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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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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변사의 본격적 등장은 극장가가 형성된 1910년부터인데 서울의 우미관(優美館)·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상설영화관은 대개 5∼6명의 변사를 전속으로 두고, 해설은 2∼3명이 교대로 한 영화를 담당하였는데, 영화가 상영될 즈음 악대의 전주와 함께 무대에 올라, 먼저 전술(前述)에서 인사말과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알리고, 이어서 본편을 해설하였다.
이처럼 무대의 꽃으로 인기를 누리던 변사는 발성영화시대가 되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한국에서는 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된 이후 활동이 점점 줄어들다가 《검사와 여선생(1948)》을 마지막으로 무성영화와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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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렸으니…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해방 전후 및 19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변사의 구성진 신파조의 목소리가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한 장면이다.
당시 변사는 무성영화의 주역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제는 신출(76)씨 이외에
옛 시절 변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마지막 무성영화 변사로 알려진 신씨의 존재는 남다른 애틋함을 자아내고 있다.
그는 “변사는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영화에 생기를 넣어주는 사람”이라며 “요즘 영화에서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1940년대 후반 14살 나이로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으로 데뷔한 그는 무성영화와
변사 역사의 산증인이다.
‘검사와 여선생’을 비롯, ‘홍도야 울지마라’ ‘며느리 설움’ ‘임자 없는 나룻배’ 등 대부분의
무성영화는 모두 그의 목소리를 거쳐갔다.
해방 전후 변사는 무성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사는 화술과 목소리, 흡입력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개봉 첫날 변사가 맛깔스럽고 구성지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영화는 장기 흥행에 돌입하지만
변사가 변변치 않으면 다음날 관객이 떨어져 상영이 중단돼버리곤 했다.
변사가 열심히 대사를 하다 간혹 필름이 끊기면 ‘아, 이리하야 무정한 필름조차 끊어지고 말았구나’ 하고 슬쩍 넘어가는
애드리브도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변사는 당대 인기스타였다.
영화만 끝나면 서울 종로 명월관 기생들이나 고관대작이 목소리를 들으려고 변사를
인력거로 납치해갈 정도. “당시 변사의 인기는 지금 가수나 탤런트에 비할 바가 아녜요.
저도 여러 번 납치됐죠. 그만큼 기분도 좋고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그의 예술인생은 열두 살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의붓어머니의 구박을 못 이겨 집을 나온 신씨는 극장에서 청소를 하며 변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상호·상필 형제, 김선동 같은 당대를 주름잡던 변사들을 흉내 내며 연습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는 김선동씨가 전날 폭음을 하는 바람에 대타로 나서게 됐다”며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자신감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일로 김선동씨의 눈에 든 그는 본격적으로 변사수업을 받으며 전국을 돌았다.
하지만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변사가 되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물들의 대사와 상황설명은 물론 배경음악까지 담당하는 감독 같은 존재였기 때문.
상황에 따라 다른 색깔의 목소리를 내고 관객들의 분위기도 파악해야 했다.
그는 수많은 연습을 했고 구성진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말 그대로 ‘피를 토할’ 정도로 소리도
질렀다고 했다.
그 덕분에 평생 목이 쉰 적도 없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그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게 해주는 것이 변사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영화의 흐름에 따라 강약을 조절해 관객들이 영화에 빠져들게 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아리랑 마지막 부분에서 영진이 잡혀가는 장면을 애절하게 들려주면
모든 관객이 울기 시작했어요.  이런 대목에서는 변사도 정말 눈물나게 몰입해야 합니다.”
그는 11일 처음으로 ‘제자뽑기 오디션’을 갖고 후보자 4명을 뽑았다.
요즘도 종종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그는 “더 늙기 전에 제자를 구하고 싶다”며 “인간문화재처럼
변사의 재능도 전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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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가 만난 사람] 무성영화 마지막 변사 신출(2003-02-13)

"무성영화 마지막 변사 신출". 그의 명함에 필름꾸러미 사진과 함께 명기된 이름이다.
서울 답십리 아파트에서 만난 75세의 "마지막 변사"는 화려하고도 뼈저린 옛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들려주었다. 관록의 입심. 간혹 기침을 해댔다.
기력은 옛날만 못했지만, 딸이 미국에서 사온 "Bell&Howell" 영사기에 필름을 거는 순간
그에게 달아야 할 수식어는 "마지막 변사"가 아닌 "영원한 변사"로 다가왔다.

 ▲윤석화=설이 다가오니 조상들의 삶이 추억과 향수의 그림으로 떠오릅니다.
설에는 선생님께서 무척 바쁘셨을 텐데요.
▲신출=말도 마세요. 1940∼50년대 명절때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며 무성영화 변사로 바쁜 시절을 보냈지요.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돈이 귀했는데도 돈을 다발로 긁어모았답니다.
▲윤=예술인생은 무대 악극에서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언제 변사가 되셨습니까.
▲신=열두살에 집을 나와 평양 가실극장에서 식음료를 팔고 청소도 하며 생활했는데, 악극 장면중
물에 빠져 죽는 연기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기에 제가 그 역을 맡으며 무대와 인연을 맺었죠.
당시 극장에서 악극도 하고 무성영화도 상영했는데, 일본어로 "게츠 아가리"(영화의 인기가 치솟아 나날이 관객이 증가하는 현상)는 영화 "아리랑"을 상영할 때였죠.
인기변사인 김선동씨가 전날 폭음을 하고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제가 대타로 나선 게 첫 무대였죠.
▲윤=14세에 데뷔하셨는데, 떨리지 않으셨나요.
▲신=극장 기도가 "신꼬마야, 너 어제 "아리랑"을 봤으니 할 수 있지?"라고 묻기에 "문제없다"며
무대에 올랐죠. 저는 전날 김선동씨가 한 대로 흉내를 냈어요. 관객들이 "입장료를 돌려달라"고
아우성치지 않고 박수를 보내주기에 "아, 무사히 마쳤구나"라고 생각했죠.
▲윤=김선동씨에게 혼나지 않으셨나요.
▲신="흉내내서 죄송하다"고 빌었더니, 오히려 "언제 배웠냐"며 기생집으로 데려가더군요.
그때부터 술과 담배에 맛을 들였어요.
세살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선 12명도 넘는 의붓어머니를 차례로 들이시느라
재산을 모두 탕진했죠. 4남2녀인 저희 남매도 뿔뿔이 흩어지고 저도 계모밑에서 구박받다
가출했으니 얼마나 정이 그리웠는지 몰라요.
그래서인지 누나뻘인 기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죠.
영화 상영후 저를 차지하려고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꾼들이 몰려들었어요.
▲윤=당시 영화의 흥행은 변사에 따라 좌우됐다고 하더군요.
인기도 많이 누리셨고 돈도 많이 버셨을 테죠.
▲신=저보다 14년 연상인 김선동씨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숙식을 해결했어요. 먹고 사는 게 급했 거든요. 영화가 끝날 때마다 깔깔이(50전짜리 동전)를 한 개씩 받았는데, 모아서 윗옷 칼라에 숨겼죠.
당시 1전에 눈깔사탕이 3개였으니 50전이면 큰 돈이었어요.
6.25 전에는 돈을 좀 모아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아 다녔죠. 전쟁후에는 큰형이 영사기사, 둘째형이
극장 기도, 제가 변사로 활동하며 돈을 모았어요.
서울 장충동 태극당 자리가 우리집이었고 포천에서 극장도 운영했어요.
▲윤=돌이켜보면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고생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활동하실 무렵 김두한과도 만나셨나요.
▲신=40년대 초반 김선동씨가 고향에 내려가면서 저를 서울 관철동 우미관에 맡겼어요.
다다미가 깔린 우미관에서 자고 있는데 누가 툭툭 쳐서 절 깨우더니 "야, 왜 여기서 자냐"고 하더군요.
내가 변사인데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나 싶어 "갈 데가 없다"고 퉁명스레 대답했더니 저에게 아침밥을 사주더군요.
그 사람이 김두한이었어요.
그때 서울에서 인기있는 변사는 김선동, 서상호.상필 형제, 성동오, 신출 등 대여섯명을 꼽을 수 있고, 부산의 조화수, 대구의 박칠성씨 등이 활동했죠. 그러니 어리다고 저를 몰라주는 김두한이 야속했었죠.
▲윤=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는 무엇입니까.
▲신=제가 유일하게 소유한 무성영화필름 "검사와 여선생"(1948년 작)이죠.
"며느리설움"도 있는데, 그건 유성영화의 오디오 부분이 훼손돼 제가 변사로 나섰지요.
▲윤=그토록 인기와 부를 누리셨는데, 왜 78년부터 개인택시를 모셨습니까.
▲신=우리 형제가 운영했던 포천 극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인근 가옥까지 피해를 입었죠.
결국 장충동 집까지 팔아 마무리를 했더니 전셋집 얻을 처지도 안되더군요. 웃기는 이야기를 할게요. 신출영화배급사에서 보유했던 150여종의 영화필름 중 대부분을 고물상에 팔았는데,
한동안 밀짚모자에 두른 영화필름들은 거의 제가 소유했던 것들이에요.
그렇게 없어지고 남은 몇 편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했죠.
▲윤=국무원 사무처 영화과 기사로 활동하고 개인택시 운전사도 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대중에게
돌아오셨나요.
▲신=1991년 8월에 건국대 학생이 제 택시에 타더니 축제에 출연예정이던 연예인 공연이 취소됐다며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1시간동안 만담과 노래를 해주겠다고 했고, 그 기사가 경향신문에 보도되면서
제 존재가 알려졌어요. 무성영화를 다시 틀어달라는 요청도 계속됐고요.
▲윤=이전의 영화대사들을 기억하시나요.
▲신=당연하죠. 요즘도 1주일에 한 두번 지방으로 영화상영하러 갑니다.
연습 없이도 대사가 잘 나와요. 9
0년대에는 하루에 50만원을 주고 영사기를 빌려 "검사와 여선생"을 상영했는데, 주문이 쇄도해 96년 공연자등록을 했어요.
개인택시는 2001년에 그만두고 그때부터 1주일에 서너번 양로원에서 "검사와 여선생"을 상영하지요. 지난해 9월에는 미국 LA에서 "검사와 여선생"을 상영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고 96년에는 일본에서 "검사와 여선생"을 해설했는데, 객석이 눈물바다였어요.
▲윤=40년대부터 67년 마지막 무대까지 인기를 누린 전설의 변사께서 평생의 반려로 삼은 분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신=부산 피란시절 사촌동생 집 근처에 살던 여성과 결혼했어요.
제 삶이 화려하고 바쁜 만큼 집사람의 아픔은 컸지요. 지금도 그게 너무 미안해요.
"검사와 여선생" "며느리 설움"이 어떻게 밀짚모자 장식으로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줄 아세요?
제가 죽으면 관속에 넣어주려고 집사람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신=무성영화 상설관을 세우든가, 영화필름을 복원한다든가 하는 바람이 제 힘으로 가능하겠어요? 정부차원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했던 변사해설을 양식화하고 보존.개발해야죠. 인간문화재처럼 말예요. 일본에선 변사들이 20∼30명의 제자들을 키우는데 이 땅에선 저 죽으면 끝이에요.
눈감기 전에 무성영화를 살릴 수 있는 작은 불씨 하나라도 지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정리 유인화.사진 박민규기자rhew@kyunghyang.com

허름해서 더 그리운 전설의 시대 그의 입담은 변사답게 장황하며 걸출하다.
어떤 질문에도 어김없이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특히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있고 정이 있고, 허름해서 더 그리운 그 무엇들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신 꼬마가 극장에서 식음료를 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살기 위해서, 삶을 돌보기 위해서 얼마나 명랑하고 부지런하게 극장 안팎을 둘러 보았겠는가.
열네살에 문제없다며 당차게 무대에 올라 "아리랑"을 해냈던 그 꼬마가 이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설적인 변사로 우리 곁에 있으니 명랑하게 신비하다. - 윤석화-

4 Comments
mulim1672 2006.09.09 16:53  
신출 씨! 방송에 나와 그 걸축한 목소리로 해설하시던 그분이군요.
fabiano 2006.09.09 16:56  
옛적, 꼬마였던 그 시절에 부산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참, 멋지게 하던 생각이...
어여쁜 나 2017.03.28 09:48  
북한의 아나운서(문화어 방송원)들도 공연실황때 사회볼때도 완전 우리나라 변사들이 말하는것과 똑같애요~!!!!
fabiano 2017.03.28 21:48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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