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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5)] 조병옥 그는 누구인가?

fabiano 2 1031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5)] 조병옥 그는 누구인가?
일제 때 독립운동…반고인념 확고한 '영원한 박사'
신간회 활동으로 옥살이… "공산주의는 인간·사회 발전시키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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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조선일보 영업국장 시절의 조병옥.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은 1894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유석이 태어난 해는 국내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나라 바깥에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한반도 주변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조병옥의 본관은 한양 조(趙)씨이며 25대손(孫)이다. 조병옥은 아버지 조택원(趙宅元)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병옥의 부친은 여간해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병옥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후일 술회한 바 있다. 조병옥은 어려서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삼경을 두루 익힌 후 신학문을 배우려고 기독교 계통의 공주 영명중학을 거쳐 평양의 4년제 숭실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왔다.

1911년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 학생담당 총무를 맡아 젊은 청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영향을 받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으므로 배제전문학교(연희전문의 전신)에 입학한다. 재학 당시 학생에게 인기 있는 교수였던 김규식(金奎植) 박사의 강의에 감명을 받게 된다.

조병옥은 1년간 영어를 익힌 후 1914년 정월 초순에 부친으로부터 3000원을 지원 받아 미국으로 떠난다. 부산에서 배편으로 미국에 도착한 후에 펜실베이니아주 킹스턴에 있는 와이오밍고등학교에 등록하고 4년간 영어, 프랑스어, 독어, 라틴어 등 기초교육을 받고 명문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1922년에 졸업한다. 같은 대학원에서 1923년 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계속 공부해 1925년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년간의 컬럼비아대학 생활을 끝낸 후 유석은 자신의 사상ㆍ이론적 근간을 9개 항목으로 요약했다. 핵심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인류사회는 절대적 평등사회를 이룰 수는 없으나 상대적 평등사회로는 지향될 수 있다. 둘째,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사유재산을 근거로 그 소유자가 공익을 위해 신탁(信託)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경제적 경쟁으로서 토지, 자본, 금융의 독점을 막아야 비로소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 발전시킬 수 있다. 셋째, 인류의 질적 향상의 운명은 개조에 있는 것이므로 공산주의와 같은 일개 이데올로기의 유물변증법만 가지고는 현하 인간지옥 같은 사회로부터 돌변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진보의 원리는 개조에 있는 것으로서 혁명은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이 사상은 유석의 일생 동안 생활의 바탕을 이루었다.

1925년 유석은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YMCA 일을 맡아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조병옥은 1927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함께 신간회를 창립, 발족하는 데 적극 참여하여 중앙본부의 재정총무 겸 경성지회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신간회는 조선독립을 원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총망라했으며 발족한 지 얼마 안되어 회원이 3만여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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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총회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한 대한민국의 첫 외교관들. 왼쪽부터 조병옥, 모윤숙, 김동성, 장면.

신간회 간부들은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후 일제의 광주학생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고 한·일 민족간의 차별로 인한 인도주의적 인권옹호를 주장,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3년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신간회 간부들이 옥살이를 하는 중에 코민테른의 지령에 의해 신간회는 해체되었고, 조병옥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집안에서 잠시 소일하고 있었다.

이때 어느 친지의 권유로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를 살리기 위해 경영권을 인수,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8개월간 일한다. 그러나 경영난은 계속되었고 조선일보의 경영자를 물색하던 중에 주요한(朱耀翰)의 소개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맡고 있던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와 연결되어 그에게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다. 조병옥은 조선일보에서 나온 후 잠시 광산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술을 배우게 되어 두주불사의 술꾼이 되었다. 조병옥은 일제 말기에 신간회 사건과 연관시켜 일제의 예비 검속에 걸려들어 2년간의 옥살이를 한 후 해방을 맞게 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9월 초에 조병옥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통령특사를 맡아 자유진영의 국가들을 순방한다. 조병옥은 일제 36년 동안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준 후원에 감사를 표하고 아울러 신생 대한민국을 유엔이 승인하도록 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조병옥은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를 거쳐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을 방문하고,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 요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유엔승인 대책을 협의한 후 영국을 거쳐 제3차 유엔총회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이미 파견되어 있는 장면(張勉) 등 한국 대표단과 함께 폭넓은 활동을 했으며 특히 인도의 네루 수상을 만나 유엔에서 한국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네루와의 짧은 만남에서 벌인 격조 높은 토론은 한국 외교사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조병옥은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다. 그러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충돌로 사임하게 되었다. 내무장관직에서 사임하면서 이승만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내용의 사직서를 써서 이승만의 1인 독재로 향하는 아집에 일침을 가하였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에 주눅이 든 ‘지당(至當) 장관’ ‘낙누(落淚) 장관’들 속에서 조병옥만큼 소신을 지닌 각료도 흔치 않았다.

1955년 조병옥은 사사오입 개헌파동 후 야당 통합운동을 통해 발족한 민주당 간부 중에서 구파의 주요 간부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구파가 부통령 후보를 놓고 격돌했을 때 조병옥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 신파의 장면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1958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치른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장면을 누르고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조병옥은 이승만 후보와 한판 대결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급서했다. 유석은 3남2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이 중 차남(윤형)과 3남(순형)이 정치에 입문했다. 윤형은 오래전 작고했고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 최근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으로 선친의 정치적 유업을 이어가고 있다.

양재인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2 Comments
드넓은 광야 2006.09.16 11:53  
후손인 조순형 의원도 전 지역구의 주민들에는 참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fabiano 2006.09.16 11:55  
조순형의원님의 부친이시니 만큼 영향력을 많이 받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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