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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열차의 삶은 계란 같은

fabiano 5 1120  
작은 키에 가모잡잡하고 광대뼈가 불거진 마른 얼굴이다.
완행열차의 통로에 멀뚱히 서 있는 남정네처럼 순박하지만 고단한 삶의 무게에 눌려 내려앉은 어깨가 힘겨워 보이고, 세상살이 부딪침이 어설퍼 공연히 쑥스러워하고 부끄럼을 타는 순박함이 애잔하게 물결쳐 다가온다. 지난날 한국 남정네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박정희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를 청와대 밖으로 나오게 하고 양복을 무명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게 하면 영락없는 옛날의 한국인이다. 한국 남정네의 전형이다.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까지 얼굴들을 보자. 다 귀해 보이고 넉넉해 보이고 건강하다. 박정희가 가장 촌스럽고 빈약해 보인다. 역대 대통령에 박정희 같은 고난의 상(相)이 없다. 박정희는 시대의 고난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역사에 등장했다.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중략)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눈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 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늘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정하<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이 시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급행열차가 아닌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그 열차에 타고 오는 누군가의 비에 젖은 어깨와 삶에 지친 마음을 안아주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어한다.

완행열차 승객들은 푸짐한 시간의 부자(富者)들이다. 차창 밖에 흐르는 무심한 세월 속에 묻혀 애수의 삶을 관조하는 그들.
서로 어색해서 삶은 계란을 꺼내 먹기가 눈치 보여, 쭈삣쭈삣하다가 계란 하나를 옆자리에 건넨다.
“고향이 어디슈?”
“부모님은 다 계시구?”
말문이 트이면 인생사 세세곡절을 막힘없이 털어놓고 웃음과 한숨도 쏟아놓는다.
그래서 열차칸에 사람 냄새가 나고, 낯가림 없고 질박한 막사발 같은 정이 가슴마다에 감돌아든다.
흙냄새, 들냄새가 나고, 고향의 초가집들처럼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삶의 자세로 돌아온다.
늙으신 아버지의 잔기침 소리가 들리고, 빈 부엌에 홀로 서서 눈물짓는 아내의 젖은 앞치마가 아른거리면 남정네는 다짐한다. 살아야 한다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속다짐을 가슴 속에 밀어넣는다.
삶은 계란에 목이 메인다.

들풀은 땅을 지킨다. 척박한 땅의 움켜쥘 한줌 흙이라도 있으면 기어이 뿌리를 내려 풀잎을 키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끼리 부둥켜안고 모진 세월의 풍상을 맞으며 땅을 지킨다. 국토를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 장미나 백합이 아니다. 억센 들풀이다. 나라는 지키는 것은 이 땅의 서민들이었다. 외세에 짓밟히고 온갖 고난을 뒤집어쓰고도 억세게 국토와 국가를 보위한 것은 서민들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절대권력으로 서민들의 주저앉은 불행을 손잡아 일으켰다. 함께 몸부림치고 아픔과 슬픔에 동참했다.
1974년 6월3일 하오2시. 청와대 대접견실에 원호대상자 59명이 모였다.
중간쯤에, 두 눈만 반짝이고 코와 귀는 형체가 없이 번들거려 흡사 심한 나병환자 같은 사람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 징그러운 모습에 그만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원호대상자들을 둘러보던 박정희가 그를 발견하고 먼저 앞으로 불러냈다. 월남전에서 화상을 입은 김진택(金鎭澤). 박정희는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울퉁불퉁한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원호처장(柳根昌)에게 말했다.
“성형할 수 있겠소? 가능하다면 내가 도와주겠소”
파월 상이용사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1977년 6월20일. 박정희는 기관차에 뛰어든 어린이를 구하고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순직한 간수(金永新)의 유족에게 황인성 전북지사를 통해 금일봉을 전달하고 애도했다. 순직한 간수는 6.25때 오른쪽 다리를 잃은 원호대상자로 전주시 서로송동 고산 철길 건널목에서 근무하다가 차단기 밑으로 뛰어든 어린이를 보고 달려들어가 자신은 의족 때문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요즘은 자녀를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들, 그리고 부부가 직장 관계로 떨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의 문제가 관심사이지만, 1960년대에만도 길거리에 버려진 기러기 같은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아원에도 못가고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 고아, 거지아이들이다.
서울역∼뚝섬을 왕래하는 시내버스 운전사(김영환)는 통행금지 시간이 됐는데도 갈 곳이 없어 버스종점을 어슬렁거리는 어린이들을 보다 못해 집에 데려와 살기 시작했다. 하나둘 데려와 키우다 보니 1975년에는 11명으로 늘었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부르며 날아갑니다.

엄마가 그리운 아이들의 기러기 가족이다.
운전기사 가장(家長)은 1976년에 11명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35살 노총각에게 자식이 생긴 것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강남구 도곡동의 볏짚 움막. 세차례나 강제철거당해 텐트를 치고 살면서도 아이들이 아빠의 생일상을 차려주었을 때는 너무 기뻐서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런데 무허가 집이 다시 헐리게 되어 갈 곳이 없었다. 세상천지 어느 한곳 몸붙일 희망이 없어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고 했다.
박정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고 있는 이 고마운 운전사를 위해 당장 구청에 지시를 내려 역삼동 체비지 38평의 땅에 기러기집을 지어주었다.
경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아버지만 있던 11명의 형제들에게 엄마가 생겼다. 대전보육대학을 나온 한 여성이 일주일에 한번씩 들러 빨래를 해주다 아예 엄마로 들어앉았다.
이들 부부는 1남1녀를 낳아 13남매가 행복하게 살았건만 다시 큰 슬픔을 맞이해야 했다. 아내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남편은 치료비 마련을 위해 유일한 생계수단인 택시를 사채업자에게 저당잡히고 얻은 빚 때문에 운전도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려 아내의 묘에 가서 절절한 외로움과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때는 세상천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대통령 박정희도 이승에 없는 몸이었다.

1979년 깊은 가을, 대통령의 장례 때에 한 일본인이 서울의 한 호텔에 묵고 있었다. 여종업원이 들어와 청소를 하다 말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죄송합니다.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뛰쳐나갔다. 방의 텔레비전에서 대통령의 장례 광경을 비추고 있었다.

비바람 모진 세월의 들풀같은 사람들.
고속도로를 내고 한 시대를 숨가쁘게 이끌어갔던 박정희를 그들은 이제 완행열차에서 삶은 계란을 건네는 수줍고 멋적은 남정네의 모습으로 맞이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속철이 달리는 시대에, 유행감각이 빠르고 세태에 민감하며 꿈도 많은 젊은이들이 완행열차를 사랑하는 정서의 공간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늘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흠모하는 사람들,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의 젖은 어깨와 지친 마음을 안아주고 싶은 은사시나무의 마음일 것이다. (*)

출처 :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김인만]
5 Comments
freelady3567 2006.10.15 21:33  
저희 세대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그 시절 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철이 안드니 어쩌면 좋습니까?
fabiano 2006.10.15 21:43  
아닌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때는 그때라면서 다소 시큰둥하는데 우리 세대가 자식들에게 그 시절로 돌아가 생활하라는게 아니고 지나간 세월이지만 공감하라는 취지인데 그 시절을 모르는 세대들이 너무도 폄하하고 박통을 모욕하니 그게 문제입니다. 살만하니까 그 시절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겁니다.
나살고 2006.10.16 11:24  
100% 공감하진 않지만 그때 그때의 시대적 논리가 잇는 것 같습니다. 이글의 이면에는 여기에 드러나지 않은 아픔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치고 어려울 때 자기철학을 가지고 이 나라 백성을 감싸 안으려는 마음가짐... 높이 평가합니다.
드넓은 광야 2006.10.16 12:10  
모름지기 한국가의 통치자는 앞을 내다볼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면의 아픔도 있겠지만 적어도 경제력만큼은 역대 통치자중 최고로 꼽고싶습니다
fabiano 2006.10.16 13:54  
미군잔반인 꿀꿀이죽을 먹어 본 저로서는 배고픔의 설움이 얼마나 큰가를 잘압니다. 그 시절엔 위압적이며 독선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 시절엔 대중,영삼 제씨들이 웬만한 것은 반대였지요. 경부고속도로만 하여도 반대했습니다.이제는 쓰데없는 폄하,인신공격은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고 단합하여 저력의 Korea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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