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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5) 조병옥 : 경찰 수장(首長)으로 사회 혼란 막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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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5)] 조병옥
경찰 수장(首長)으로 사회 혼란 막아내

조병옥(趙炳玉)은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직업 정치가로서 권력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조 후보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중에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국내에서는 치료가 여의치 않아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1960년 2월 6일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초기에는 경과가 좋아 보였으나 2월 15일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하였다. 조병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후 권력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건강 때문에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야당 정치인이었다.

조병옥이 권력의 정상을 넘볼 수 있을 만큼 야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해방정국에서 살펴보자. 조병옥은 치열하게 전개된 좌우 갈등 속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宋鎭禹)와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해방정국 초기에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모체로 하여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직전에 급조한 인민공화국(인공)에 대응하기 위해서 조직한 우익 보수세력의 집결체가 한민당이었다. 인공은 해방정국을 주도해 나갈 목적에서 미군으로부터 정치적 실체로 인정 받으려고 급조된 조직이었다. 인공은 여운형과 같은 중간 좌파 계열의 인사들과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계열의 인사들까지 참여한 범좌파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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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사건 발생 한 달여 뒤인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 지사, 맨스필드 제주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조병옥이 우익 보수집단 집결체인 한민당의 주요 간부로 참여하면서 좌익 진영과의 이념적 대결을 치열하게 벌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 뿌리가 깊다. 조병옥은 1927년 3월에 결성된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운동에 참여해 서울지회장을 겸직하면서 체험한 것과 미국 컬럼비아대학 유학 당시 경제학을 전공하며 칼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을 섭렵해 좌익의 실체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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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월 29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먼저 신간회 운동을 보자. 신간회는 일제하에서 3·1운동 이후 항일투쟁이 침체기를 맞이했을 무렵에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한 초기에 사건의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한·일 학생들의 충돌로 빚어진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일제가 한국 학생에게만 가혹한 처벌을 가한 것을 확인한 후 신간회 간부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서울에 알리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조병옥을 비롯한 간부들이 경찰에 체포, 재판에 회부되어 3년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소련 코민테른(국제노동운동)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 계열의 화요회와 서울청년회 소속 신간회 회원들이 해체를 요구, 집단적 해체운동으로 확대되어 결국 간부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와중에 해체하게 되었다. 이러한 좌파들의 이념적 행태는 해방정국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따라서 해방정국은 이미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비에트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가운데 남한 내부에서마저 좌·우익 간의 치열한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다. ‘미·영·중·소에 의한 최고 5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거쳐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이 국내에 전파되면서부터 좌·우익 간에는 찬탁과 반탁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미군은 1945년 9월 7일 인천을 거쳐 서울에 진주한 후 곧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10월 17일 한민당의 사무실로 쓰던 동아일보 사옥으로 미군정의 책임자 하지 중장의 고문이던 윌리엄스 대령이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찾아와서 군정의 치안유지에 가장 중요한 자리인 경찰총책인 경무국장(후에 부장으로 바뀜)을 맡아줄 인사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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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는 다음날 다년간의 미국 유학 경험으로 영어에 능통하며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갖춘 조병옥을 설득해 추천하였으며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미군정의 주요 직책인 경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조병옥이 미군정의 경무국장을 맡았지만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무질서하며 혼란한 상황이었다. 조병옥은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경찰조직을 정비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내부에서 전개되는 좌익세력의 다양한 파괴공작에도 제한된 경찰병력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충원한 경찰 조직정비에 대해 항간에서 “친일 경찰을 대거 참여시켰다”는 비판이 일자 조병옥은 확고한 철학을 제시했다. 조병옥은 일제하에서의 친일유형을 직업적인 친일파와,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서 일제경찰을 직업으로 택한 것으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프로 잽(pro-Jap)’이며 후자는 ‘프로 잡(pro-Job)’으로 유권해석을 내리고 이를 참작하여 경찰의 충원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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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치하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던 시절의 조병옥.

찬탁과 반탁으로 나뉜 좌우의 대결적 국면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익진영이 초기의 반탁입장을 하루아침에 접고 1946년 1월 2일 찬탁성명을 발표한 후부터 찬탁운동으로 돌변했다. 한편 우익 보수진영에서는 이승만(李承晩), 김규식(金奎植), 김구(金九), 한민당 등 보수세력 모두가 반탁운동에 나섰지만 그 중에서도 민족진영을 대표해서 가장 치열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간 세력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내용을 접한 후 임정은 김구 주석과 외교부 부장 조소앙(趙素昻)의 이름으로 4개국 수뇌에게 임정의 결의문을 발송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의 즉시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해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라는 중대한 문제에 당면하여 우리 민족을 공식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은 임정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임정 요인들은 통일된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다.

특히 김구는 임정의 주석이라는 공식 지위 때문에 반탁운동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임정은 반탁운동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임정 내무부 제1포고에 의해 군정 경찰부를, 제2포고를 통해 수도경찰청을 접수하려 했다. 조병옥은 군정의 치안 책임을 맡은 총책임자로서 임정의 포고령에 휩쓸렸던 10개 경찰서장을 파면시켰다. 조병옥은 한민족 전체의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거족적으로 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공질서를 파괴하고 군정을 접수한다는 것은 한국의 독립을 지연시키는 장애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비폭력적인 반탁운동을 해야 한다”는 뜻을 임정 요인들에게 호소하였다.

임정과 미군정 간의 긴박한 상황에 직면하여 조병옥은 양측의 회담을 중재했다. 임정의 김구 주석과 하지 장군의 회담이 1946년 1월 1일 서울 반도호텔에서 개최되어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계속하되 질서파괴 행동은 자제하겠다’는 조건으로 합의했던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 한독당 선전부장인 엄항섭(嚴恒燮)은 방송을 통해 질서를 파괴하는 반탁운동을 즉시 중단할 것을 서울시민에게 호소하여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펴게 되었다. 그것은 미군정부라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었고, 군정 행정기관과 병립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김구)을 군정의 의결기관으로 발족시켰다.

이 중대한 고비를 넘길 당시 임정 중심의 반탁운동은 극에 달했다. 서울은 철시(撤市)가 되어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고 3000여명의 군정청 관리 중에 9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하지 장군의 전담 요리사까지 잠적해서 그가 숙소에서 식사를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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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10월 10일 장면(오른쪽)과 함께.
남한 내부에서 이처럼 치열하게 우익진영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제2조(공위의 설치)와 4조(2주 이내 미소공위의 개최)의 실천을 위해 이 위원회를 가동하려고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 군사대표들이 참석하여 예비회담을 개최했으며, 1차 미·소공위 본 회담이 3월 20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렸다.

미·소공위는 장차 수립될 한국임시정부를 위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참여 범위를 놓고 끝내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다. 소련 대표는 “미·소공위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수용하는 경우에만 국한시켜 참여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주장이 수용될 경우 이미 남한의 우익 보수단체들이 모두 반탁운동에 참여한 이상 찬탁운동을 한 좌익진영만이 합법적인 참여자격이 주어지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소련의 책략을 간파한 미군 대표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를 군정당국이 보장하여 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찬탁과 반탁에 관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차 미·소공위는 5월 초순에 휴회에 들어갔으며, 그 후 남한 내부에서 중간파들이 나서서 좌우합작 운동을 벌였으나 끝내 합작에 실패했다. 소련의 책략은 이미 북한은 소련군의 점령지가 되었으며 남한에서 소련에 동조하는 좌파세력이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한반도에서 소련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1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1947년 5월부터 10월까지 2차 미·소공위가 열렸으나 역시 실패했다.

미국은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각국에서 차출된 5000명씩의 ‘상징적 군대’의 주둔을 제외하고 한국 영토나 해역에서 지상군과 공군 및 해군을 포함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미·소공위가 실패함으로써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UN한국임시위원회의 감시하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한 미국의 안이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는 11월 14일 43 대 0으로 가결되었다. 북한은 1948년 1월 9일 UN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UN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UN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조병옥은 군정 3년 동안 군정의 책임자로서 질서유지는 물론 선거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정부수립 후 신생 한국이 탄생하는 데 협조해준 우방국을 직접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도록 임무를 부여한 대통령특사로서도 활약했다. 조병옥은 강인한 인상처럼 소신이 있었으며 특히 어지러운 해방정국에서 좌익의 파괴공작을 막는 데 헌신적으로 활약하여 정부수립 과정에서 질서유지에 큰 힘을 발휘했다.

양재인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SCRIPT language=JavaScript> fontSet(); </SCRIPT>

6 Comments
햇빛(안연식) 2006.09.16 11:37  
웬 넘덜은 조박사를 친일파라 몰아 붙이던데 그런 넘덜 잡아 넣어야 세상이 조용해질 것 같습니다...
드넓은 광야 2006.09.16 11:55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fabiano 2006.09.16 11:59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작자들이 그 시대에 살았으면 그런 소리는 못할것인데...日政下, 그 시대에 옥고에서 고초를 겪은 사실을 아는지...
fabiano 2006.09.16 12:00  
무림거사의 블로그에 자료가 다수 있습니다.
나대로 2006.09.17 13:54  
維石 趙炳玉 박사,  자제분이 최근에 국회에 입성한 Mr 쓴소리 조순형 의원, 그분 형이 조윤형 前의원, 명문가 집안50년대 민주당 시절  구파(조병옥) 신파(장면)로 양분되어  정치사의 큰 족적을 남겼던 두분!
fabiano 2006.09.17 15:19  
이 시대에 저런 분들이 계셔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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