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1968년도
fabiano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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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1 20:40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信仰)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Autoban)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428㎞의 도로는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장비명 : 621 Caterpillar Scraper, 834 Wheel Dozer.
1968년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천안-신사리>구간중 천안 삼거리 부근에서.
지금 교회는 새로 신축하였고 철근이 놓여져 있던 자리 부근은 육교가 생겼고 멀리 보이는 논밭은 아파트 단지가 밀집되어 있다.
사진은 1968.12월 경으로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당시 약관의 22세였다.
교회의 뒷쪽으로 멀리 초가집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변하여 옛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작업중에 휴식시간에 건설 현장 팀원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대통령의 집념어린 공사여서 밤낮으로 작업을 하여 최단시일에(약 2년 6개월) 공사를 마쳤다.
좌측에서 3번째가 본인입니다.
경부고속도로 현장의 박대통령.
고속도로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도로를 완공하였다.
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Autoban)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428㎞의 도로는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장비명 : 621 Caterpillar Scraper, 834 Wheel Dozer.
1968년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천안-신사리>구간중 천안 삼거리 부근에서.
지금 교회는 새로 신축하였고 철근이 놓여져 있던 자리 부근은 육교가 생겼고 멀리 보이는 논밭은 아파트 단지가 밀집되어 있다.
사진은 1968.12월 경으로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당시 약관의 22세였다.
교회의 뒷쪽으로 멀리 초가집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변하여 옛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작업중에 휴식시간에 건설 현장 팀원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대통령의 집념어린 공사여서 밤낮으로 작업을 하여 최단시일에(약 2년 6개월) 공사를 마쳤다.
좌측에서 3번째가 본인입니다.
경부고속도로 현장의 박대통령.
고속도로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도로를 완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