서 상당히 인기를 끌어 나도 아버님과함께 그방송을 즐겨듣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분이 자칭 '국보1호'라는 말을 자주하신 생각이나서 돌아가신 날을 추억의 기준으로 잡기보단 국보에 어떻게 되셨을까 차라리 그날을 기준으로 잡아보자는 생각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잘올려진 글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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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세상에 인간이 어떻게 국보가 됩니까?"
"인간 국보라면, 판소리하는 인간문화재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인간 국보, 사실은 그런 거 없습니다.
국보라면 나라가 지정한 보물중에 보물인데, 어떻게 인간 국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평생 자기가 "인간 국보 1호" "걸어다니는 국보" 라고 자칭하며 살았던 학자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국어학자 양주동(梁柱東)선생인데요.

양주동 선생은 다 알다시피 향가연구에 가장 뛰어났던 권위자 입니다.
중고등학교에 실려있는 향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만가> 같은 작품들은 아마 양주동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배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왜냐면, 양주동 선생 이전에는 향가를 표시하는 향찰과 이두의 뜻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죠.
지금부터 양주동 선생에 대한 몇가지 일화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재기와 천재성, 박람강기(博覽强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1903∼1977) 선생은 생시에 인간국보를 자처했습니다.
선생의 자화자찬에 대해서는 물론 찬반논란이 있죠.
하지만 그가 남긴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와 ‘여요전주(麗謠箋注)'에 대해서는 누구나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택시운전사에게 “국보가 탑승했으니 각별히 운전을 조심하라”고 했고,
노상방뇨를 단속하는 경찰관에게는 “국보를 몰라보느냐”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게다가 “국보가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신문도 무료구독을 고집할 정도였으니,
참 재미난 분이죠?

선생이 자신을 처음으로 국보라고 말할 때는 한국전쟁때입니다.
1.4후퇴 당시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있었던 일이죠.
6.25 때 피난을 못한 바람에 수복후 부역자(附逆者)딱지가 붙어 곤욕을 치렀던 양주동(梁柱東)선생은 피난을 서둘렀습니다.
열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사에 들렀다가 복도에서 서성대고 있던 같은 처지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孫基禎)과 동양화가 이용우 (李用雨) 를 만났습니다.
양주동은 "우리나라 국보들이 다 모였군. 국보를 이렇게 푸대접해서야 쓰나" 하면서 툴툴거렸죠. 그 후 양주동은 자칭 '국보' 로 행세했습니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崇實)전문학교 영문학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이때부터 양주동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양주동은 돌연 국문학자로 변신했습니다.
1937년 학술지 '청구학총(靑丘學叢)' 에 논문 '향가(鄕歌)의 해독(解讀)'을 발표하면서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 도전했죠.
경성(京城)대학 교수 오구라는 29년 발표한 '향가 및 이두(吏讀)연구' 를 통해 신라 향가를 최초로 해독한 조선어연구의 권위있는 학자였습니다.

양주동이 향가연구에 뜻을 둔 것은 1935년 무렵입니다.
평소 향가가 일본인에 의해 비로소 해독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가 스스로 향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양주동의 향가연구는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에서 오구라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1942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조선고가(古歌)연구' 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으로부터 "1백년 뒤 남을 한권의 책" 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향가연구의 정본(定本)으로서 위치를 유지해왔습니다.

겓다가 양주동은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술과 재치가 철철 넘치는 입담으로 유명했습니다.
"내 이름이 양주동이니 양주(洋酒)동이, 입이 걸쭉해서 양(兩)주둥이오"라며 희희낙락했죠.
돈에 대해선 지독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주례를 부탁받으면 주례값을 흥정하고, 원고청탁이나 방송국 출연요청이 오면 으레 선금을 요구했죠. 앞에서 말했듯이, 신문은 국보가 읽어주는 것만도 영광이라며 언제나 무료구독이었고, 집에 도둑맞을 물건이 없다는 이유로 방범비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 일화를 소개해 드리죠.
어느 날 양주동 선생이 도로를 무단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달리던 택시가 급정지를 했습니다. "끼-익, 끼기끼기 끼-익"하는 소리와 동시에 택시 안에서 기사의 욕설이 터져나왔습니다.
욕설의 내용은 차마 글로 적을 수 없어서 생략합니다.
그러자 양주동님이 "어허, 이 사람아, 큰일날 뻔했잖은가! 조심하지 않고 국보 1호 다칠 뻔 했네, 다음부터 조심하게!" 라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졌답니다.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날 선생이 술을 거나하게 걸취고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가 그만 시궁창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궁창에 국보가 빠졌다"라면서 소리쳤습니다.
이에 길가던 행인들이 놀라 시궁창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보라는 물건이 있을리가 없죠. 이에, 행인들은 양주동 선생보고 국보가 어딨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선생 왈 "내가 바로 국보일세, 걸어나다는 국보, 양주동!!"

선생의 연애편지사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죠.
시인으로서의 문재도 뛰어났던 선생은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서울에서 짝사랑했던 여대생을 잊지 못해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구절절한 미문의 연애편지는 흠모하는 여대생의 손에 닿기도 전 사감의 검열로 번번히 차단되곤 했죠. 미션 스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된 선생은 성경가운데서 "사랑"과 관련된 대목들을 뽑아 연서를 보냈고, 정성에 감복한 여학생으로 부터 마침내 승낙을 얻어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희대(稀代)의 천재이자 기인(奇人), 그리고 괴짜 양주동 선생,
비록 이런 일화를 읽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이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는데요.
선생이 남긴 업적을 생각하고 그냥 애교로 봐줍시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귀중한 향가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니깐요.

 
[ 출처 : Design by Kebist (  http://blog.empas.com/kebist/ ) ]

 

4 Comments
리버룸 2006.11.08 00:12  
양주동 선생님을 여기서 보다니...감개무량이군요.
fabiano 2006.11.08 00:57  
그 시절, 학창시절에 양박사님의 에피소드는 유명한 것으로 인구에 많이 회자된 것으로 압니다.
드넓은 광야 2006.11.08 20:24  
희대의 기인분들은 술 하고는 뗄수가 없나 봅니다
fabiano 2006.11.08 22:19  
희대의 인물은 아니어도 이 몸도 술하고는 인연이 많아서 가끔씩은 쑈도 하니....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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