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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東亞에 연재되었던 이백천의 음악인생

fabiano 5 2217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백천의 음악인생 ]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대중음악평론가 이백천의 회고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 가요 역사의 산증인이자, 일세를 풍미한 포크음악의 이론적 스승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그에게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편집자>

 
1962년 ‘민들레 악단’의 드라마센터 공연. 가수는 유주용, 연주자 중 앞줄 맨 왼쪽이 나 
내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배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하구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소읍이다. 개성에서 서쪽 해주로 가자면 약 30km쯤 되는 지점인데, 지도에서 보면 바로 38도선 아래에 있으며 배천온천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났다 해서 내 이름은 백천이 됐다. 한자로 ‘白川’이지만 지명으로 부를 때는 ‘배천’이 된다. 1933년 3월13일 새벽. 의사 이종완과 부인 이완배의 차남이었다.

누군가 내 사주를 보고 예(藝)와 문(文), 역마(驛馬)와 도규(刀圭)가 있다고 했다. 예는 음악, 문은 글, 역마는 매스컴, 도규는 의사가 되어 칼로 환자를 수술할 팔자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평론도 음악에 칼을 대는 것이니 사주가 아주 빗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세 살 때 집안은 조금 더 북쪽, 황해도 신계(新溪)로 이사를 했다. 집 앞쪽은 잡화상점, 뒤쪽은 병원이었다. 어머니의 바로 아랫동생인 영배 삼촌이 그때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했다. 삼촌의 방에 몰래 들어가 외숙모의 경대 위에 있는 분갑을 열어 냄새를 맡곤 했는데, 숨막힐 듯하면서도 환각적인 그 냄새가 나의 첫 후각적 성체험이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쌍날개 비행기를 보고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처음으로 소리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그때 내 별명이 ‘군수영감’. 뒷짐을 지고 느슨느슨 걷는 폼이 그랬던 모양이다.

만 여섯 살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3학기(당시는 3학기제)에 우리집은 다시 전라도 이리(지금의 익산)로 이사를 했다. 물자가 귀해지기 시작한 시기(1940년)라 내가 신을 것이 여자 운동화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싫어 그냥 맨발로 학교에 갔던 기억도 있다. 일요일이면 목상리에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큰집에 가 사촌들과 어울려 논에서 우렁도 캐고 개울에서 미역도 감았다. 그때쯤 아버지가 라디오를 가져오셨다.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찾는 일이 신기했다. 음악소리가 너무도 깨끗하고 곱게 들렸다.

3학년 때에는 다시 서울 노량진 본동으로 이사했다. 한강교의 아치가 너무 웅장해 산처럼 높게 느꼈다. 한강교 남단 바로 옆에 제법 큰 요정이 있었는데 이름은 용봉정(龍鳳亭), 그 뒤 계곡에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학교는 흑석동의 은로국민학교였다.

전학하고 얼마 후부터 조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교장의 훈시, 동경을 향한 궁성요배(宮城遙拜), 교육칙어(敎育勅語) 낭독, 대열행진연습, 사열. 여기저기 나붙은 문자도 어수선했다. 국어상용(일본어상용)에 성씨개명, 공출, 징용, 징병, 귀축미영(鬼畜美英), 결사대,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이었다.

아버지는 李자를 둘로 나눠 목자(木子)라는 성을 만드셨다. ‘기노코’가 창씨개명한 새 성이었다 ‘카미카제’ ‘옥쇄(玉碎)’라는 단어가 자주 들려올 즈음 미군 비행기 B29가 한강교 위를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할 무렵 졸업기가 되었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일차 경복중학 낙방, 이차 중앙중학 합격. 이때가 1945년 4월이었다. 그리고 종전과 해방. 한동안 전차가 다니더니 전력사정으로 운행중단이 되고 역마차가 교통수단이 되었다. 지나가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면 가방 먼저 던져넣고 올라타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상도동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전철을 타려면 노량진까지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때로는 전기사정으로 전차가 오지 않아 종로 계동 중앙중학교까지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한강다리 건너 용산, 삼각지, 남영동, 서울역, 남대문을 돌아, 을지로, 종로2가 교동국민학교앞 지나, 계동 휘문중학 지나고 대동중학, 그리고 맨 끝 언덕 위의 학교.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는…” 이렇게 시작하는 교가의 중앙중학교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거리였다.

1학년, 넉 달 반 동안은 아직 일제치하였다. 어느 날 맨발로 조회 앞줄에 섰는데 선생이 다가와 학교에 올 때는 신발을 신고 와야 한다고 했다. 신발은 있었다. 발바닥 모양의 나무쪽 위에 고무로 띠를 두른 슬리퍼 같은 나무신발. 그것을 학교에 신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을 건널 때 강물에 던져버렸다.


“너 무서운 아이구나!”

소문난 호랑이 유경상 선생의 영어시간이었다. 흑판에 필기체의 대문자 ‘I’를 써놓고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J’ 같아서 “제이”라고 했다. “나니?(무엇이라고?)” 무섭게 질책이 날아왔다. “아이데스!(‘아이’ 입니다!)”라고 수정했다. “나와!”라는 호통에 앞으로 나간 나는 종아리를 내밀어야 했다. 회초리로 힘껏 종아리를 치며 “아이까? 제이까?(아이냐? 제이냐?) 아이까? 제이까?”를 반복했다. 종아리에는 뻘건 줄이 죽죽 생기고, 그 날 이후 나의 별명은 ‘제이상’이 되고 말았다.

난고(南鄕) 선생의 국어(일본어) 시간이었다. 키가 작아서 맨 앞줄 책상에 앉은 나는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깔고 몰래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생이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소설입니다”라고 똑바로 얼굴을 들고 대답을 하니 잠시 후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기미와 오소로시이 다마고다!(너는 무서운 아이구나!)”

맨발 등교, 제이상, 오소로시이 다마고…. 사춘기의 꿈이라던가 설레임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꼭 암울하다거나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방 되던 해 가을, 아버지는 생명보험사의 의사직을 접고 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실의 무급조교가 되셨다. 그때 아버지는 40세. 가족은 어머니와 3남4녀. 막내동생은 두 살이었다. 상도동 숭실대 정문 맞은편에 아버지가 사두었던 야산 4000평이 있었다. 어머니가 농부로 나섰고 주말이면 아버지, 형 그리고 내가 도왔다. 콩, 마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 참외, 수박, 토마토에 벼농사까지 조금 지었다.

집에서 밭까지는 약 2km. 나의 담당은 주로 운송이었다. 재와 인분을 버무린 비료를 리어카로 운반하는 일, 하교후 수확물을 거둬 어머니와 같이 돌아오는 것도 내 일이었다. 쌀, 보리를 제외한 모든 부식을 자급자족했다. 물주고 거름주기, 봄에는 고랑 파고 씨뿌리고 여름에는 잡초 뽑고 가을에는 새를 쫓았다.

형은 의대를 다니고 있어서 환자 볼 손이 거칠어진다고 일을 피하는 편이었고 누이는 하루 종일 밭에서 사시는 어머니 대신 가사를 맡았고, 두 살 밑의 여동생은 누이의 보조, 네 살 아래 남동생은 아직 국민학교 학생이라 노동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밭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옷도 주고 책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도 주는 관립철도학교에 가는 것이 어떠냐는, 다시 말해 기관사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장남은 의사, 차남은 기관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때(1946년)쯤 학교공부와 밭일 외에 새 일과가 생겼다. 친구 김영대의 권유로 학교 밴드부원이 된 것이다. 연습실은 본관 4층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 모여 연습을 했다. 나의 악기는 가장 사람의 소리와 가깝다는 알토 색소폰이었다. 밤에 집에서 명곡집을 펴놓고 악기를 연주하면 동네 개들이 따라 짖었다. 아주 좋은 연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군군악학교 시절

우리 악대는 시가행진에도 참여하고 경연대회에도 나가고 정동라디오 방송에 출연도 했다. 동네 여학생 중 누구의 얼굴이 곱고 누구의 다리와 걸음걸이가 반듯한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일과가 더해졌다. 아버지가 내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동안 매일 밤 7남매 중 나에게만 한 시간씩 영어를 지도하셨다. 진도는 하루에 교과서 두 페이지씩이었다. 2학년 때에 3학년 과정을 끝냈고 3학년 때에는 4, 5학년용 교과서를 끝냈다. ‘영어3위일체’라는 책의 해석, 문법, 작문까지도 끝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급조교 기간이 끝나고 강사, 조교수로 올라선 다음에도 7남매의 학비를 대는 것이 힘에 부치셨는지 집에서 밤에만 여는 의원을 운영했다. 밤에 환자도 받고 왕진도 다니셨다. 살림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머니는 계속 밭일을 하셨고 나도 변함없이 운송담당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6·25 사변이 일어났다. 6월28일 새벽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강교 여섯 개의 아치 중 세 개가 폭파로 강물에 박혔다. 우리집은 강의 남쪽이라 피란에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룻밤 밭에서 밤을 새고 아침이 되니 어느새 상도동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다. 병원에 출근하던 형과 간호원이던 누이는 직장과 함께 피란을 했지만 집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 넷, 그리고 나는 고구마 감자로 연명하며 9월28일 수복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그해 12월5일 해군군악학교 3기생 모병시험에 합격했다. 53명의 동기생과 함께 이틀간 기차를 타고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 도착해 해군 신병 19기가 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만 17년 9개월이었다.

신병훈련소에 들어가서 처음 들은 소리는 “서울 깍쟁이들 왔나, 잘 왔다”였다. 해군은 군기가 셌다. 특히 군악병에 대해서는 훈련조교들이 “이놈들 잘 걸렸다”는 듯이 마구 휘둘렀다. 어느날 훈련소의 대형 목욕탕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보고 놀랐다. 모두가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신병훈련소를 거쳐 군악학교에 가니 1기 선배들이 우리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군기를 잡았다. 구보, 원산폭격, 몽둥이 찜질, 토끼뜀 등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우리들 3기생은 2기생보다 학력이 높은 편이어서 질투 섞인 기합도 많았다. 청소, 악기 손질, 복장검사, 집합 속도 등 잡힐 꼬투리는 항상 널려 있었다.

 

5분만에 끝난 아버지의 면회

1·4 후퇴 때 식구들은 이리로 피란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진해 신병훈련소로 불쑥 면회를 오셨다. 훈련중 잠시 시간을 얻어 연병장 풀밭에서 면회를 했다. 아버지는 앉으시자마자 “요새 책 보냐”고 하셨다. 입대할 때 딱 두 권 지참한 책이 있었다. 일본 안파(岩波)문고 출판의 서양철학사 상하권. 마침 한 권이 훈련복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냈더니 웃으셨다. 부자간에 별로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형은 6사단의 군의관으로 강원도에 있었고 가족은 이리에 있으며 그곳에서 조그마한 의원을 차렸다는 말씀이셨다. 면회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시면서 또 한마디 하셨다. “공부해라.”

신병훈련 2개월, 군악학교 교육기간 1년6개월에 해군 일등수병이 되었고 바로 부산 본부군악대에 배속됐다. 그때는 가족도 부산에 와 있어 형만 빼고는 주말에 모두 만날 수가 있었다. 입대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옛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대학생이었다. 등록이 어떻고 수강신청이 어떻고 학점이 어쨌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꼭 대학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서울대학)이 있었고 아버지가 그곳에 재직하고 계셨다.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아직 제대는 멀었지만 시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서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의대에 넣을까요” 했더니 “의사가 뭐 좋으냐”고 하시며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음악 좋아하니 음대를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수 자제에게는 재직학과에 한해서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문리대 영문과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3년8개월의 복무기간 동안 짧은 휴가를 받아서 시험을 치르는 등 어렵게 학점을 따고 있었다. 1954년 8월 만기제대했을 때의 나이는 스물 하나, 학교는 2학년 2학기를 맞고 있었다.

제대 후 ‘이제는 편히 대학에 다닐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연구교환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다. 대학에서 월급이 나왔지만 의원 수입이 없어진 만큼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군악대 동기들과 악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에이톤(A. Ton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로 미8군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 악단에는 외부에서 붙인 별명이 있었다. ‘오단장, 십감독’. 동기생들이니 모두 동격이었고 누가 더 잘나고 못날 수가 없었다. 악단장은 순번제였으며 전부 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뤘다. 나중에 이화여고 교사를 지내고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된 김정길말고도 편곡하는 친구가 여럿이었다. 김정태, 김형찬, 김영대, 김성진, 이문용 외에 나중에 입단한 육군군악대 출신의 허린승(외대 러시아어과), 맹원식(전 워커힐악단장), 안건마(테너색소폰, 재미 목사), 정성조(서울고, 서울음대, KBS 악단장)등 모두가 능숙한 편곡자 겸 연주자들이었다.

 

콜라·양색시·‘딕시 랜드’

낮에는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저녁에는 용산 밴드 사무실에서 우리를 픽업하러 오는 미군 트럭을 기다렸다. 가는 곳은 날마다 달랐다. 용산 부근일 수도 있고 파주, 의정부, 동두천, 부평, 오산, 평택이 될 수도 있었다. 먼 곳에 갈 때면 식사가 제공되었다. 보통 세 스테이지를 했는데 휴식 때마다 오렌지 주스나 콜라를 웨이트리스가 날라왔다. 클럽 안 풍경은 어디든 비슷했다. 백인, 흑인 병사들에 짙은 화장의 아가씨들. 이미 결혼한 한·미 커플은 걸어서 부대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파트너인 한국 여성들은 동내에서 트럭에 실려 부대로 들어왔다. 때로는 부대 앞에 무리 지어 있다가 지나가는 GI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기도 했다.

우리들의 연주곡목은 주로 글랜 밀러 스타일의 스윙이었다. 블루스, 탱고, 트위스트, 차차차, 맘보에 지터벅(지루박)과 당시 유행하는 팝도 연주했다. 클럽 안은 흑인, 백인이 은연중에 구분되는 분위기였다. ‘옐로 로즈 오브 텍사스’를 연주할 때는 남부출신 백인들이 일어나서 환호를, ‘딕시랜드’를 연주하면 흑·백의 북부출신이 일어나 기세를 올렸다. 이역만리 낯선 땅, 삭막한 막사 주변이었지만 댄스파티나 플로어 쇼가 있는 날만은 축제였다.

저녁 8시부터 11시경까지 연주를 하고는 악기를 챙겨 트럭의자에 앉아 서울로 돌아왔다. 운전사가 한 사람씩 집 앞에 내려주었는데 서울의 북쪽에서 돌아올 때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은 새벽 한 시나 두 시. 전력이 달려 제한 송전을 하던 시절이어서 집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으면 석유등이나 촛불을 켜야 했다. 여름날이면 나방이 몰려들었다. 낮에는 캠퍼스, 밤에는 돈벌이 연주를 했으니 그 공부가 실할 수가 없었다.

시인교수 송욱 선생의 리포트 과제가 있었다. 문리대 본관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가로지르는 오솔길 가에는 벤치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마침 앞을 지나는 선생께 리포트를 내고는 동기인 유종호(문학평론가), 신우식(전 서울신문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선생께서 연구실에서 나와 우리 앞을 지나시다 멈추었다.

“학생이지, 아까 리포트를 낸 사람이.”

어조가 심상찮아 천천히 일어섰다.

“이거 안 돼요. 점수 못 줘요. 자신의 생각이 없잖아요.”

그 말만 남기고 선생은 가버리셨다. 유종호가 옆에서 혼잣말을 했다.

“남의 글, 남의 생각이라 안 되면, 그러는 자기는 남과 무관인가?”

송욱 선생에 관해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또 있다. ‘T.S. Eliot’와 ‘W.H. Auden’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였다. 선생은 ‘T.S. Eliot’에 대해 출제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시험시간 흑판에 쓰신 것은 ‘W.H. Auden’이었다. 학생 중 몇이 항의했지만 선생은 “내가 강의한 건데 그때 학생은 뭘 하고 있었지?”라고 말씀하셨다. 쥐어짜면 몇 줄은 써냈겠지만 그게 내 생각일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답안지를 안 내고 그냥 나와버렸다.

 

‘나의 생각’을 찾아서

후에 내가 동양방송(TBC) PD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영문과 동기인 김규 상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클래식을 즐겨 듣던 선생이 FM 라디오에 출연차 오셨다가 제자의 방에 들른 것이었다.

“이군. TV에 나오는 거 봤어. 요즘 어때.”

나는 역습의 기회라 생각하고 선생께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나세요? 자기 생각 안 썼다고 점수 안 주신 것. 제가 그 후로 얼마나 혼났는지 모르실 겁니다. 내 생각이 뭔지 찾느라구요.”

“내가 언제 그랬지? 그랬을 리가 없어. 안 그랬어.”

우리 세 사람은 같이 웃었다.

서울대 병원, 선생의 장례식에 제자들이 모였다. 조준학, 백승길, 김규, 신우식, 유종호. 우리들은 아주 검소한 유족을 보았다. 장례식 내내 사람들은 말소리가 작았고 서로 눈으로 대화했다. 그날 정적의 고요를 느끼며 우리는 흩어졌다. 송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의 선명함에 놀란다. 선생께서 가르쳐준 ‘나의 생각’은 지금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기본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내가 가까이 지낸 이는 한철모(방송인)와 백승길(작고, 전 한국박물관협회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했던 한철모는 자신과 같이 걸을 때도 보폭을 줄이지 않던 나를 오히려 좋아했다. 그의 집에 간 일이 있다. 책상 위에는 아주 두툼하고 큰 영한사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책은 별로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해설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던 한철모는 음성이 아주 맑고 생각이 뚜렷했으며 웃음이 많았다. 

백승길의 집은 남영동. 방향이 맞아 자주 어울렸다. 깨끗한 말씨와 냉정한 성격을 가져 아이스박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여학생과 가까이 지냈지만 맺어지지는 않았다. 졸업 후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평생을 미술평론과 유네스코, 박물관 관계의 일을 한 이 친구를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그는 몇 해 전 작고했다.

동급생 중에는 4명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설순봉(번역문학가)이다. 누군가가 지은 별명이 ‘하나님의 딸’이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책을 껴안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캠퍼스를 걸었다. 설순봉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대학이 아니라 수도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런 설순봉이 영문과 1년 후배와 결혼했는데 낭군의 이름은 김우창(문학평론가, 고대대학원장)이다.

졸업이 다가왔다. 과 주임이면서 총장이었던 권중희 교수가 우리를 모아놓고 말씀을 하셨다. “영문과 졸업이지만 여러분은 아직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며 이제 겨우 사전 가지고 영문을 깨치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전공은 졸업하고 천천히 정해야 할 것이다.”

몇 번의 시험포기가 있어 5년을 채우고 1958년 한 해 아래 친구들과 졸업을 했다. 이상회(전 국회의원, 신문협회이사)와 위에 거명된 김우창의 클래스였다.

“Show must go on!”

또다시 아버지와 상의했다. “대학원에 가볼까요” 했더니 “연구실 생활이 뭐 좋은 줄 아느냐”고 하셨다. 아버지의 생리학 연구실에는 깨끗치 않은 플라스크, 등잔, 액체를 담은 푸른 병들, 녹슨 수도꼭지, 바랜 논문집, 의학서적 등이 있었다. 사주에 문(文)이 있다고 했으니 잠시 공부길을 찾을까도 했지만 죽으라고 책만 파고들 입장도 아니니 분수에 맞게 살자 싶어 文에서 藝로 방향을 틀었다.

원효로 선린상고 들어서는 길목에 ‘한국연예연합회’라는 회사가 있었다. 약 50여 개의 단체들을 관장하는 연합회사였다. 사장 안찬옥, 전무 이완영(중학 1년 선배), 상무 김영순(서울치대 출신, 명 트럼페터에 노래도 일품,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선배이기도 했다). 30여 밴드와 20여 플로어 쇼단체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모든 단체는 미군의 스페셜 오피스에서 넉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S.A(스페셜 A), A, B, C로 등급이 나뉘고 D는 드롭(낙제)이었다.

나는 연합회를 찾아가서 나를 써달라고 했다. 월급은 일하는 것을 보고 주라고 했다. 제작부가 만들어지고 레코드실도 생겼다. 나는 업무부의 제작 스태프가 됐다. 음악실장은 서울음대 출신의 박선길(가수 박정운의 아버지). 제작부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흑인 여성 미세스 화이트가 주로 발음을 봐주었고 나는 통역을 겸하며 제작 전반에 끼여 들었다. 제법 큰 구내식당이 예비 오디션 장소로 사용됐다. 연합회 스태프와 해당단체 오너들이 어울려 기록하고, 지적하고, 수정했다. 의상, 안무, 음악, 영어발음, 구성, 쇼맨십, 표정, 스테이지 매너 등을 체크했다. 본 오디션의 결과가 좋아야 좋은 연예인을 영입할 수 있었고, 그래야 일도 많고 수입도 많아지니 모두들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당시의 경제사정으로 볼 때 연예인들의 달러 수입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본 오디션에서 나의 역할은 미국인 심사원들의 지적사항을 듣고 기록해 해당 단체장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각각 다른 전문분야를 담당하는 심사원들의 지적은 다양하고 치밀했다. 곡의 해석, 발음, 표정, 몸짓, 의상, 구성의 다양성과 진행의 스피드, 그리고 공연의 흥과 재미까지도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쇼의 근간은 Speed(경쾌한 진행속도), Fun(재미), Variety(변화, 다양성)라는 것을 배웠고 ‘Show must go on!’이라는 구절도 익힐 수 있었다.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서 각 단체는 항상 새 레퍼토리를 준비해야 했다. 매달 미 국방성에서 발간하는 뮤직 폴리오가 각 클럽에 전송되었는데 그 안에 ‘스타크 어레인지먼트(Stock Arrange-ment)’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일류 편곡자의 손으로 매만져진 미국 본토 히트 연주곡의 파트별 악보가 들어 있었다.

 

이봉조부터 패티김까지

당시 기억나는 연주인으로는 이봉조, 최창권, 김강섭, 엄토미, 송민영, 여대영, 김인배, 정서봉, 김희갑, 박성원 등이 있다. 이때쯤 이름을 ‘Knights of Melody’(A.Tone의 후신)로 바꾼 우리 악단은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주한미군 위문단을 편성해 서울로 보내면, 주한 미군 연예 담당자는 그들이 첫날밤을 우리가 출연하는 E.D.F.E클럽( 을지로 6가 극동 미공병단 본부인 E.D.F.E(Engineering District of Far East)에 있던 장교 클럽)에서 보내도록 스케줄을 짰다. 먼길 온 것을 환영하는 뜻에서, 그리고 한국에도 이만한 악단이 있다는 자랑의 뜻에서였다.

당시 8군 무대에서 노래한 가수는 최희준, 프랭키손, 곽순옥, 로라 성, 현미, 한명숙, 이금희, 이춘희, 모니카 유, 여대영씨 부인인 소프라노 봉혜숙, 소프라노 이영숙, 미국 가기 전의 어린 윤복희, 패티김, 김씨스터즈 그리고 막내들인 이씨스터즈 들는데,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 악단에도 전속 가수가 있었다. 손시향(서울농대), 박형준(외대 스페인어과), 정숙자(이대 법대), 이석(왕실의 후손/외대 스페인어과), 유주용(서울문리대 물리학과) 등이었다.

1958년 제대하고 1964년 이른봄까지, 낮에는 학교 공부 혹은 연합회 일에 매달리고, 밤에는 E.D.F.E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역대 공병단장의 인계사항으로 매년 바뀌는 클럽 서전들은 우리를 전속으로 써야 했다. 미8군 사령본부 클럽의 ‘다운 비이츠’ 악단과 우리 ‘나이츠 오브 멜로디’ 악단은 늘 S.A등급이었고, 매니저 없이도 일자리 걱정은 안 했다. 당시 우리 악단이 받는 월 보수는 1200달러로 1인당 100달러가 넘었는데, 대학등록금의 서너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밤낮으로 바쁜 일과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다. 연예회사의 월급과 악단의 수입으로 나는 학생귀족이었다. 내 학비 충당하고 집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62년 ‘나이츠 오브 멜로디’는 미군무대를 떠나 다운타운 악단이 됐다. ‘민들레’라고 악단 이름을 바꾸고 우리 음악으로 레퍼토리도 넓혔다. 퇴계로의 문라이트클럽에 출연하면서 이대강당, 서울대문리대 강당,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도 했다. 여러 차례 KBS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나는 연주를 하며 악단의 사회를 겸하기 시작했다

 


스타들의 스무살…혹은 살아남고 혹은 사라지고


히피 문화가 세계를 휩쓸던 1960년대.춥고 배고픈 이 땅에도 청년문화가 꽃피었다.
그 중심에 섰던 ‘쎄시봉’과 ‘청개구리집’멤버들. 한국 쇼비즈니스 생성기에 혹은 별이 되고 혹은 사라져간 재기와 순수의 청춘, 그 짧은 기록.

 
1964년 경 TBS TV의 ‘굳 이브닝쇼’를 진행할 때의 모습. 맨 왼편이 나 

1958년 나는 5년 간의 대학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딴따라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 만 25세. 이 해에 기억나는 일은 보신각 바로 옆자리의 HLKZ-TV에 내가 몸담은 민들레 악단이 출연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황문평(대중음악평론가) 선배와 연극연출가 이기하씨를 처음 만났다. 이때쯤 우리 악단은 ‘타향살이’의 고복수씨 은퇴기념 호남순회공연에도 참가했다. 황금심, 남인수, 이난영씨 등 여러 원로가수들과 함께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물 끼얹은 듯 조용했던 객석의 ‘숙연함’이다. 어떻게 청중의 소리 듣는 분위기가 그토록 조용할 수가 있을까. 고복수씨의 은퇴공연, 이제는 더 이상 정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도 가슴 아팠던 것일까. 극장 안은 객석의 응시와 경청으로 공연 내내 숙연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여관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여관으로 이동할 때 당시 스타들의 걸음걸이다. 지방도시 길가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일까. 길 한가운데를 횡렬로 걸어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난쟁이 나라의 걸리버나 도시를 짓밟고 가는 ‘용가리’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 뒤떨어져서 따라가는데 그들은 길가의 전주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남인수, 현인, 루이 암스트롱

서서히, 그러나 지체없이 50년대는 지나가고 60년대가 시작됐다.

1960년 4·19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던 그 해 12월 문화방송 라디오가 개국했고 같은 달 KBS TV도 개국했다. 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국 개국, 이듬해 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개국, 그리고 그 해 12월4일에는 TBC TV(동양방송)가 개국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한다던가, 잇단 민간 상업방송 개국으로 우리 시청각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클래식, 가곡, 국악 위주로 방송하며 품위를 중시하던 KBS 주변에서 민방들이 새 리듬과 창법의 음악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1961년 루이 암스트롱이 워커힐 개관기념 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그는 “레이디스 앤드 젠틀멘”이라는 인사 대신에 “Hello Folks!” 라고 했다.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불렀다. ‘블루베리 힐’ ‘헬로 달리’ 등. 쉰 소리에 서민적인 미소, 눈이 무섭게 컸고 볼과 입술이 두툼했다. 나는 대학 때부터 구독하던 재즈 격주간지 ‘다운 비츠(Down Beats)’를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는 그와 둘이서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 재즈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쿨, 모던, 프로그레시브 모두 좋아하며 음악이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했다. 늘 다음 순간의 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음악 아니겠냐고도 했다.

1962년 6월26일 오후 2시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청춘고백’ 등을 남겼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게 하늘로 메아리치던 그 낭랑한 소리가 사라졌다. 눈부신 소리였다.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반주를 하던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청춘고백’이었다. 장례는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우리 악대가 행렬의 앞에 섰다. 필동에서 종로로 접어들고 다시 화신백화점을 끼고 조계사로 들어섰다. 나는 악단 맨 앞자리에서 대고(큰북)를 쳤다. 종로 길은 그렇게도 넓었고 연도에 늘어선 애도객들의 눈은 허공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좋은 날씨였다.

한국일보 문화부 이명원 기자가 가수평을 매주 8매씩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많은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서울치대 선배이며 흥업주식회사 상무였고 트럼페터 겸 가수였던 김영순씨가 나를 추천했다. 주로 미8군 출신 가수에 대해 썼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그리고 현인 선생에 대해서도 평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인 선생을 뵙게 되었다. “이백천씨,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라며 섭섭해하시는 것이었다. ‘베사메 무초’가 여자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선생의 굵고 진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결례를 각오하고 한마디했던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당시 내 나이가 30세도 안되었을 때였다. 그때 결심을 했다. 앞으로 20년 간은 아무것도 안 쓰겠다고. 그리고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자고. 나중에서야 ‘비평은 올바른 칭찬’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사로 이명원씨는 내게 새 칭호를 주었다.

 


‘데이트 위드 쁘띠 리’

이제 쎄시봉 시절로 이야기를 옮겨도 될 것 같다.

1964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들어섰다. KBS 라디오의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 ‘선데이 리퀘스트’에 사용할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구성대본을 맡았는데 레코드실에 내가 원하는 음반이 거의 없었다. 팝송 레코드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오래된 것들이었고 최신곡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예산 부족으로 그 많은 신곡들을 때맞춰 구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도 없이 외부의 객인 나 혼자 라디오의 한 시간을 책임져야 했던 까닭이 있었다. 새 민방 TV(동양방송)가 곧 발족하는데 마침 대학 동기 김규가 그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었다. 내가 그에게 쇼파트에 내가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자청했더니 그는, 방송 일은 처음이니 TV로 직행하기보다 우선 라디오를 경험해 보는 편이 좋겠다며 구성작가 자리를 잡아놓은 것이었다.

쎄시봉의 주인 ‘이선생님’을 만났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이선생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승낙하셨다. 원하던 일을 쉽게 해결하고 커피를 마시며 실내를 둘러봤다. 플로어에 약 150석, 계단 몇 개를 올라가는 반층 위에 80석이 더 있었다. 위층의 안쪽에는 레코드가 빽빽이 들어찬 DJ 박스가 있었다. 실내 네 귀퉁이에 높이 걸린 네 개의 스피커에서는 부드럽고도 힘찬 사운드가 울려나왔다. 알 마티노의 ‘아이 러브 유 모어 앤 모어 에브리데이’, 짐 리브스의 ‘아디오스 아미고’,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폴 앤 폴라의 ‘영 러버스’….

찾아간 시간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음악은 싱싱했지만 감상실 안의 풍경은 좀 달랐다. 소곤거리는 친구들, 허공을 쳐다보는 친구, 책 보는 친구 옆에서 도시락을 먹는 손님도 있었다. 머리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는 남녀, 테이블을 옮겨다니는 친구…. 음악은 실내에 가득 차 흐르는데 정작 그 음악을 듣는 쪽은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뒷자리처럼 황량했다. 대개가 스무 살 문턱에 막 올라선 젊은이들. 음악이 좋아 찾아온 학생이 태반이었지만 건달기가 묻어 있는 손님도 적지 않아 보였다. 주인에게 “누군가가 음악 해설도 하고, 영어 가사 풀이도 해주면서 친구처럼 어울려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렇게 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신다. “찾으면 있겠죠”라는 나의 대답에 “얘기 꺼낸 사람이 하시죠, 그게 좋지 않겠어요”라고 이선생이 말했다.

다음 수요일 오후 다섯시.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예정시간이 되었다. ‘데이트’는 영어, ‘쁘띠’는 불어. 굳이 우리말로 바꾼다면 ‘작은 이가(李)와의 만남’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광고도 하고, 입구에 포스터도 붙이고 했더니 쎄시봉은 제법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 날 내가 준비한 곡은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마할리아 잭슨, 빌리 할리데이, 튜크 엘링턴 악단, 그리고 흑인영가였다. 중앙계단 위쪽, 실내 어디서든 보이는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한 곡씩 진행을 하고 있었다. 아래 플로어 정면의 젊은 친구 네댓 명이 우루루 일어나 출구 쪽으로 가면서 그 중 하나가 나직이 내뱉었다.

“개새끼, 지랄하네.”

그러자 잇달아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일어섰고 내 쪽을 흘겨본 뒤 나가버렸다.

 

쎄시봉, 청춘과 낭만의 절정

털퍼덕 계단에 주저앉았다. 일부가 빠져나간 쎄시봉에는 침묵만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굳었고 그 속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만하자 결심하고 남은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아직 내가 수양이 모자라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했다고, 기왕 준비한 음악이니 듣자고 하며 허둥지둥 맺음을 했다. 그렇게 끝내는 시점까지 남아준 손님은 절반 정도.

주인과 마주앉았다. 얼굴이 벌개져 죄송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포스터도 바로 뜯어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가 바로 종로구 우범지대 일번지고, 그리고 중간에 나간 사람도 많지만 그대로 끝까지 남아 들어주었던 학생들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선생의 부인과 아드님(후에 TBC TV PD가 된 이선권)까지 계속해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쎄시봉 주인 일가의 의견에 선뜻 응할 마음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혼자서 자문자답을 해봤다. 내 작은 지식 자랑하려고 그들 앞에 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들과 동무하고 싶어서 나서지 않았는가. 다음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쇼쇼쇼’ 녹화 현장. 맨 오른쪽에서 조명 설치를 지시하고 있는 이가 나다 
 

다음주 같은 시간에 같은 계단 그 자리에서 나는 지난주의 불상사를 그대로 보고하면서 오늘은 여러분의 심부름을 맡은 하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손을 들고 신청하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지난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축제의 시작이었다. 마이크의 긴 케이블을 끌고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대상을 정하고 다가가 신청곡을 물어본다. 신상을 묻는다. 신청곡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지, 옆자리에 앉은 이는 연인인가 친구인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나, 뽀뽀하는 단계는 지났는가.

DJ 박스에서 신청곡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초 내외, 테이프에 수록된 곡을 찾자면 적어도 l분은 걸린다. DJ의 손이 올라오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마이크를 들이댈 때 옆에서 다른 친구가 끼여 들 수도 있다. “얘, 지난주에는 다른 여학생이랑 왔어요”. 인터뷰하는 동안만은 실내가 조용했다. 모두 마이크 주변에 시선을 모았다. 마이크가 찾아가는 곳이 객석 안의 작은 무대였다. 곡이 끝나면 무대가 옮겨졌다. 무대마다 흥이 났다. 어느 틈엔가 쎄시봉은 젊은이의 광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또래 친구들의 ‘입김’을 서로 여과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당시의 쎄시봉 식구들을 소개해야겠다. 주인 이선생과 아름다운 사모님, 아드님 이선권 외에 DJ실 스태프는 조용호(서울대 미대 출신, ‘하얀 손수건’의 우리말 가사를 썼고 TBC TV ‘쇼쇼쇼’의 PD와 국장, m-net의 전무 역임) 구자홍(서울 문리대 철학과, 후에 ‘실험극장’ 멤버, 현재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이었고, 신청곡에 적힌 사연을 읽어주는 성우로 피세영(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교수의 자제, ‘실험극장’ 멤버, 라디오 DJ, 현재 캐나다 거주)과 이장순(TBC 라디오 성우, 맑은 눈, 맑은 소리, 낭독이 일품이었다. 후에 영화감독과 결혼했고 3년 전 미국에서 작고)씨가 있었다. 쎄시봉에 출입하는 전 스태프는 보수 없이 일했다. 분위기와 음악이 좋아 모인 것뿐이었다.

‘데이트 위드 쁘띠 리’를 서너 달 진행하다 ‘대학생의 밤’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스포트 라이트를 준비하고 대학생들의 노래마당을 펼쳤다. 피아노는 입구 옆 공간에 놓았다. 피아노 반주는 김강섭(전 KBS 악단장), 김용선(TBC 악단 편곡자 겸 피아니스트)씨가 교대로 맡아주었다. 조명은 단골 손님이 담당했다. 음악감상실에서 라이브 무대를 갖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어 누가 기타로 노래를 하게되면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어야 했다.

하나둘씩 기타를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익균, 이장희, 그리고 맏형격인 박상규, 장우(장영기)….

조영남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다. ‘언더 더 보드워크’ ‘돈 워리’ ‘시 오브 하트브레이크’ ‘고향생각’. 더벅머리에 검은 교복. 얼마나 오래 입고 있었던지, 그것이 대학 교복인지 고등학교 교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장육부에서 발성이 되는 듯했다. 그가 처음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른 그 날의 마지막 곡이었다.

“해애는 저어서 어어두우운데 차아자아오오는 사아람 없어..”

해질 무렵이었다. 출출할 때 듣는 소리는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일까. 조영남의 소리는 레코드나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달랐다. 살아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 본 고향의 황혼 빛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송창식은 기타를 치며 이탈리아 가곡 ‘까라 마마’ ‘셉템버 송’, 자니 마티스의 ‘투엘브스 오브 네버’를 불렀다. 성당 안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타의 통나무 소리와 클래식 발성이 참 잘 어울렸다.

윤형주는 바비 다린의 ‘로스트 러브’를 잘 불렀다. 감미롭고 맑은 소리였다. 흑인영가 ‘스칼레트 리본’도 잘 불렀다. 기독교 집안의 자제였고 찬송가가 잘 어울리는 소리를 가진 그가 팝송을 부르면 노래들이 오리지널보다 더 신선하게 들렸다. 무대를 응시하며 그의 노래를 경청하던 학생들의 침묵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장희는 막내였다. 여드름이 많아 ‘해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타를 치면서 장만영의 시 구절을 읊기도 했는데 그것이 일품이었다. 흙 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 그러나 쩌렁쩌렁 울리는 맛도 있었다. 그의 큰 눈동자는 늘 눈물이 글썽했다. 하루는 그가 ‘서니’라는 곡을 진짜 울면서 불렀다. 마이크를 내밀었다. 사연인 즉, 사귀는 아가씨의 이름이 선희였다. 동네 목욕탕집 딸이었는데 왕자와 공주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요즈음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인천 앞바다 모래 사장에서 한줄 편지를 써 그녀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이 저스트 크라이드 바이 더 씨”

그랬더니 그녀가 잘 만나 주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니’를 앵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젓가락이 짧구나!”

박상규, 장영기의 듀엣 ‘코코’는 라틴 곡 ‘콴타나 메라’ ‘베사메 무초’ ‘라밤바’에 팝송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키프 온 러닝’ ‘딜라일라’ ‘예스터데이’. 박상규의 말에 의하면 장영기는 그 당시 이미 1000곡 가까운 팝송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코코’의 노래 중간에는 박상규의 즉흥시도 한몫을 했다. 그 중의 하나. 숨을 고르고 침을 삼킨 다음 천장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발한다.

“달아! 빈대떡같이 둥근 달아. 초간장이 있다면 널 찍어 먹을텐데…,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며) 아… 젓가락이 짧구나!”

‘대학생의 밤’이 시발점이 되어 갖가지 프로그램이 생겼다. ‘즉흥 스테이지’ ‘삼행시 백일장’ ‘주간한국’의 ‘성점(星點)감상실’과 ‘신곡감상회’ 그리고 명사초청 강연.

‘즉흥 스테이지’. 아무라도 좋았다. 나와서 무엇인가를 보여주면 되는 코너였다. 계단 위 기둥 옆의 좁은 공간을 무대로 정했다. 첫날 조금 일찍 쎄시봉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가득했지만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신청자가 없다고 그냥 프로그램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남자 한 사람 나와 달라니까 한 친구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단상에 남자 하나만 세워놓으니 뭔가 빈 것 같았다. 실내의 모든 여자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다른 곳을 보고, 남자 친구 등뒤로 숨고…. 내 바로 앞 테이블의 여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남학생 옆에 세웠다.

“일어나 보시겠어요”

“세 발짝만 옮겨 저 남학생 옆에 서 주시겠어요?”

스포트라이트 조명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순간 박수가 터졌다. 계단 상단에 놓인 빈 의자에 둘을 앉혔다. 시놉시스는 그 자리에서 나왔다. 1막 3장.

1장. 둘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

2장. 그들은 결혼했다.

3장. 그로부터 15년 후.

도리스 데이가 부른 ‘케 세라 세라’를 서곡으로 해서 그들이 숨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었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곡이 끝나자 대뜸 남학생이 밑도 끝도 없이 첫 대사를 여학생에게 던졌다.

“야! 너 나 좋아하는구나!”

둘은 천천히 학교, 취미, 가족 얘기를 나누었다. 한쪽은 마릴린 먼로를 좋아한다고 했고, 다른 한쪽은 유주용을 좋아한다고 했다. 얘기는 막힘없이 흘렀다. 둘은 순발력이 뛰어났다. 2장이 되자 호칭이 바뀌었다. 너에서 ‘당신’으로. 회사출근 상황 연기에선 “뽀뽀해주고 가야지!”가 나왔고, 귀가 늦지 말라고 당부하고….

MC가 저녁으로 시간을 바꾸었다. 남자가 잠시 눈알을 굴리다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서 한마디를 한다. “불 끄자”. 정말 실내등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3장은 여자의 바가지로 시작됐다. 남들은 다 잘사는데 우리는 뭐냐는 것이었다. 이럴 거면 왜 그 날 쎄시봉에서 나를 꼬셨냐고 따지고 들었다.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셋씩이나 애들을 낳게 했느냐 추궁했다. 남자가 여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 애들 만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있는 힘 다해서 노력한 줄 자기는 모를 거야!”

그 둘은 실제로 친해져서 자주 같이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보이다가 그들은 사라졌다. 37년 전의 일이다.

 

‘성점감상실’과 ‘동백아가씨’

‘즉흥 스테이지’. 하루는 단골 전유성이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하고 와서 가위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솔로 액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액트는 5초를 넘기지 않았다. 매고 왔던 새 외제 넥타이를 목 아래 10cm 정도에서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그뿐이었다. 부잣집 아들같지 않았던 전유성.

전위행위예술가 정강자씨도 즉흥 스테이지에 모습을 보였다. 정강자씨는 미술가로 가수 남일해의 누이동생이었다. 음악을 따로 가져와 한판을 벌였다. 흰 망토 같은 의상을 입고 간단한 분장을 하고는 거의 나체로 바디 랭귀지를 보여주었다. 학생들과 같이 보는데 왠지 가슴이 무거웠다. ‘해프닝’ ‘스트리트 퍼포먼스’ 같은 단어들이 주변에 떠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날의 퍼포먼스는 관중의 역할보다 ‘행위자의 감성 체험’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삼행시 백일장’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재치 넘치는 글들이 많았는데 수작에는 쎄시봉 입장권을 상품으로 주었고 범작은 혹평을 맞고 머리 뒤로 버려졌다. 얼마간 진행을 맡다가 당시 홍익대 학생이던 이상벽에게 바통을 넘겼다. 훗날 이 프로는 CBS 라디오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성점(별의 개수로 평가를 한다는 뜻) 감상실’. 하루는 TBC TV로 정홍택 기자가 찾아왔다. ‘주간한국’이 창간되는데 좋은 아이템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학 때부터 계속 읽어오던 미국의 재즈 전문 격주지 ‘다운 비츠’에서 본 ‘블라인드 폴드 테스트’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새로 나온 음반을 유명 재즈 뮤지션에게 설명 없이 들려주고 각 파트의 연주자가 누구이며 평가를 한다면 별을 몇 개 줄 것인가 하는 특이한 칼럼이었다. 별 다섯 개에서 별 하나까지 채점을 하고 그 음악에 대한 자기 평을 쓰기 때문에 연주자, 제작자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페이지였다. 눈을 가리고 한다는 뜻으로 사전 정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시청(試聽) 소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말 ‘성점감상실’이란 제목으로 연재가 결정됐다. 다운 비츠는 유명 재즈 평론가가 입회한 상태에서의 1인 평이었지만 성점감상실은 쎄시봉에서 공개로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용지를 돌려 의견과 별 개수를 적도록 했다. 최고점은 별 다섯 개였다. 자신의 평이 주간지에 실린다고 하니 학생들의 참여가 왕성했다.

메인 게스트로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었는데 3주차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봉봉사중창단이 손님이었고 주어진 곡은 ‘동백아가씨’였다. 봉봉은 이 곡에 평점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왜색조라는 이유였다. 기사가 나가고 신문마다 왜색가요 시비의 기사가 올라왔다. 결국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이 곡을 금지곡으로 묶고 말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성점감상실’은 1970년대까지 장수했다. 짧은 몇 줄의 의견이었지만 학생들이 시중 잡지에서 평론가의 역할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주간한국’의 정홍택씨와는 ‘신곡합평회’, ‘시인만세’도 같이했다. 쎄시봉은 ‘주간한국’ 전용 젊은이의 광장이었던 셈이다. 신곡합평회는 레코드 제작에 들어가기 전 대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고, 시인만세는 시인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말씀과 자작시 낭송을 듣는 기획이었다. 아마추어 시인들도 참가해서 자작시를 낭송할 수 있었다. 첫 손님으로 서정주 선생을 모셨고 박목월 선생, 박재삼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이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와는 별도로 ‘명사특강’도 했는데 국회의원 김대중, 정광모씨등 각계 분들이 와주었다.

‘대학생의 밤’에서 구봉서씨를 초청한 일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구봉서씨를 만나 쎄시봉에 한번 얼굴을 비쳐 달라고 부탁했다. 뭐하는 곳이냐는 반문에 음악감상실인데 대학생들이 모이는 장소라 설명을 하자 막동이 구봉서씨는 “어이쿠, 안 돼요. 나 세상에서 대학생들이 제일 무서워요. 그 친구들 길에서 날 보면 ‘막동이구나’ 하고 막 부르면서 콧방귀 뀌어요. 난 대학생 보면 미리 도망가요. 걔들은 날 사람으로 안 봐요. 사절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내저었다.

 

술집에 팔려간 그 여자아이

그럼에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약속한 날 나는 학생들과 작전을 짰다. 보초가 길에 나가 기다리다 구봉서씨의 모습이 보이면 알리기로 했다. 그가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전원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무대중앙 좌석에 앉을 때까지 그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구봉서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시지 말고 같이 있어만 주세요.” 그는 더욱 의아해했다.

학생들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개그도 했다. 손님을 위해 모두 일어나 주먹을 흔들며 빨간 마후라도 불렀다. 학생들의 구봉서씨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쎄시봉 전체가 무대였고 그 날의 유일한 관객은 구봉서씨 혼자였다. 끝에 가서 마이크를 잡은 구봉서씨는 감격의 답사를 해주었다.

“이럴 줄 몰랐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고, 대학생들이 이렇게 귀여운 줄도 몰랐다. 꿈을 꾸는 기분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정말 고맙다.”

끝난 후에도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그가 사라질 때까지 기립박수는 이어졌다.

프로가 없던 가을날 밤이었다. 실내에 바깥의 냉랭한 공기가 스며드는 여덟 시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매일 저 베란다 바로 아래 자리에 혼자 와서 음악 듣던 여자 아이.”

그는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걔가 나가면서 말했어요. 이젠 쎄시봉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부산 술집에 팔려서 간댔어요. 서울역에 빨리 나가야 한다면서 아까 나갔어요.”

그 여자아이가 신청하던 곡은 늘 티미 유로가 부른 ‘허어트(Hurt)’였다. 빈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티미 유로의 처절한 가락이 찢어질 듯이 쎄시봉 안을 메아리쳤다.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실내는 조용했다.

 

서울대생 김종철, ‘여두목’ 윤여정

1964년에서 1969년까지는 그렇게 흘렀다. 쎄시봉 6년. 조영남이 먼저 매스컴을 타고 이어서 줄줄이 방송에 진출했다. 소위 통기타 1세대들. 모두들 소리의 결이 좋았다. 통기타의 통나무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싣자니 그 소리가 순박할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순박한 마음의 바이브레이션도 그들 노래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쎄시봉 단골 학생 중에는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언론인 김종철군, 홍대생 이두식군(전 미술협회장), 가수가 아니면서 여두목 역할을 한 윤여정양도 있었다.

쎄시봉 식구들이 자주 가던 장소들이 있다. 주말마다 무리지어 몰려가 라면이며 잼을 바닥내가며 드러눕고 뒹굴던 김성수 신부의 인천 성공회 사제관, 회현동 최영희(연대종교음악과, 짧은 기간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다 미국 이주)의 집, 며칠씩 그냥 가서 거저 먹고 자고 해도 늘 친절했던 청평 안전유원지의 최사장 일가.

한번은 겨울에 여럿이 조영남의 고향 삽교에 간 일이 있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 학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조영남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집에서 본 학창 시절의 앨범 사진, 트럼펫을 불면 동네 소들이 모두 화답을 했다는 나지막한 앞산 언덕, 삽교국민학교의 자그마한 교정. 일행은 온 김에 수덕사를 들러 뒷산 마애불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올 때 있었던 일이다. 계단이 좁아 한사람씩 내려오고 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후미에서 내려가던 내가 소리를 질렀다. “가까운 사람하고 손을 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내가 최영희와 손을 잡자 앞에 가던 조영남과 윤여정도 손을 잡았다. 송창식은 이미 평지에 내려가 있었다. 세 발짝을 움직였을까. “어머!”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비명을 지르며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낭떠러지 쪽을 가던 윤여정 발 밑의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발이 네 개니까 살았지 혼자서 그 돌을 밟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평지에 도착한 다음 누군가가 벌받은 것이라고 놀렸다. 올라가기 전 모두들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주지 스님도 특별히 나오셔서 젊은이들 앞날에 좋은 일 있으라고 기원해주셨는데 유독 윤여정만 들어오지 않고 옆문 밖에 서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당의 마루바닥이 몹시 차가워 스님이 독경하는 동안 모두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윤여정은 그것이 싫었던 것 같았다.

“PD야, MC야, 청소부야?”


 
쎄시봉 시절 청평의 한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골수 멤버들. 왼쪽부터 윤여정, 조영남, 윤형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울대 음대 여학생 


나는 쎄시봉 활동과 더불어 1964년 여름 TBC TV 선발요원으로 입사했다. 1970년 10월 사직서를 제출할 때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맡았다.

‘굳 이브닝쇼’는 명사 초대 토크 프로그램이었고 담당 PD는 임창수씨와 나 두 사람이었다. 주말은 쉬는 주5일 평일 프로였는데 임창수씨가 자기는 연출할테니까 당신은 MC를 하라고 지시해왔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연장자였다. 시간은 20분, 앞뒤에 가수의 노래가 붙으니 시그널 시간, 광고시간 제하면 손님과 얘기할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첫 손님은 이방자 여사였고 미8군 부사령관, 김현옥 서울시장, 외국사절들이 출연했다. 살롱 스타일의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겁도 없이 진행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연출하던 허규씨의 말에 의하면 MC가 대학생의 말투로 손님을 대한다는 것이었다.

‘힛 게임쇼’는 연예인들과 명사들의 개인 경쟁게임과 직장대항전을 합친 프로그램이었다. 직장응원단이 출연했고 사회는 김동건, 응원단장은 송해·박시명 두 사람이 맡았다. 송해씨는 판정에 불복하면서 심심찮게 김동건 사회자를 박치기로 들이받아 다운시켰다. 그럴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응원단장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다가도 사회자가 “차렷!” 하고 호령만 하면 반드시 그 앞에서 말단졸병이 되어야 했다. 극단의 무질서와 극단의 군기가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해이던가 연말 특집에서 MC가 금년의 국내 톱뉴스로 무엇을 꼽겠는가하고 묻자 정광모씨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한비(한국비료) 사건’이죠”.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웃었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김규 상무와 마주쳤다. 그는 대뜸 “왜 그런 질문을 시켜?” 하고 말했다. 삼성 본부에서 질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게임중에 물통이 넘어져 스튜디오 바닥이 물바다가 됐다. 빨리 누군가 물을 닦아야 했다. 밤 시간의 생방송이라 세트 담당자가 없었다. 자루 달린 물걸레를 구석에서 가져와 내가 바닥을 닦아냈다. 그것이 그대로 방송이 되었고, 어린 조카가 제 아빠에게 “삼촌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방송국 청소부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림에 노래 싣고’. 피세영이 여자 아나운서와 함께 DJ를 맡고 만화가 신동우씨와 나는 이젤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음악이 나가는 동안 즉흥그림과 즉흥낙서를 했다. 1년 정도를 계속했는데 언제나 글보다 그림이 좋았다.

‘쇼 파노라마’. 야외녹화가 많았다. 어느 날 정릉 근처 한 수영장에서 녹화를 하는데 MC가 펑크를 냈다. 내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 날 밤 ‘굳 이브닝쇼’, 심야에 ‘그림에 노래 싣고’까지 하루에 세 번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때는 방송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플로어 매니저(진행감독), 연출, 대본, 구성, 출연자 섭외, MC, 때로는 부족한 영어로 통역도 했다.

‘골든벨쇼’. 신곡을 낸 가수들을 무대 뒤에 세워놓고 레코드를 틀었다. 심사위원들이 한 줄로 앉아 의견을 말하고 앞에 놓인 종을 쳤다. 다섯 번이 울리면 만점이었다. 아마추어 심사위원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었으니 만점을 받으려면 종이 스무 번 울려야 했는데 전원 만점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훈희의 데뷔곡 ‘안개’였다.

 

조영남의 엽기코믹쇼

‘아베끄 노래자랑’. 서영춘씨가 사회를 맡았다. 남녀가 혼성팀으로 출연하는 노래경연 프로그램이었는데 항상 출연자가 부족해 길에 나가 행인들을 잡고 애원해야 했다. 어느날 게스트 가수가 펑크를 냈다. 마침 방송국에 찾아온 조영남을 밀어넣었다. 당시 한양대 음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던 조영남은 출연 후 학교에서 봉변을 당했다. 교수와 학생들이 일제히 비난했던 모양이었다. 조영남은 곧 서울대 음대로 편입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리저리 뛰는 사이에 훌쩍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맡은 일이 끝나면 쎄시봉으로 달려갔다. 기본적으로 방송 일이 우선이었지만 쎄시봉엔 방송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싱싱함과 자유로움. 그곳에는 싹을 자라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누구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잘난 척하거나 못난 척할 수가 없었다. 통기타 1세대들은 그렇게 자생했다. 그들은 쎄시봉을 거쳐 명동 ‘OB’s 캐빈’으로 갔고 다시 방송으로 진입했다.

조영남이 부른 ‘딜라일라’가 라디오에서 히트했다. 그는 이어 단 한번의 출연으로 시청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노래의 내용은 변심한 애인이 불꺼진 창안에서 딴 남자와 하나 되는 것을 보고 밖에서 개탄하는 것이었다. 조영남은 TV에서 그 장면을 직접 설정하고 연기했다. 웃통을 벗고, 머

5 Comments
드넓은 광야 2006.10.30 19:25  
이백천 선생님의 회고록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fabiano 2006.10.30 22:15  
장편소설같은 이야기를 지는 아직도 다 못읽었습니다.
어여쁜 나 2017.03.04 09:42  
이백천선생님께서 아직 생존해 계시는지 궁금해요~!!!!
어여쁜 나 2017.03.04 09:42  
북한에서도 미니스커트와 탱크탑 혹은 배꼽티와 나시티 핫팬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멋쟁이 미녀들이 활개칠날이 하루빨리라도 왔으면....!!!!
fabiano 2017.03.07 11:01  
조블 친구들 한테 알아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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