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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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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정치공작대· 행정연구반 조직해 건국 준비…"우리가 살 길은 민주주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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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임정 요원 1진. 앞줄 오른쪽 끝이 신익희, 두사람 건너 김구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은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종식되자마자 각 세력의 정치지도자들은 해방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임시정부 수뇌부와 이승만(李承晩)의 귀국이 지연되는 틈을 노려 국내의 좌익세력은 제일 먼저 발호했다. 좌익은 김구(金九)와 이승만이라는 양 거두(巨頭)가 입국하기 전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래서 해방 당시 국내에 있던 여운형(呂運亨)은 해방이 되는 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고, 일제시대 지하에 잠복해 있던 박헌영(朴憲永)은 9월 19일 기습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어 좌익은 해방이 된 지 20일 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급조된 정부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해방정국은 좌익의 천지가 되었다.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성립되어 소련의 절대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좌우 연립정부’라는 비현실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남한의 경우 조선공산당에 이어 남조선노동당이 미국의 좌우 연립정부 구상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활동하며 활개를 치고 있었다.

만약 그때 ‘건국의 영웅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출범은 그 어떤 드라마도 각색하기 힘든 기적을 창출하였다. 좌익이 기선을 잡고 있던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대세 전환의 분기점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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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익희
반탁(反託)운동의 중심에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가 있다. 해공은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의 주역이다. 해공은 3·1운동으로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았고 이를 피해 낯선 중국 땅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는 망명 생활 27년 만인 1945년 12월 1일 임정요인 15명과 함께 환국(還國)했다. 얼마 만에 밟아보는 조국 땅인가? 전북 군산의 옥구공항에 도착한 해공은 형언하기 어려운 심정으로 인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해공 앞에 놓여있는 조국의 모습은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여운형이 만든 건준은 1945년 8월 31일 현재 벌써 전국적으로 걸쳐 145개의 지부를 만든 상태였고, 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9월 20일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란 테제를 통해 혁명노선을 표명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군이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정당과 단체가 8~9개에 불과하던 것이 한 달 후에 70여개로 늘어났고 11월 1일에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 및 단체 수가 250개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해방정국의 혼돈 상황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좌우익 간에 생사(生死)를 건 사실상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신익희는 자신의 아호인 ‘해공(海公)’을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추호도 사심 없는 공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스스로 풀이한 바 있다. 해공에게 있어서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마치 일제하에서 풍찬노숙(風餐路宿)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건국운동으로 매진하게 만들었다. 해공은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차장으로 참가한 후 조국광복을 위하여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헌신해 왔다.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여 일대 혼돈에 빠졌을 때도 해공은 민족해방전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중국군 장군이 되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한·중 합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해방 직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제에 대한 폭력혁명을 지휘하였고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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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환영사를 읽는 신익희.

이렇게 거침없는 반일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했던 해공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또 다른 시험대였다. 그는 환국 직후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뒤로 접고 건국의 기틀을 잡고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해공의 정치사상은 민주주의, 애민주의, 그리고 애국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에게서 민주주의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활동의 근거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최종적 귀착지였다. 해공은 “오늘날 우리의 유일한 살길은 민주주의입니다. 국내 생활도 민주주의라야 잘 살아갈 수 있고 국제원조도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토대에는 애민주의와 애국주의가 깔려 있다.

그는 환국 후 우선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를 결성한다. 정치공작대는 일반 민중과 활발히 접촉하여 활동한 지 3주일 만에 전국의 면 단위 조직까지 완료하였다. 이로써 정치공작대는 혼돈의 시기인 해방정국에서 건국을 위한 조직으로서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으로서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모든 활동의 초점을 맞추었다.

해공은 정치공작대의 결성에 이어 행정연구반을 조직한다. 행정연구반은 신생국의 행정조직 구성을 위한 준비 기구였다. 이때 해공은 “비록 친일의 경력이 있더라도 민족을 근본적으로 배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기회를 주어 새로운 조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공만큼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은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해공은 조국의 현실이 너무나 많은 문제로 인해 표류하고 있기에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건국 사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는 와중에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한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책략의 결과물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인 해공은 신탁통치안이 전해진 다음 날인 12월 29일 밤에 서울 시내의 9개 경찰서장을 소집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해공은 12월 31일에 이르러서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국자(國字) 1호’와 ‘국자 2호’로 명칭된 임정포고문을 직접 발표하였다. 여기서 해공은 ‘임시정부가 직접 국내 행정과 치안 및 경제를 이끌고 가겠다’는 자주정부 수립을 천명함으로써 미 군정에 정면 대결하였다. 비록 이러한 해공과 임시정부의 민족적 반탁운동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 건국운동사에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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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국회모습. 신익희 의장이 사회를 보고있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왼쪽)의 표정이 심각하다.

해공의 반탁운동은 그 동안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좌익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여 우익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좌우 연립정부 수립안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 정책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반탁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해공의 건국운동은 그의 삶의 궤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탁통치안을 놓고 우익과 좌익은 민족관, 역사관, 이념관 등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평소 ‘민족’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던 좌익은 막상 신탁통치안이 제기되자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운동으로 급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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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12일 헌법 제정 후 신익희 국회의장(앞줄 왼쪽 다섯 번째), 이승만 대통령(왼쪽 여섯 번째)이 헌법 기초의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제 더 이상 좌익과의 공존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해공은 비록 임시정부에서 이승만과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이승만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소련을 ‘독재와 폭정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던 해공으로서는 좌익과의 협력을 통한 정부수립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백범 김구의 좌우 협작노선이 민족간의 전쟁을 막기 위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발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만으로는 절박한 현실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백범을 존경하면서도 백범의 통일노선과 결별하고 이승만의 노선과 함께 했다. 해공은 일제하에서 생사를 같이한 백범에 대한 아픈 마음을 억누르고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통일노선을 실천한다.

좌익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키며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해공은 보다 적극적으로 건국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공은 우선 1946년 봄 대한반공연맹을 조직해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전국을 순방하면서 반공 의식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건국 후 인재양성을 위해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학장을 지냈고, 언론의 창달을 위해 자유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좌파 신문을 인수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우익의 대변지로 탈바꿈시켰다.

해공이 해방정국에서 정치적으로 보다 더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때는 1948년 3월. 해공은 김규식(金奎植)에 이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2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입법의원이 ‘미 군정의 연장’ ‘미 군정의 자문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공이 입법의원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망이 두텁고 정치적 포용력이 있다는 의미로 평가할 수 있다.

해공은 환국 후 건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추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1948년 건국의 해가 밝았다. UN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첫 총선거(5·10선거)에 대해 해공은 “민주건설의 전도를 위하여 축하할 일로 우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제1단계”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는 첫 총선에 나서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된다. 이후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이 되었다. 해공은 좌익과 북한 공산당의 건국 방해공작을 뚫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루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정경환 동의대 교수ㆍ정치학

2 Comments
햇빛(안연식) 2006.10.06 13:22  
위대한 애국자들의 넋이 오늘의 이 나라를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fabiano 2006.10.08 16:06  
오늘의 현실을 보면 지하의 선열들께서 얼마나 통탄하실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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