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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fabiano 0 1258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항일 무장 독립운동 펼친 ‘민주주의 신봉자’
3·1운동 주도, 임정서 주요 역할…문맹퇴치 위한 계몽활동도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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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백사장 유세를 마친 직후 자택에 돌아온 해공. 해공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해공 신익희는 한 인간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해공은 1894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하던 때는 조선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 망국의 길을 재촉하던 시기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1876년 강제로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의 국력은 더욱 쇠퇴해간다. 급기야 1894년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 간에 마지막 혈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사실 조선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해공은 조선의 운명이 끝난 1894년에 태어났다. 이후 전개되는 해공의 삶을 보면 한국사의 곡절과 그대로 겹쳐진다.

신숭겸(申崇謙) 장군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의 31대손인 해공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신 판서’로 알려진 64세의 아버지 신단 공과 어머니 동래 정씨 경랑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해공은 이미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공부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열 살 때는 집안에 있던 모든 책을 독파하여 장안에까지 회자되었다. 글씨도 명필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해공의 글씨를 받으러 오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1905년 해공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75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유가(儒家)의 관습대로 3년상을 마치고 연안 이씨인 참판 명재의 셋째 딸인 이승희 여사와 결혼을 한다. 이 여사와의 사이에서 정완(貞婉)과 하균(河均)를 낳았다.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공은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1910년 학교를 졸업한다. 나라가 망한 뒤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19세 때인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안재홍(安在鴻), 송진우(宋鎭禹)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처음에는 총무 일을 보다가 나중에 회장이 되었다.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을 만들어 조선동포의 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11년 백남훈(白南薰), 이광수(李光洙), 김도연(金度演), 정노식(鄭魯湜), 전영택(田榮澤)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 마신다.

이때부터 해공은 반일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그는 방학 때면 고향에서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1913년 여름 자신의 집 사랑방에 광동의숙을 차려 놓고 주민의 의식을 깨우쳤다. 23세 때인 191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공은 학창시절 만들었던 광동의숙을 확장하여 동명강습소를 개설하였다. 해공은 이곳에서 문맹퇴치와 개화사상 고취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그는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6개월 동안 중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보성법률상업학교)의 교단에 서게 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삼키며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해공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일제의 탄압이 가열되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의하여 3·1운동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에 이어 수만 명이 참가하는 서울의 3·5 시위운동을 주동하다가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아 정처 없는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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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 벽보, 신익희·장면 후본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유명한 선거 구호가 보인다.

중국에서 해공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반일 저항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차장으로 부임하여 임시헌장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통합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1923년 임시정부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 양상이 심화될 때 그는 중국 국민군 제23군에 들어가 육군중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분용대를 조직하여 항일 유격전을 벌이고 한·중 합작노선을 도모하였다. 이후 자신의 후원자인 23군의 호경익 장군이 죽자 중국군에서 나와 상하이로 돌아왔다.

36세 때가 되는 1929년 해공은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이후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일 선무공작과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인 1944년 임시정부의 좌우 연립내각에서 내무부장에 취임하여 해방되는 날까지 중국 각지를 돌면서 초모활동(병사모집)과 선무공작을 단행했다.

해공은 27년 만에 환국하여 서거할 때까지 건국운동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을 조직하여 건국을 대비하였고 반탁운동을 적극 벌여 친소정부를 세우려는 좌익의 음모를 분쇄하였다. 해공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초대 및 제2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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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7월 부산 피란 시절 전황을 듣는 이승만 대통령, 신인희 국회의장, 장면 총리, 무초 주한미국대사(왼쪽부터).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해공은 전국의 피란지를 돌면서 시국강연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후 부산 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이승만의 독재가 심화되자 1955년 9월 19일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결성하여 반독재 구국운동을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해공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1956년 5월 15일 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행해진 5월 3일 해공의 한강백사장 유세는 전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연설회였다. 해공은 1시간30분 동안 혼신을 다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연설했고, 이 연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해공은 1956년 5월 5일 새벽 호남행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정경환 동의대 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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