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정지용 아들 구관씨가 구술(口述)하는 정지용 생애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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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아들 구관씨가 구술(口述)하는 정지용 생애史

fabiano 0 1506  
해설 : 이 이야기는 구술(口述)을 1차 채록한 이후에 서술 순서를 참고하여 생애순으로 다듬었다. 기록자가 읽기 좋게 제목을 나누고 이야기 순서에 따라 단락을 나누었으며, 괄호 안에는 기록자 말을 적어넣었다.
1. 어렸을 때
1)정지용 아버지 머슴 수술
제 할아버지가 천주교 신자가 되고 한의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버셨어요. 한의사를 해서 . 그런데 한의사를 해도 그게 무슨 약첩이나 지어주고 침이나 놓는 한의사가 아니라 그 당시에도 외과 수술을 배워가지고 오셨어요. 한의사로서 그래가지고 수술을 하셨어요. 종기 수술, 좀 안됐지만, 어떤 머슴이 여름이 소를 몰고 나가서 더워서 나무에다 붙들어 매놓고 더우니까 그 나무 그늘에 누워서 낮잠을 잤어요. 근데 이 소가 목이 마르니까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다가 그 머슴의 고환을 밟았어, 그래 고환이 터져나갔거든, 그 다 죽은 걸 업고 왔어요. 그것을 수술해가지고 그 머슴이 나중에 후손을 봤다고 그래요. 난 모르지만 우리 할머니가 다 한 얘기요. 할머니가 해줘서 내가 기억하는 얘긴데, 그래가지구서 그 머슴이 나중에, 다 죽는다 그랬는데, 나중에 그렇게 수술을 해가지고, 나중에 소생을 해가지고 소생을 봤다고 그래요. 그 칭찬이 동네에 터지고 그랬는데, 근데 그때에 수술을 한다고 그래도 그 수술이라는 게 물론 원시적인 수술이겠고 그렇겠지마는 그때 메스를 가지고 계시더라는 거예요. 메스를. 날카로운 칼을, 짤막칼인데, 그걸 꼭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면서 수술을 했다 그래요. 그리고 인제 그걸 고치는 방법은 고약으로 치료를 했었다 그래요. 고약으로(약으로 유명하셨다고 )그래 고약이 아주 유명한 고약이예요. 그 말고 등치라고 아시죠. 등치. 이 등 뒤 척추에 나는 종기, 그걸 등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의학에서도 잘 못 고치는 겁니다, 이 등치는. 척추, 중추신경 내려가는데 생기는 종기, 그건 잘 안 나아요. 애를 먹고. 예전에 그 세종대왕께서도 등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거 아니예요?

2)수해로 가난해짐
(근데 지용시인 산문 보면 어렸을 때가 가난해서 기억하기 싫다 )네 그 얘기가 지금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끄트머리서. 그게 어떻게 나오냐면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거든요. 그런데 예전에는 은행도 없어, 돈을 벌면 어디다 넣냐면 그전에는 이렇게 돈궤짝이 있어가지고, 그리고 위쪽을 반쯤 열면 속에걸 끄내고, 또 닫으면 이렇게 해가지고 위에 구녁이 뚫려서 돈이 생기면 거기다 쑤셔 넣는 거예요. 은행두 없구 돈이 생기는 대로 그 궤에다 돈을 모았었어요. 모으셨는데, 아, 하루에 수해가 나가지고 청계천이 범람해가지구 그 집꺼정 살림살이꺼정 다 떠내려갔어요. 그럴 때 돈궤까지 다 떠내려 간 거예요. (여기 하계리 사실 때요?)네 하계리. 지금 생가 복원해논 자리. 그 집이 지금은 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 전에는 더 이짝으로 그 실개천 변으로 더 붙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집을 몽땅 잃어버리시구 가재도구도 다 잃어버리시구 더욱으로 아까운 것은 돈궤를 떠내려보내셨어요. 그래 이 양반이 환장을 해가지고 그 돈궤 떠내려간 쪽으로 얼맨가를 가셨대요. 가시니깐 언덕 위에 돈궤가 있는데 속은 다 빼가고 빈 궤짝만 있더라는 거예요.(그런 남은 거는 땅 터밖에)그래 남은 거는 땅 터밖에 없고 집도 다 무너지고 이 야단이 나고. 그래 이제 이 양반이 그걸 이제 그런 꼴을 보고 돌아와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천주를 믿고 천주교 일도 많이 해서 회장, 천주교 회장, 옥천교회 초대 회장꺼정도 하셨는데(그럼 지금 옥천에 있는 성모교회?)그것이 그전에는 구읍에 있었어요. 지금은 이리 왔지만 예전에는 구읍에 있었어요. (구읍 어디요? 지금 어디쯤에 있었어요?) 그 구읍 어디라고 하까? 죽향리 그 어디 근처예요.
지금 죽향국민학교 언덕에 있었는데, 그때는 이 집이 뻘건 벽돌로 집을 뾰쭉집을, 네. 그래가지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천주를 믿고 열심히 살라고 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그러시면서 천주교를 버리시는 거예요. (그게 지용 시인 몇 살 때 쯤 일이예요?)그, 아주 어렸을때(여닐곱살때)아니 아니예요. 아주 어렸을 때 얘기예요.(한두살이나 뭐 이런 애기)아마 그렇게 어떻게 되는데 연도는 내가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라서 연도는 내가 잘 모르겠고. 그렇게 해서 인제 집안이 그렇게 해서 망하니까 인제 타락을 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그래 그렇게 즐겨 안 자시던 술도 자시게 되고, 술을 자시게 되니까 바람을 피시게 되고. 그래 인제 작은 마나님도 하나 얻고. 그 작은 마나님 들어오니깐 우리 친할머니는 고만 예이 꼴 안 본다고 친정으로 가버리시고. 그런 적이 그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 가난, 그 가난이라는 게 말 못하죠 뭐. 그렇게 망해놨으니. 수해로 해서. 그쪽에 가서 집이 굉장히 가난했어요. 그래서 죽향국민학교를 4학년, 그전에는 4년제였어요. 4년젠대 그 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시구서는 고담에는 인제 학교를 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동네 사람들은 전부 이 양반 가르켜야지 안된다구 말이지, 빚을 내더라도 가르켜야지 안된다고 막 동네에선 들고 일어나니까 할 수 없이 인제 서울을 보냈는데 서울와서 한 4년 후에 휘문중학교를 가시는 거예요.

3)어렸을 때 일본 순사 이야기
(어렸을 때 뭐 옛날 이야기나 이런 거 해주신 기억은 없었어요?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 호랑이가 나오거나 뭐 이런 거)뭐 그런 얘기는 없었고 할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얘기 하나는,(말씀하시는 거 찍을 테니까, 말씀하세요) 직접 들은 얘기는 일제 시대때에 할아버지가 약국을 하시는데 그 약국방 앞에 툇마루가 이렇게 있었거든, 툇마루가 이렇게 있었는데, 인제 아버지가 어렸을 땐데, 아주 어렸을 땐데 그 몇 살쯤 됐는진 모르겠어요, 아주 어렸으니까 그런 일을 했.. 저질렀겠죠. 그래 인제 아버지가 여름에 더우니까 툇마루에 앉어서, 툇마루에 앉어서 드러눠 있었대요. 드러눠 있었는데 일본놈 그 형사가 집에 와가지고 야, 일어나, 일어나, 그러더래요. 그래 아버지가 안일어 났대요.
이 일본놈의 새끼가 여 와서 이러냐고, 안일어나니까 일어나라구, 그러믄서 강제로 일으키드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내 집에서 내가 드러눠 있는데 왜 맘대로 일어나라 드러눠라 하느냐 말이지, 그러구 소리를 냅다 지르니까 아니, 그, 형사가 어린아이가 건방지다 이거야, 그러구선 할아버지는 약방 그 방에 앉으셨는데, 영감님 보는 앞에서 얘 버릇을 가르키기 위해서 내가 뺨을 한 번 때려야되겠다 해서 뺨을 찰싹 때렸대요, 그러니깐 그냥 할아버지가 번개같이 일어나시더니 늘 쓰시던 그 목침, 목침을 집어들더니 그 형사 가슴에다 내던지더래요, 너, 어떤 자식인데 니가 뺨을 치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말이지, 그러믄서 그 형사를 목침을 때려서 했는데, 니껀 할 말이 있나, 남의 자식을 패다가 부모한테 봉변을 당했으니 할 말이 있나, 에, 두고 보자,고 말이지 이담에 인구 조사와서 좀 봅시다, 근데 인구 조사라는게 지금은 가족이 몇이냐 어디 직장은 뭐냐 이런 정도로 묻고 뭐 쓰고 집은 몇 평이냐 이런 걸 묻는 정도지마는 예전에 그 인구조사는 그렇지 않아요. 예전엔 그 위생 검열까지 같이 겸했어요, 위생검열까정, 그 더러운게 집안에 있다든지, 뭐 청소를 잘 안했다든지 하면 그게 벌금을 물든지 가서 주재소에 붙들려가서 혼을 나구 그랬어요, 그래 인구조사하는게 그때는 굉장히 무서운 일의 하나였어요. 지금은 인구 조사란 게 사람 머릿수만 조사해내고 마는 거지만, 예전에는 그랬는데, 아버지가 그때 어렸을 때 아 이눔이 조사 나와가지구 또 몹시 이렇게 하믄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하셨더래요, 아버지께서, 그런데두 그 담에 안 오더래요. 허허. 다시는 안오더래요(혼나구 가서요?)네, 그래서 다시 안오더래요. 인구 조사도 안오고.

4)휘문중학교 교비생
(그러면 휘문중 가기 전에 몇 년간의 공백이 있다고 연보에는 나와 있거든요)그때 이제 서울 가서 한학을 공부하셨다고 돼 있어요(정확하게 뭐 어디서 숙식하시고 뭐 이런 거는)에 그것은 그래요, 어디가서 기숙하고 계신 거는 어디냐며는 제 아버지가 열두살 때 결혼하셨거든요, 어머니도 열두살 동갑 나이로 결혼하셨는데, 이제 결혼만 하셨지 우리 어머닌 친정에 계셨고 (그러면 호적상에만)아, 그렇죠, 어른이 결혼을 하셨고 혼자 계셨는데, 그 말하자면 어머니 외가 쪽으로(은진 송씨?)은진 송씨 쪽으로 무슨 그 전에 무슨 벼슬을 한 집안이예요(그쪽 친척으로 해서)그래요. 네, 그 친척집에 가서 아버지로 얘기하면 처갓집 친척에 가서 기숙을 하고 그 양반도 아버지를 꽤 좋아하고 재주있다 그래서 그 한문도 가르키고 그랬어요, 한 4년을 가르키다가 나중에 학교를 들어가게 되는데, 이제 처음에는 이 지금은 수업료지만 월사금이라는게 오는 거예요, 집에서. 월사금이라는 게 수업료가 몇 달은 오는데 몇 달 안가서 그게 끊어지는 거예요, 수업료가, 아, 끊어지고 나니까 한달 두달, 석달 이렇게 차며는 핵교에서 참어주다가 안되겄으니까 고만 불러서 넌 정학, 넌 돈 가져오기 전까정 학교 못다닌다, 하고 인제 퇴학을 당하는 거예요. 그 이제 퇴학을 당하니깐 그 일가 어른이, 자기도 뭐 돈을 대서 공부를 가르킬 형편은 못되고, 하니까, 어느 은행에 취직을 시켜주더래요.
(학생일 때 중간에)예. 뭐 퇴학을 당하고 돈이래도 벌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은행엘 취직을 시켜 줬는데 은행엘 가서 그때 뭐 아주 어리니까 급사라는 거 있죠? 급사라는 거 아세요?(네, 심부름하는 소년)심부름. 그 급사로 취직을 해서, 취직을 해서 있는데, 한달을 딱 지나고 나니까 아버지가 생각하길 내가 이렇게 돈이나 벌고 이렇게 있다가는 내 신세는 아주 가루난다. 그러구 공부가 하고 싶어 죽겠는데 이거 뭐 하는 방법이 없고, 게 하루는 노는 날 핵교 선생님을 찾어갔대요. 담임선생을. 그 담임선생한테 갔더니 담임선생이 깜짝 놀래면서 너 이놈, 아무 말도 없이 핵교를 안나오는 법이 어딨느냐, 그 선생은 또 모르죠, 퇴학을 당한 건 서무과에서 하는 거니까, 모르구선. 안나온다 안나온다 하니깐 이거 왜 이놈이 안 나오나, 근데 그때도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아주 선생님이 머리에 항상 아무개를 기억하고 있는 거죠.(휘문중 수석이었다면서요)네 수석이죠. 그리니깐 선생님이 참 안타까워서 기달리고 있는데 오질 않고 있다가 한달만에 갑자기 푹 나타나니까 막 화를 내면서 너 이녀석 학교 마음대로 안 나오고 얘기도 안하는 놈이 왜 그러느냐고 다그치니까 월사금을 못 내고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런단 말이지. 그래서 학교 나오지 마라 그래서 있다가 난 지금 어떤 은행에 소사로 있는데, 선생님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 신세는 아주 가루납니다, 아주. 공부는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그래, 하더니 교실에 가서 학적부를 끄내가지구 가서 학적부를 가지구 아버지를 데리고 교주한테 갔더랍니다.
(지금의 학교장이죠? 학교 주인이죠?)네 학교장이 아니라 이사장이죠, (사립학교니까)교주한테 가서 학적부를 뵈 주면서 얘가 이렇게 우수한 아인데, 공부도 잘하고 이런 아인데 이 아이가 돈이 없어 월사금을 못내다가 기어이 퇴학을 당해가지고 한 달만에 날 찾어왔으니, 이 교주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했더니 학적부를 전부 두둑거리며 보구 이러구 두말두 안허구 그만 교비생으로, 교비생, 그러니까 지금 장학생이지. 그런데 요즘 장학생은 방법이 다른가 본데 그전에는 교비생, 하고 한번 결정이 나면 수업료 일절 면제, 그러구 생활비를 조끔 줘요, 넉넉한 건 안되고 그저 조끔 생활비를 줘. 그걸 받아가지고 다시 복교를 한 거예요. 핵교를 다시,

5)휘문중에서 동지사대 유학
그래가지고선 인제 공부를 하는데, 아버지가 들어갈 당시는 4년제였었는데 졸업하는 해 5년제로 변했어요. 휘문중학교 격이, 그래가지고 일년을 더 계속할 사람은 공부해라 그래가지고, 아버지는 4년제 졸업하고 다시 5년제로 입학을 하는 거예요, 교주의 승낙을 받아가지고, 그래 이제 5년제로 일년을 마자 채우는데 아까 얘기했든 그 학교 문예부, 예, 요람지를 하구 그 뭐 요람지가 전부 학생들한테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선생님한테도 다 가구 그러거든요 그 교지가. 그 칭찬이 뭐 대단한 거죠. 이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아이다. 그래 인제 5년제 졸업을 딱 하고 교주한테 인사를 하러 가니까 넌 그래 졸업을 했으니 어떡할 거냐,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으나 가정 형편이 도저히 용서를 안 하고, 어디 취직을 해서 돈벌이를 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아버지를 도와주는 수밖에 없죠 하니깐 교주가 일단 하는 말이 너 내 내 말대로 하면 너 유학을 보내주마. 그 귀가 번쩍 뜨일 거 아닙니까 유학꺼정 보내준다는데. 그 조건이 뭐냐고 물으니까 니가 이 유학을 보내서 대학을 보내 줄 테니께 그 졸업을 하고 와서는 우리 핵교 와서 봉사를 해야 한다, 교사로서 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두 좋겠느냐 하니깐 그 때 그 형편에서야 뭐 참 하늘에. 그래서 휘문중학교 교비생으로 일본 동지사 대학에 입학 하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동지사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해방이 되던 해까지 18년 동안인가를 평교사로 근무를 하셨어요(굉장히 오래 하셨네요)

2. 성인이 된 이후
1)동지사 대학생 시절 천주교 관련
(저, 가족관계좀 여쭤볼께요, 낳으신 어머니하고 지용 시인을 기른 어머니가 다르시잖아요?)네, 그러니까 작은... 나한텐 작은 할머니, 작은 할머니지, 작은 할머니가 잠깐 어릴 때 이렇게 와 계셨었어요. 그래서 인제 천주교를 버리고 방탕하게 작은 마누라 얻고, 이래가지고 인제 어머니가, 할머니가, 내 친할머니가 친정으로 가시고 에이 그꼴 안보고 산다구 인제 가시고 그랬거든, 그랬는데 어떻게 해서 그래 전부 다 화해가 되고 본점으로 돌아갔느냐 하면 아버지가 동지사대학를 가셔가지고 , 동지사대학은 그 신교 계통의 학교예요, 개신교 계통이예요, 개신교 계통인데 어떻게 이 양반은 구교에 접근해가지고 구교 세례를 받았거든. 캐돌릭, 로만 캐톨릭 세례를 받았었다구. 그래 하루는 방학을 돼서 집엘 다니러 왔는데, 할아버지하고 아버지하고 대화를 하시는 거예요, 야, 너 일본가서 유학했다더니 유학을 한 그 얘기나 좀 해라, 유학갔다 온 얘기나 해라 좀 하니까, 아버지가 얘기를 하는데 다른 얘긴 다 그만두고, 아 제 아버지가, 어머니가 전해줘서 인제 저는 아는 얘긴데, 저는 일본 가서 천주교 신자가 됐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그때까지도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천주교 신자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 방탕하구 천주교 다 내버리고 하니까 뭐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도 천주를 믿으십쇼, 저도 천주를 천주교를 입교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도 그걸 믿으십쇼.
그러니까, 이 양반이 담뱃대만 그냥 털구 닫구 털구 닫구 한 십여대를 피드니 땅땅 두드려서 저만치 밀어놓고 궤짝에서 뭘 끄내시는데 이 공과책이라고 아세요? 기도문(네)기도문 책하고 로자리오, 묵주, 천주교에서 쓰는 묵주를 내놓으시데요. 그걸 딱 내놓으시더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놀랄 거 아닙니까, 이 웬 공과책 기도문하고 로자리오가 있나 해서, 아 이거 웬 겁니까 하니깐, 그 얘길 죽 하시더라는 거예요. 중국 갔을 때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됐다가, 몇 년도에 수해났을 적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천주를 믿고 천주교 일을 많이 했는데도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몰라서 천주교를 버렸다, 그래 니가 와서 다시 나한테 천주교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게 니가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 다시 교회 와라 하는 계실거다, 그래가지고 천주교를 다시 나가신 거예요, 그러시면서 작은 할머니도 정리하시는 거죠. 정리하셔서 작은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정리를 하고 교회로 나가셨고, 그래 작은 할머니가 나가시고 나니까 친할머니를 모셔온 거예요. (그럼 그 시간이 꽤 오래 되셨을 거 같은데)글세 그게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상당히 오래 됐겠죠? 아버지가 많이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은 다음에 저 대학엘 가서, 대학을 가서 공부하다 신자가 돼서 와서 얘길 한 거니까, 그 기간은 상당히 될 거예요. (그러면 그 작은 할머니한테서는 자제분이 없었었어요?)예, 작은 할머니한테 자제분이 하나 있었어요. 하나 있었는데 죽었어요. 죽고 이젠 거기는 후손이 없고, (거기 그 지용 시인 시에도 많이 나오는 누이요, 계용 누이가 )아 참, 누이가, 누나하고, 삼촌하고 둘이 있었어요. 내 고모하고, 삼촌하고 둘이 있었어요. 그 둘이가 작은 할머니 소생이었었거든, 고 밑에가 남자 삼촌이었었고. 그런데 그 둘이 다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그 누이를 굉장히 사랑하셨던 거 같어요. 그리구 또 오빠 오빠 하구, 지금 생각하믄 아버지 자신도 외로우니까 자연히 그 동생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거예요.

2)교사일 때 한시 강의
그래 인제 해방이 딱 되고 난 다음에는 인제 그 평교사로 있으면서도 각 대학에서 자꾸, 그 초청강의를 해 와요. 그때쯤해서는 아버지가 문단에 아주 (이름있는 시인이라서)뭐 이름있을 정도가 아니예요. 그때는 아버지를 시의 제왕이라구 불렀어요. 시의 제왕이라구. 그래 그 뭐 대접이 뭐 융숭하기가 이를 데 없죠. 어느 다방에 가도 쫙 비켜나가구 한 가운데 모시구, 그런. 근데 이제 뭐 그때도 서울대학교 이화여대, 숙명여대, 이런 데서 초청 강의를 해서 강의를 한 일이 있어요. 그때는 나도 나이가 꽤 들었을 나인데 서울 대학 문리대, 지금 저기 그 동숭동에 있는 마로니에가 서울대학 문리대학 있던 데거든. 거기 가서 현대 문학을 강의를 하는데, 현대문학 강의를 해달라구 아버님이 현대 시인이니까 현대 문학 강의가 올 거 아닙니까. 근데 현대문학 강의를 갈키라구 초청을 했는데 이 현대문학을 안 가르키는 거야. 한시를 가르키는 거야, 한시를. (한시요?)예, 시전을 가리켜요. 근데 그 시전을 가르키는 이유가 뭔가믄 현대시를 알자믄 고전을 모르고서는 현대시를 못쓰는 거라구, 현대시를 알아야 그 나라의 문명도 알 수 있구 그 나라의 문화 척도도 알수 있다. 성경이 시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 한시를 가리키는 거야, 한문시를, 근데 그 한문시를 얼마나 재밌게 강의를 하는지 그냥 그 교실 꽉 차고도 모자라서 바깥 복도 유리창 바깥으로 문 열어놓고 다 서서 강의를 듣는 거예요. 그렇게 그 강의가 (한시라며는 시조)시전, 시경을 가르켰어요. (글이나 그런데는 그런 내용이 별로 나오지 않았는데요)그게 나오는 데가 있죠. 예, 그 글을 시전을 가리켰다는 얘기를 쓴 책이 어딘가 있어요.
3. 가족 속에서 정지용 모습
1)정지용의 생활 습관과 성격
(어렸을 때 아버님 풍모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겠어요? 어떤 옷을 좋아하셨다든가, 생활적인 면에서)글쎄요. 내가 뭐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적은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어른들한테 주워들은 말은 굉장히 성질이 급했어요.(아버님이요?) 성질이 굉장히 급하고 책을 한 번 들면 밤을 새는 줄도 모르고 어렸을 때도, 책을 한번 손에 들면 놓을 줄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그때 어렸을 때 뿐만 아니라 평생을 그 습관을 가지고 사셨어요. 심지어 책보다 화장실 가실라면 책 들고 갔어요. 그래서 화장실에서 보시고, 또 진지 잡수라고하면 저 건넌방이 아버님 서잰데 안방에 오실 때 책을 들고 와서 밥상 에서도 책을 읽으시고 산책을 하시거나 어딜 가시거나 책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아요.
(대충 궁금한 걸 몇 가지 물을께요)네, 그렇게 하세요. (아버님 생각하실 때 어렸을 때나 성장하셔서라도, 구관씨가 성장하셔서라도 기억에 많이 남는 모습같은 거 있으면 말씀좀 해주시겠어요?)제가 기억에 남는 거요? 제 아버진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굉장히 성질이 급했어요. 급하고, 자기 주장, 자기가 생각하는 그 이외에는 전연 움직이질 않아요. 그건 무슨 뜻인고하니 그건 그저.. 아버지는 글을 쓰는 분 아닙니까, 자꾸 주문이 들어오는 거예요. 주문이, 이런 글을 써다오, 저런 글을 써 다오, 제 아버진 그거는 움직이질 않아요. 이승만 쪽에서, 그때 그 자유당 한민당 쪽에서 뭐 자꾸 이승만 박사 칭찬하는 글을 써라 그런 시를 찬양시를 써라 그렇게 하는데도 그런 것도 하나도, 꼼짝을 안 하세요. 움직이질 않아요. 그 양반 그건 아주.(기개 있으셨군요)네 그러구 일절 만나서 누가 뭐 잘못하고 그 뭐 시 잘못 쓰고 우쭐대고 그러는 사람 보면 굉장히 그 엄하게 다스렸어요. 니가 뭘 안다고 시 한쪼가리를 쓴다고

2)한복을 입은 이유
(출근하실 때에 아버님이 의복을 어떻게 입고 다니셨어요?)그 아버님이 양복을 입었지마는 주로 많이 입으신 건 한복을 입으셨어요. (여기서는 모시저고리 입고 다니던 걸 기억이 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정진욱씨는)네, 모시저고리도 입고, 또 삼베도, 저 뭐야 명주, 그때는 거 뭐야 두루마기감이 별로 좋은 게 없거든요 명주 두루마기 까맣게 물들여서 명주두루마기 입으셨고 겨울에는 명주바지저고리 입으셨고. (한복을 입으며는 그때 신발은 무얼 신으셨어요?)신발은 구두 신고, (한복 많이 입으시고 다닌던 걸 기억하신다고요)그 한복을 입으시는 이유가 아이고, 아버지 친구들도 그러고 아버지 제자들도 그러고 또 우리도 그러고 아이 아버지 양복 입으시지 거 한복 입느라고 그러느냐고, 그래도 꿈쩍을 안하세요. 그러믄서 내가 최소한도로 조선 사람이라는 표시는 이것밖에 없다 말이요, 학교 가면 갈킬 때 일본말 해야 되고, 그런데 이거 아니고는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뭘로 인정하겠느냐, 표시하겠느냐, 그래서 한복을 입으신 이유가, 그래서 입으셨대요.

3)어릴적 잃은 딸
(그러면 그 시에 나오는 이삭 줍는 아내나 이런 것들이 )이삭이라는 건 내 논에 내 밭에만 이삭 줍는 건 아니거든, 이삭이라는 건 남의 논에 가서 줍고 (가난하게 보이는 것이 당시 현실이어서 그렇게 시에 묘사가 된거죠?)그렇죠, 뭐 그러니깐 산에 가서, 임자없는 산에 가서 텃밭을 일구기도 하고, 그렇게도 하셨고, 하셨었고, 글쎄 이삭을 줍는다는 얘기는 어떤 면에서는 이삭도 줏었겠지만 상징적일 수도 있을 거예요(땅을 소유하셔서 자작농 생활을 영위하실 만한 형편이 아니었어요?)글세 돈을 벌구 약방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뭐 간단한 밭이나 이런 걸 농사를 지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머니가 내 위에 딸이 하나 있었어요. 내위로, 나한테는 누나죠, 어머니한테는 딸인데, (연보에는 안 나오는 것같은데)연보에요? 네, 연보에는 없고 사남매만 나오고, 우리 어머니가 한 칠팔남매를 낳으셨대요. 그런데 예전에는 지금같이 않고 다 나서 돌두 전에 죽고 이름은 호적도 안 올리고 그래 예전에는 다 호적을 돌지나간 다음에 한두살 먹어서 하는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은 다서여섯살 때에도 호적에도 안올리구 있다가 올리는 사람도 있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내 누나도 그러한 존재였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다섯 대 독자에다가 또 내가 아들을 기달렸는데 딸을 낳았으니까 할아버지가 아주 그 완고한 봉건주의자거든요, 그래 딸 낳았다고 어머니도 구박을 하고, 또 손자도 벨루 달가워 안하시고, 손녀도, 그래가지구서는 그 내 누나가 어렸을 때 젖멕일 때 울며는 어머니가 쫓아들어가서 울지 못하게 달게구 그러시며는 할아버지가 거 내버려둬라, 달개지 말구, 기집애는 그 울음을 잘 울어야 목소리가 좋아진다, 그렇게까정 하셔댔대요, 내 누나를.
그런데 이 누나가 홍역을 하다가 죽었어요.(몇살 때 쯤에요?)그게 몰라, 한 너덧살 됐는동.. 그래가지고 서너살 됐는동, 너덧살 됐는동 하여간 말을 지껄일 때니까, 말을 지껄일 때니까 아마 너덧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 어린아이도 자기 할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는 걸 알거든,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할아버지 나뻐, 뭐 할아버지 미워, 그래 죽을 무렵에 가서 인제 죽는가보다, 그래서 인제 어머니가 할아버지한테 가서 얘가 아무래도 인제 이상하다구 하니까 할아버지가 인제 마지못해 볼라구 들어올라구 하니까 거 도둑놈 할아버지 들어오지 말라구 하라 그래! 그래요 그러더니 그냥 죽었어. 그래가지구선 어머니가 이 저 텃밭에 어디 가서 땅콩을 심었는데 땅콩 그거래두 농사를 지어서 그거래두 볶아먹여야 되겠다 그래서 땅콩을 심었는데, 그 누나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만 땅콩을 가서 전부 패버렸대요. 내가 누굴 먹일라구 이 땅콩 농사를 심느냐,(시집살이가 굉장히 힘드셨던 것 같아요)힘들었죠, 가난한데다가 그렇게 딸을 났다구 괄세를 받고 그러셨는데, 그담에 인제 나를 나셨거든, 나를 나셨는데, 나를 낳으니까 사흘만에 두루마기를 입구 갓쓰시구 의복을 정장하구선 내가 손자하구 면담을 해야 되겄다 그러구선 그러구 산모 방에를 들어오시더래요. 하, 그놈 잘생겼다 인제 이러구 나를 귀여워 하셨는데, 그 후도 할아버지가 난 참 지독한 손자루 알았어요. 뭐 여간 보통 손자로 키운게 아니예요. (독자에 독자 계속 이런 집안에서 났으니까요)그 뭐 아버지 어머니가 나한테는 소리도 못 지르세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야단을 떨었든지, 그 뉘 손잔데 그 놈을 혼을 내냐구(기억을 많이 하시네요)네 그럼요 그런 기억 할아버지 어렸을 때 기억 나지요 그리구 내가 할아버지를 아홉 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4)아이들에게 문학을 못하게 함
(그런 이야기를 좀 많이 해주셨어요?)그런 얘기를 제 아버지는 잘 안해주셨어요.(엄하셨어요? 집안이)엄한 것도 엄하지마는 왜 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자식들한테 안해줬냐믄 나뿐 아니라 전부 자식들한테 우리 형제간은 문학하고 절대 가까이 못하게 했어요. 그 이유는 첫째는 배고픈 공부다, 문학을 하믄 배고픈 공부다, 지금도 배고픈 공부거든요, 요새 유명한 시인이 시 한편 써가지고 잡지사 가면 3만 5천원 줘요. 그럼 그 시인이 먹고 살라면 그 돈, 시를 몇 편을 써야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배고픈 공부니깐 니들 가까이 오지 마라, 또 하나는, 몰라요, 그건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께서 생각하시기를 느이들은 날 따라와 봐야 이 공부를 해 봐야 못 따라올 테니까 딴 거를 가거라 그랬는지도 모르지, 사실은. 어쨌든 가까이 못 오게 했어요. 저 우리 어렸을 때는 당신님 시집도 못 보게 했어요. 다른 문학 책도 못보게 하고..그리고 나는 너는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으니까 너는 이 다음에 장사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어머니하고 편하게 살아라 그래서 난 컴머스쿨 갔었어요, 상업핵교 갔었어요.

5)진실한 성호긋기는 남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어린이에 대해서 아버님이, 지용시인이 대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이 이야기거리가 있을까요? 아이들에 대해서)글세 그 어른은 굉장히 어린이들을 사랑했어요. 자식 욕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자식들두요, 잘못을 그냥 넘어가질 않으세요. 요새는 부모들이 자식을 가르킬 적에 뭐 잘못했다 그러면 너 이거 잘못했지, 너 이거 잘못을 하면 또 이거 같이 해서 벌을 받는다 뭐 그러지만 아버진 뭐 그런게 없어요, 그 잘못한 것 만큼 매를 맞아야 돼. 그렇게 매를 때릴 땐 나는 이렇게 안해도 알아들을 만 한데 이렇게 하시나 하는 생각, 어렸을 때 가슴에 앙금, 생각할 게 아닙니까(몇 살 때쯤에)그러니까 저기 중학교 댕길 때 그때 얘기죠. 그래 인제 그렇게 매를 맞고 난 이제, 입에 부어 있는 거죠. 그 이튿날 난 인제 입이 부은 것이 안 빠지는 거예요, 화가 나서. 아버진 날 너무 엄히 대한다, 이런 생각이었는데, 그러다가도 길에서, 학교에 갔다오다 이렇게 만나믄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가 없어요. 우릴 보면 말이요, 그러구서는 배고프지?하면서 청요릿집에, 지금 중국집에, 들어가면서 중국집에 가서는 뭘 사주시기도 하고 뭘 이렇게 자식 욕심이 남달랐어요, 아주. 굉장히 남달랐어요. 남한테 빠지는 거 싫어하시고. (공부를 가르쳐 주시거나 이야기를 해주신 건)왜요, 계속 얘기죠.
글쎄, 지금 특별히 더 관심있시 생각이 깊이 나는 것은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고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텀 신자거든요, 그래 출산하면서 며칠 만에 세례를 받어요, 부모가 천주교 신자인 경우는. 그래서 나는 세례를 어렸을 때 받았고, 아버지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어렸을 때 첫 울었을 때부터 성당에 왔다갔다 하는 거죠. 근데 개신교와 달라서 천주교에서는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잖아요. 근데 개신교 양반들은 눈만 감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니까 무심코 보면 기도를 하는지 뭔지 잘 모르는데, 천주교 신자는 반드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니까 표가 나거든? 근데 인제 하루는 소사에 소개를 해서 소사에 가서 살았을 때는 소사에 성당이 없어서 인천 성당 월미도에, 그전에 벚꽃이 아주 유명했었어요, 섬 전체가 벚나무였는데, 그런데, 봄에 어머니가 인천 갔다가, 아버지하고 다같이, 식구가 다같이, 성당엘 갔다가 어머니 제안으루 월미도 벚꽃 구경을 갔어요. 그래 벚꽃 구경을 가니까 정오 싸이렌이 울어, 지금은 그게 없지만 그전에는 싸이렌을 불었어요, 꼭. 그래 싸이렌 소리가 나니까 나는 무심코 늘 집에서 하던 버릇으로 성호긋구 삼종기도라는 게 있어요. 그
래 삼종기도라는게 뭐냐하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특별히 하는 기도가 있어요, 천주교에서는. 그래 삼종기도를 길가다가 말고 무심코 성호를 긋구 서서 기도를 했는데, 아버지는 저만치쯤 가시다가 날 돌아보시믄서 내 기도가 끝나고 오는 걸 기다리셨다가, 내가 아버님 옆으로 가니까 그 얘길 하시는 거예요. 에.. 기도라는 것은 꼭 성호를 그어야만 기도가 되는 건 아니다, 생각하고 속으로 마음만 먹어도 그게 기도가 되는 거다, 그런데 해필 남이 보는 데서 열심한 천주교 신자다 이런 표시를 해가면서 성호를 크게 긋구 기도를 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기도법이다, 니가 삼종기도를 꼭 할라거든 속으로, 그리구 꼭 성호를 넣어야 되겠거든 손바닥에 그어도 성호는 그어지는거다, 이마와 가슴에다 꼭 긋지 않아도, 손바닥에다 열십자를 그어도 성호는 그어지는 거다, 그러니깐 그런 방법으로 남이 기도하는 걸 모르게 기도를 해야지 남이 알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다, 그런 말씀을 어렸을 때 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밖에 나오면 기도안해, 저, 성호 안 그어요. 바깥에 나오면 자연 성호를 안 긋구 뭐 밥먹을 때도 영 마찬가지로 속으로만 간단히 기도하니깐 딴 사람이 날 천주고 신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도. 그러구 집에서는 또 교회에 가서는 성호긋고 기도를 하니까 거기서는 뭐 공식으로 다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서 기도를 하는데 지금도 저는 바깥에 나오면 성호를 안 그어요. 아버지가 가르켜준 그 교리 때문에 그만 성호를 안 그어요

6)가족과 함께 다닌 음악회
(아버님 시를 볼 때 운율이 있더라구요. 노래나 혹시 이런 걸 하는 걸 들으셨어요?)우리 아버지는 음치예요. 저도 음치고. 우리 식구는 전부 다 음치예요(노래를 별로 좋아하진 않으셨어요? 악기라든가)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건 없고 음악 쪽은 전연 아닌데, 음악듣는 건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콘서트에는 거의 뭐(어떤 음악을 들으셨는데요?)건 저기 서양 음악뿐 아니라 또 그렇게 문인 생활을 하시니까 음악가들하고 굉장히 교류가 많았어요. 에, 그래서 이 저 뭡니까, 춘앵, 춘희 , 리골레토 그거 오페라 같은 거를 날 데리고 가서 거기에 대한 설명도 하시고 음악은 이렇게 들어야 된다는 거, 그리고 국악도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구요. 국악도. 국악도 하면 날 디리구 꼭가시는데, 난 그때는 국악은 별로 취미가 없거든요(몇 살 때 쯤에요?)저 소학교 댕길 때고 중학교 일이학년 때 뭐 국악을 별로 좋아하나요? 그 나이 때? 국악에 별로 취미가 없는데 아버지는 꼭 나를 데리고 가시더라구요(판소리하는데?)네, 판소리하는데 가르쳐주시는데, 판소리에서 한 대목을 설명을 하시는데, 이 우리나라 말이 얼마나 좋은가 들어봐라 그러면서 뭐를 꼬집어 내시느냐 하믄 '말은 가자고 네굽을 치는데 임은 붙들고 낙루만 하네'... 이 대목을 꼬집어서 설명을 하시더라구요. 이건 현대문학에서도 이런말 없다 말이야. 이거 얼마나 좋은 시냐 말이야. (어느 판소리에서) 그 저게 무슨 동백? 이동백이 하는 것을 부민관에 가서 그 걸 들을제 그 설명을 하시더라구요, 그 이동백이가 어떤 장군이 소실을 보는데 그 소실한테 갔다가 그 이튿날 떠나는데 군졸이 와가지고 막 전쟁이 났다구 하니깐 이 양반이 가려구 하니까 말을 집어타구선 갈라구 하니까 그 여자가 말고삐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못 간다구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때에 그 그 대목을 끄집어 내서 나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 판소리 끝나고 나서요?)아니요, 하다가 중간에, 중간에 하다가 그리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판소리 하다보면 하다가 중간에 공간이 있잖아요.(쉬는 시간에요?) 그 시간에 그 얘기를 그렇게 하시면서 이게 이렇게 얼마나 좋은 말이냐, 현대 문학에서도 이건 못찾아본다, 이런 대목은, 그러면서 그걸 가르켜 주시던 기억이 나요, 지금.
그 뭐 음악도 자주 다니셨고, 무용도 그래서 무용 평해놓은 것도 있잖아요? 조태권이 무용하는거, 이수경이 무용하는 거, 또 무슨 음악가 누구야 그 마 뭐시더라? 음악평론도 간단히 평을 한 걸 본 적이 있어요. 예. 그런데 예술적인 거(자녀분까지는 보통 안데리고 다녔을 거 같은데)아니예요. 우린 안 그랬어요.(엄청 굉장히 자녀분들 아끼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 동생들은 어려서 그걸 볼 나이가 안 되니까 안 데리고 갔을 거고, 나는 이제 그래도 중학교 들어가고 그랬으니까 이런데 접하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이제 그런델 자주 잘 데리고 가셨어요. 음악회같은데, 어머니도 같이가고. 그런 델 같이 가서 기억이 나요. 그 당시 아이들이나 아내를 데리고 그런데 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있었죠, 그때만해도. 저 부부간에 같이 오는 사람 많았어요. 그런데 그게 부부간인지 애인간인지는 몰라도, 인제 같이 오는 사람도 있고, 나이든 사람도 더러더러 있고 그랬죠.(가족을 굉장히 많이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예, 그양반 그럴 수 밖에 더 있어요? 스캔들이 없으니깐 무슨 애인이 있다든지 그래야 집안 식구를 소홀히 한다든지 멀린 한다든지 할텐데 그게 없으니까 전부 가족들하구만 ,

7)구관씨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인제 일요일 같은 때는 동네두 가까운 산이래도 등산하자고 하시면서 식구들 데리고 나가시구 그러셨거든요. 그런 데는 참 인간적이었었어요. 가족적이고(그럼 아침에 운동하러 산에 가족들 데리고 올라가셨어요?)아뇨, 그 양반이 그 운동을 하러 바깥에 나가진 않았어도, 우리 아버지는 아주 체력이 왜소하거든, 키가 적었었어요. 적으셨고, 나도 시골서 자랐고 서울에서도 편안하게 자랐기 때문에 영양부족이어서 그랬는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몸이 약했어요, 그리구 그래서 늘 아버지가 걱정을 하구 늘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병원 의사가 얘는 각별히 키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폐병이 들려서 죽는다, 그러니까 각별히 조심해서 키우라고 아버지한테 주의를 주더래요, 그러니 그 때에 그러니 그런 주의 받았다고 해서 뭐 특별히 할 수도 없는거고, 내가 또 이 방광 기능이 약해가지구서는 어디 데리구 갈라구 하면 어디 한발짝을 못 가구서 오줌을 눴대요.
그랬을 때 뱀장어 있잖아요, 바다 뱀장어 중에 여기에 모가지 쪽으로 구녁이 난 뱀장어가 있어요. 보통 구녁이 없고 아감지로 이렇게 하는데, 그건 구녁이 나가지고, 물을 마셨다 그 구녁으로 물을 뱉구선 호흡을 하는게 있는데, 그 뱀장어를 말린 게 있었어요. 그거를 고아 멕이며는 체질이 강해지고 영양에도 좋다해가지구서는 그거를 그렇게 궈서 나를 먹여준 생각이 나요(아버지가 직접요?)네에, 아버지가 직접요, 궈서 날 디리고 먹이셨다고(화로 같은 데다가요)그렇죠, 화로죠 뭐. 그랬는데 그거를 늘 머리에 들고 계셔서 기억하고 계셔서 그랬는지 어렸을 때나 그렇지 중학교 들어가니까 운동을 굉장히 시키셨어요. 아 뭐 역기, 아령, 또 뜀박질, 또 철봉도 없어거지고 이 저 한쪽을 기둥줄에다 걸고 하나는 아버님 들고 그러고 내가 철봉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스무살 인제 졸업하고 스무살 넘구 이래두 뭐 튼튼하게 살고 이러니까 퍽 좋아하셨어요. 얼굴에 팔에 근육 붙는 걸 보고서도 참 그렇게 즐거워하셨었어요. 내 동생들도 그 성화 때문에 뭐 아침에 저녁으로 운동안하곤 못 배겼어요.

8)정지용 아내 이야기
(어머니가 성품이 어떠셨어요)아 어머니는 참 무법호인이예요, 법 없이도 살 양반이고(아버지 생전에도 사이가 굉장히 좋으셨어요)예, 그양반 그 게 특징이죠. 우리 어머니는 학교 문전도 못 갔어요, 양반집 딸이라, 집에서 한글을 하고 한문 글자 아실 정도로 공부를 하셨지, 예전에 양반들은 학교를 어딜 보내요, 어림도 없죠. 그리구 아버지는 고급학교를 다니셨거든. 그래 유학을 가서 (저도 그게 되게 궁금하더라구요, 12세 때 결혼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왜 다른 여자를 많이 만나구 그랬잖아요)예, 얘길 하죠.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스캔달이라고는 없어요, 어는 거를 봐도 스캔달이 없고 평론가들도 스캔달을 찾을라고 애를 쓰고, 그런데 아버지는 스캔달이 없어요, 없는 것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젊어서 바람을 피우고 그래서 그랬는지, 또 동지사대학에서 철이 들어서 연애 할 나이쯤 됐는데 천주교 신자가 돼서 그런지 그 원인은 저도 모르겄어요. 근데 아버지는 일절 스캔달은 없어요. 거기 다니면서(집안에서 다정하셨어요?)그럼요,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참, 참 그럴수 없이 (그 시대에는 내외도 왜 많이 했고)네, 내외를 해서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아버지 뒤에서 몇 발짝 떨어져서 성당엘 가도 내 손 붙들구 아버지 앞에 가시구 몇발짝 뒤에 따라 가시구 그랬거든요, 그러셔도 참 그 개의칠 않고 평생을 우리 어머닌 쪽을 찌고 살다가 돌아가셨거든, 그래두 뭐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 시대에 시인들, 문인들은 거의 다 구식 마누라를 다 내버리고 신식 그 신식 여성들하고 결혼을 했잖아요, 핸드백 들고 뭐, 구치배뉴(?)걸고 하이힐 신고 다, 그라구 거의 100%가 그랬어요, 그런데 유독 아버지만은 그런 게 없었어요.

9)창씨 개명 이야기
(창씨 개명하고 관계된 얘기는 들으신 게 있으세요?)예, 있죠. 창씨를 우리는 대궁이라고 지었습니다. 큰 대(大)자, 활 궁(弓)자를 써서 대궁(大弓)이라고 했는데, 그 대궁이라는 뜻은 이걸 한데 붙이면 오랑캐 이(夷)자가 돼요. 이(夷)자가, 오랑캐 이자가 되는데, 우리 연일 정씨 송강 자손은 전부 송강을 따서 마쯔에(まつえ)라고 송강이라고 창씨를 했어요. 그렇게 송강 자손이란 걸 표시하느라고 그렇게 했는데, 아버지는 그 송강 가지고는 안된다, 그리고 그 마쯔에, 송강이라는 건 일본 사람 한테도 그런 성이 있다 이거예요, 일본 사람한테도. 그러니까 그 뭐 쓸 수 있냐. 그 대궁이라고 하는 창씨를 하시는데 대궁이 합치믄 아까도 말했지만 오랑캐 이자가 되잖아요? 예 동이, 우리 한국사람을 중국사람이나 이놈이 동이라고 했거든. 동쪽 오랑캐라고 해서 동이, 동이다, 동이족이다 이래가지고 한국사람 부를 때 동이족으로 불렀거든, (그 창씨를 그렇게 한다는 설명을 들으셨어요?)그럼요, 창씨를 하고서는 창씨를 하고서는 그 설명을 전부 아버지가 해줬어(형제들에게?)그걸 부셔가지구 대궁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었는데 아버지는 그 대궁 글자에 이름을 외자를 써서 세울 수(修)자를 썼어요. 세울 수자, 닦을 수자. 수신제가(修身齊家) 하는 수자, 닦을 수자. 그래 무슨 뜻이냐하면 큰 활을 세운단 말입니다, 쏠라면 세워야 하잖아요, 그러고 나는 이름이 가득할 만(滿)자입니다. 일본말로는 오오유미 미쯔루(おおゆみ みつる)지요. 가득찰 만인데, 그 가득찰 만자는 활 댕기면 뚱그래지잖아요, 가득차잖아요, 그리구 내 밑에 동생은 날개 익(翼)자예요. 날개 익자, 날개 익자는 무얼 말하는고 하면 화살에 끄트머리에 날개가 달려 있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면회 온 내 동생은 빠를 신(迅)자예요, 빠를 신자, 빠를 신자를. 활을 세워서 가득 채워서 그래서 활에다가 깃털을 달아가지고 쏘면 이놈이 쏜살같이 나가서 적을 맞힌다 이거예요. 이 적이란 말은 그때 설명을 안하시던구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왜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4. 일제 시대 단필 이야기
1)자연시를 많이 쓰게 된 이야기
(왜정 때 왜정 말기에는 방랑을 굉장히 많이 한 것으로 보이던데요)아버지가? 버지가? 아버지 방랑은 방랑이 아니고, 시를 쓰기 위해서 여행을 많이 다니셨죠.(글에 보며는 친일도 배일도 할 수 없어서 쓰다보니 자연시를 많이 쓰게 되고, 신앙시 이렇게 많이 쓰게 되었다)네, 네. 인제 그 양반이 그, 그, 43년도쯤해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문장이라는 잡지가 폐간이 돼요. 그 폐간이 어떻게 되냐하면 일본놈 당국에서 일본말로 편집을 해라, 일본말로 시를 잡지를 맨들어라,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겠다, 일본말로 하라고 하면 안 한다, 잡지 안 한다, 그래서 잡지를 폐간시켜 버리죠. (잡지가 폐간되며는 입이 없어진건데)그럼요, 그것뿐 아니라, 그 친일문사들이 국민문학이란 걸 맨들어가지고 전부 문인들을 몰아넣구서는 친일 시, 친일 글을 쓰라구 했어요.(다 친일했으니까, 이름있는 사람들은)그래서 글을 안 쓰면 막 야단이 나거든요, 일본놈 관리보다도 더 무섭게 한국 친일파들이 그렇게. 그래요. 그래서 글 안쓴다. 그래서 그후에 단필하지 않았습니까. 전혀 시를 안 썼어요. 해방되고선, 해방되고선 글을 쓸 만한 시기가 되니까, 이 양반 뭐십니까 그때 좌우익 싸움, 혼란 시기에 더욱 시를 쓸 그런 기분을 맹길어 주질 않았어요. 그양반한테. 그렇다고 해서 이짝 시를 쓸 수도 없고, 저짝 시를 쓸 수도 없고, 그랬겠죠.(산문에는 그런 게 좀 드러나서 나오는 것 같아요)그때는 그러한 단어라든지 그런 것이, 보통이었었어요. 그때 인민 소리 하면 큰일나는 겁니다, 그건 뽈갱이예요. 지금 보통 피플(people)이라고 해서 인민이라고 쓰지 않습니까. 지금은 써도 그게 사상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5.옥천에 내려올 때 이야기
1)하계리 집 이야기
(서울로 전부 가족이 올라가셨잖아요, 옥천에는 얼마나 자주 내려오셨어요? 기억하시기에?)아. 옥천에는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이제 해마다 오고 할아버지는 좀더 후에 올라오셨어요. 약국도 하시고 하니까, 그냥 여기 계시고 하시다가 이제 약국도 잘 안되고, 양의들이 자꾸 발달하고 하니까 한의가 잘 안되고 또 나이도 많아지시고 하니까 이제 아버지 그때 모시는 거예요, (그럼 구관씨가 기억을 하세요? 할아버님이 여기 사시던 거를)알죠. 내 그래서 여기 와가지고 (그럼 십여세 거의 그렇게 될 때까지)아뇨, 할아버지가 여기 살아계실 때는 내가 다서여섯살 어디 그런 정도 였을 거예요. 근데 내가 이 저 할아버지 네 집에 오며는 우물에다가 내가 온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참외수박을 사다가 그 우물에다 막 집어넣어가지고 그 얼은 것을, 잘 식은 것을 당신이 손수 끄내가지구 깎아서 먹이고 그런 기억이 나요, 지금도. 그런 기억이 나고 (여기 계실 때는 아버님 계실 때는 많이 내려왔지만, 같이 올라가신 다음에는 뭐 그렇게 올 기회가 없었겠네요?)글세 뭐 일년에 명절 때나 한번씩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따라서 할아버지 집에 온 거예요. 그게 아마 다서... 네 살이나 다서여섯살까지 그랬을 거예요. 그 후에 할아버지가 서울로 오셨죠(그 이후에는 그럼 여기에 오실 일이 거의 없었겠네요?)아니요, 여 선산이 여기 있으니까 그래서 어머니하고 때로 성묘도 오고, (화계리로 오셨죠? 저쪽 수북리)그죠, 하계리가 아니라, 하계리는 할아버지가 오신 다음에는 근거가 다 없어졌으니까(화계, 화계)아니, 수북, 수북리(그러니까 화계리잖아요, 거기가)거기가 하계린가?수북리지(수북린데요, 화계라고 부르거든요 그동네서, 하계가 아니고 화계)난 그건 모르고, 수북리라고도 하고 꾀꼬리라고 그래요(네, 꾀꼬리, 지금은 화계라고 부르거든요)근데 이제 꾀꼬리 그 동네를 가며는 아버지 우리 하고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들은 아녜요. 아버지가 5대째 독자니까 가까운 일가가 없죠(가서 여쭤보니까 일가가 별로 없다고)가까운 일가가 없을 수밖에 더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일가친척이 없으니까 먼 친척도 굉장히 반갑고 가까워졌는데 그 사람들은 뭐 친척들이 많으니까 아니, 면벽지간이 팔춘간만 되도 멀다고 생각하고 말이지, 잘 안가고 그런 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렇질 못하고 하니까 그전에 내 아버지가 늘 가서 놀고 하던 집엘 가서 그런델 가시며는 우리가 성묘도 오구 이래서 들리구 그러면 굉장히 반가워들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까지는 내가 어렸을 때 말하자믄 핵교다니구 해방전까지는 그랬는데, 해방이 딱 되고 육이오가 딱 지나가니까 세상인심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 전부 정지용 시인 뽈갱이다, 이북 갔다, 이렇게 되는 거라. 그것이 여기뿐 아니예요. 서울서도 그러는 거라. 내가 인제 아버지 친구나 제자를 보믄 그전에는, 그전에는 굉장히 반가워들 하고 나도 퍽 귀여워하고 하던 양반들이 나 만나믄 벌레씹은 얼굴들이야 , 다. 그러구선 끄터머리, 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하니까 할수 없이 인사는 받아줘도, 끄터머리가서는 자네 어디 가서 나만났다는 얘기 하지 말어, 이러니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는 누가 반가워서 내가 인사를 하겠어요. 다 그런 형식인데 그래서 그만 아버지 친구구 제자구 내 친구들까정 다 내버리구 숨어살았어요.(수북리에서도 그럼 그 이후로는 좀 가기가)네, 수북리도 그 이후로는 한집은 아버지가 납북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있던 정천용씨라고 계세요, 아버지하고 같은 항렬인데, 아버지하고 어렸을 적에 참 굉장히 친했다고 하까, 뭐 정천용씨가 아버질 많이 따랐고, 또, 그 천용씨 아버님이 또 제 아버질 그렇게 구여워하셨어요. 그래서 그 양반 서재에 현판 써 드린 일이 있고, 야 너, 글씨 잘쓴다믄서? 내 사랑방 현판이나 하나 다오 그래가지고 퍽 가깝게 지냈어요, 그래 여기 오면 그집밖엔 몰랐어요. 뭘 지금도 그렇죠. 가보면 반가워는 하지만, 사실은 척수가 먼 일가들이니까(시간도 꽤 오래 지났고 벌써)그게 그리 잘 가까이 되질 않고.

6. 육이오 당시 실종
1)구관씨 설명
아버지가 5대째 독자예요.(5대째 독자예요?) 그리고 내가 6대짼데 6대째 와서 4남매 형제를 그래서 셋째 동생이 금년에 이북에서 나를 면회를 왔어요. 면회를 와서 만났고, 51년만에 와서 만났고.(아버지 소식은 좀 들으셨어요?)아버지 소식은 여기서 들은 거하고 똑같은데 근거가 없는 얘기예요. 여기서 내가 해금을 할제는 아버지가 에 육이오가 나고 두문불출하니까 아버지 제자로 생각되는 사람이 몇 명이 와가지고 이렇게 인민공화국으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때는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왔으니까,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렇게 두문불출하시며는 나중에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나와서 얼굴이라도 비치고 그래야지 이렇게 두문불출하시면 안된다고, 그럼 내 뭐 잘못하게 게 있고 그래야 뭐 나가서 얼굴도 내미는데 아무것도 안한 사람이 내가 뭐 무슨 죄 있다고 나가느냐고,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협조는 안하시더래도 정지용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거래도 얼굴을 표시를 하셔야지, 그렇지 않고는 안됩니다 해가지고 나가셨거든요. 나가셔서 보위부에 자수를 하게 돼요. 자수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그래서 인제 거기서 자수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구금이 돼요.
그 얘기가 굉장히 참 깁니다마는 그 이전에 아버지가 서울 녹번동에서, 경향신문사 그만두구 녹번동에서 은거를 하세요, 공부만 하시고, 서예나 쓰시구 그렇게 지나셨는데, 그렇게 두문불출하고 안나가시니까 세상에 이양반 없어졌다, 이게 월북했다, 이렇게 허위기사가 나는 거예요. 이북통신이라는 허위기사가 이런 에로잡지 비슷한 기사가 있었는데 거기에 인제 '거물급 정지용 월북하다'이렇게 주먹댕이만한 활자로 타이틀을 써가지고 거짓말 기사를 내가지고 (그 기사가 기정사실화 돼서 최근까지도?)아니죠, 그 걸로 인해서 이제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에.. 그래 인제 내가 그 책을 보구선 아버지를 사다 드렸어요, 아버님, 이렇게 두문불출하고 나가질 않으시니까 이렇게 오해가 생기니까 나가서 얼굴을 내미시고 내가 이렇게 건재한데 왜 이런 기사가 나고 그러느냐구... 그래 그 책을 가지고 가셨어요. 가지고 가서 그 유명한 오제도 검사라고 있습니다. 반공검사, 반공검사가 있는데, 그 반공검사를 찾아가서 내가 여기 있는데 왜 이북을 갔느니 이남에 있느니 하고 떠드느냐고 나 내버려 좀 두라고 내가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글 쓰던 것도 안쓰고 이런 사람을 왜자꾸 그러냐고 그래 그 책을 책상 위에다 내던지니까 그 오제도 검사가 이때 하는 말이 아 그럼 그렇지 정선생 이북에 가실 양반이오, 이래가지구 말끄트머리에 어떤 말이 나오는고 하니 내가 보도연맹이라는 걸 맨들었는데, 보도연맹 아세요?(네 알아요, 보련)공산당이나 혹은 좌경이나 그짝 노선을 동조했던 사람들을 전부 한데 모여서 한데 집합시켜놓고 감시하는 기관이죠, 그런 반공, 보도연맹을 내가 맨들었는데 거기 문화실장 하실 분이 없으니 아 정선생 아무것도 안하시건든 뭐 시간있으면 나오고 시간없으면 안 나와도 좋고 뭐 이름만 하나 걸어놉시다, (거의 강압이었겠네요)그땐 그렇죠, 뭐 거절할수도 없는 상태니까. 그래 대답도 안하고 나왔는데 그게 이름이 올른 거예요.
그래가지고 육이오가 난 후에 아버지를 제자들이 데리고 나간 후에 며칠 돼도 안 들어오셔서 찾아보니까, 아버지를 찾는 방법은 문학가 동맹에 가는 수밖에 없어요. 문인들이 모이는 데니까, 거 가면 소식을 들으려니 하구선 거기 갔더니 허 들어가는 벽에다가 뻘건 글씨 꺼먼 글씨로 섞어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작가, 또, 기관에, 어떤어떤 기관에 근무한 작가, 또 글을, 이북을 나쁘다고 글을 쓴 그러한 작가, 뭐 이런 사람들은 전부 자수를 해라, 그래서 광명을 찾아라, 그런데 아버지가 그 보도연맹에 이름이 오른 거예요, 이제. 그때 그런 이유로 해서. 그래서 그걸 해명하러 보위부에 갔다가 구금이 되는데 그 보위부에 같이 갔을 때 얘기가 최정희 소설 '찬란한 대낮'에 그게 나와요. 그 얘기가, 그리고 보위부에 가서 구금됐다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갇히는데, 그때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얘기는 박팔양이라는 양반이 그 기사를 써서 확인이 돼 있고, 또 구금이 됐다는 얘기는 오제도 검사가 확인하고 있어요. 오제도 저서에 그 얘기가 나오고. 또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송이 됐는데 그 이송이 된 후에, 했을 적에 계광순이라는 사람이 이 아버지하고 한방에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평양융단폭격을 할 적에 계광순이는 탈출을 해서 국군한테 자수를 해서 이남으로 내려와가지고 4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한 사람이예요. 그 사람이 아버지하고 한방에 갇혀서 있었다, 그런 얘기가 나와요. 그래서 그 후는 나는 그렇게 해서 도망을 왔는데 나머지 양반은 거기서 그때 희생이 됐을 거다, 그 융단폭격을 한 후에 형무소고 뭐고 없어지고 모조리 쓸어서 폭격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그런 얘긴데, (행적이 그럼 거기서 끊기는 거죠?)그럼요, 소식이 없죠. 그리고 북에 예술인라는 책에 보며는 폭격당한 이후로는 아무도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이북에 있는 사람이 증언한 거고,

2)이북에 있는 구관씨 동생 이야기
그다음에 인제 내 동생이 와서 얘기를 하는 거고, 내동생이 와서 얘기를 하는 건 그 당시, 내가 그렇게 해금운동을 하러 댕기던 때도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떠드는 얘기 같은 게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이 돼 있다가 포로교환 때 이북을 선택해서 갔다, 그런 루머도 있었고, 그러고 이제 얘가 전하는 말은 도봉산 뒷산에서 기총사격을 맞고 돌아가셨다(보도연맹 학살했으니까)그건 아니죠. 보도연맹 학살은 그 후죠. 그 아버지는 육이오때 그게 7월말이나 8월 초순께쯤 그런 문제가 생겼고 보도연맹 관계 학살은 인제 그 후에 도강 당해서 간 후에 인제 인민군은 자꾸 내려오고 국군은 더 저짝 남쪽으로 자꾸 내려갈 그 무렵에 보도연맹은 학살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걔도, 내 동생은 그런 얘기를 하더구만요. 그렇게 이북에서는 얘기가 돼 있다, 그래서 걔도 그걸 모르니까 아버질 찾는 주소 확인에 아버지 이름을 넣어요, 내 이름도 넣고,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됐냐고, 아버진 어떻게 돼긴 이렇게 됐다, 하니까는 이북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합디다, 그런 얘기요. 그 증거가 있나 하면서, 아 증거는 없어도 소문은 그렇게 나와 있대서 이북에서는 그것이 정설로 돼 있다 그거요. 그러믄 그거는 도봉산 줄기라고 내 동생이 주장하는데 그것은 이북에서 돌아댕기는 루머대로 한다면 동두천은 우리나라 땅이지 이북 땅이 아니거든, 삼팔선 이남이지 이북 땅이 아니란 말예요. 그렇게 되믄 월북도 납북도 아니죠. 결과로는. 하하.

7. 해금
1)육이오 직후 상황
(그러면 구관씨는요, 아버님 월북하신 이후에 살아오신 게 어떻게 되시나요?)내가 살아온 건 말도 못해요. 고통스러운 거는. 그러니깐 아버지가 이렇게 월북을 했다 해서 월북작가로 분류돼 있었거든. 월북 작가로 분류된 사람의 가족들은 연좌제로 해서 취직도 할 수 없었고 무슨 허가 사업을 한다는 건 더욱더 생각도 못하고, 외국에 여행간다는 것도 생각도 못하고. 그러니깐 취직도 못하지 하니깐 장사밖엔 없단 말예요. 숨어서 보따리 장사하는 수밖엔 없는데, 그래서 숨어서 숨어서 그렇게 돌아댕기믄서 장사하면서 먹고 살았어요. 노동판에 가 일도 하고 뭐, 탄광에 가서 탄광도 하고 이러다가 그러니 그러고 살면서 철천지 한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53년돈가? 54년돈가 내가 논산으로 피난 가서 거기 있었는데, 그 피난할 적에 방하나를 얻어가지고 사는데 안집에 어린아이가 이 초등학교를 댕기는데 그 방엘 놀러갔다가 그놈 책상에 앞에 앉아서 심심하니깐 책을 빼서 봤단 말예요. 국어책을 끄내놓고 슬쩍슬쩍 들추니깐 한쪽이 완전히 먹칠을 해놨어, 한 페이지를. 그래서 인제 내가 그 눔을 불러다놓고서는 너 이눔 학생이 공부하는 학생이 교과서를 이렇게 먹칠을 하고 댕기는 놈이 어디있느냐, 이런 학생이 어딨느냐고 막 윽박지르니까 하는 말이 선생님이 먹칠을 하라 그랬다 이거예요, 교과서에다. 그래 이 안에 뭐가 있다고 먹칠을 하라 그랬다고 , 이 안에 뭐가 있다고 먹칠 했냐고 그러니깐, 이북으로 간 뽈갱이가 쓴 시 고향이 여기 있다 이거야. 그 학생 말이 말이지, 그러니 내가 걔를 데리고 뭐 월북했느니, 뭐니 또 이이가 내 아버지라는 얘기 그런 할 얘기가 되질 않잖아(마음이 참..)
그래 그래가지구 뭐 영 그래, 아, 참 고얀 놈들이로구나, 그러다 이제 서울을 와야 되는데 서울올 차비가 없어, 서울을 와야, 다녀와야 문교부에 가서 따질 텐데, 아 이게 따질 수가 있나 돈두 없구 올 수도 없고, 그래 그후 얼매 있다가 인제 서울을 부득이 올 일이 있어서 서울을 왔는데 당장 문교부를 쫓아갔어요. 문교부를 쫓아가서 그때는, 지금은 문공부에서 문인들이나 시인들을 관리하지만, 그때는 문교부에서 그런 걸 다 다루었어요. 그래서 문교부를 찾아가가지고 내 저 시인 정지용 씨라는 분이 계시는데, 내 이양반 이 왜 월북을 했다고 하느냐, 납북된 것이 틀림없는데 왜 월북했다고 하느냐 하니까 아, 그양반 월북해서 어째고 어째고 그러면서 나쁘게 얘기를 할라고 욕을 할라고 시작하다가, 한 사람이 눈치를 확 채구선 날 불르더니 그만 그래 당신 누구요? 누군데 왜 시인 정지용 시를 따지느냐? 그래 내가 그 분이 내 아버지다, 말이야, 그래 납북한 걸 내가 알고 있는데 왜 월북했다구 교과서에 실은 것도 먹칠을 하느냐구 말이지, 이름에다가 나는 함부로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을 갖다가 가위표 용, 정 가위표 용, 정동그래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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