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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팜탄의 참상 - 6.25 전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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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네이팜탄] 네이팜탄은 어떤 무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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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2월 4일 네이팜탄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여성 3명이 경기도 수원 근처 진료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네이팜탄의 유래는 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은 휘발유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지나치게 빨리 연소돼 기대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연소속도를 늦출 필요성이 제기됐다.

미국 정부가 돈을 대고 하버드대학 과학자들과 미군화학부대가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2년 젤리형태의 휘발유를 만들어냈다. 휘발유에 나프텐(naphthene)과 팔미테이트(palmitate) 등 성분을 혼합해 점성을 높이면서 연소속도를 크게 늦춘 것이다. 두 물질의 첫 음절을 따 네이팜(na-palm)이라고 이름 붙였다.

50년 10월 12일 미 극동공군사령부 보고서에 따르면, 미 제5공군은 50년 10월께 한반도에서 인민군 T-34 탱크를 놓고 네이팜탄의 파괴력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네이팜탄 45kg 들이 한발이 길이 80m,폭 24m 가량의 장방형 면적을 불태웠다. 또 1,500℃의 고열을 방출하면서 피폭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네이팜탄은 목표물을 직접 태울 뿐만 아니라 주변 산소를 고갈시키고 유독가스를 배출해 동굴 등 밀폐된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직접 노출되지 않더라도 질식하게 한다. 또 특유의 점성으로 인해 인체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만질 경우 오히려 만진 손으로 옮겨 붙는 잔인한 특성을 지닌다. 강한 점성과 고열은 시신의 뼈까지 태워버려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충북 단양에서 네이팜탄에 노출된 시신 대부분이 크게 훼손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네이팜탄] 얼마나 투하했나?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네이팜탄을 3만2천여t이나 투하한 사실이 본보 취재를 통해 밝혀졌다. 한국전쟁 당시 네이팜탄 사용에 대해 구체적 실체가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미군의 무차별적인 네이팜탄 사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실이 공식 확인됨에 따라 네이팜탄 사용 전반에 대한 정부차원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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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5월 한국전쟁에서 300만 갤런 째 네이팜탄 투하를 기념하며 찍은 사진. 중앙이 제5공군 제8전투폭격단 사령관 그룸블스 중령(Wilbur J. Grumbles)이고 오른쪽이 조종사 체널트(Charles J. Chenault) 대위.
본보가 미국 NARA에서 입수한 CIA의 1966년 '베트남전을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이란 보고서에는,한국전 당시 네이팜탄 사용량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이 보고서는 그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CIA가 베트남전 개전 직후 한국전 때 미 공군작전의 장ㆍ단점을 종합 분석해 이를 베트남전에 활용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네이팜탄 이외에도 일반 폭탄과 로켓 사용량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으며,이들 무기를 이용해 파괴한 목표물에 대한 상세한 내역까지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한국전쟁에서 사용된 네이팜탄의 양은 총 3만2천357t이다. 그리고 그중 4천204t이 51년 8월부터 52년 6월 사이에 전개된 '질식작전'(operation strangle)때 사용됐다.

질식작전이란 미국이 51년 7월 북한과 첫 정전회담을 가진 이래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 마다 북한지역에 가한 융단폭격으로,당시 미 공군은 한 달 평균 900회 가량 출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네이팜탄 총사용량 가운데 직접적인 폭격이 아닌 보급선 차단 등을 통한 군사행동 저지나 정찰임무 수행을 위해 사용한 양이 3천815t(질식작전 2천192t)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CIA 보고서는 그러나 한국전쟁과 비교대상으로 설정한 65년 2월부터 같은 해 12월 사이 북베트남에서 전개된 '롤링 썬더' 작전(Rolling Thunder)에서 사용된 네이팜탄 총량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해당기간 롤링 썬더에서 군사행동저지 등을 위해 사용된 양이 3만4천261t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롤링 썬더 작전은 미국이 64년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군 경비정에 의해 구축함이 공격을 받자 북베트남의 전의를 꺾을 목적에서 감행한 전략폭격으로,미 공군 역사상 최대작전으로 일컬어진다.

 ◇ 네이팜탄 사용량 비교

 

50.6~53.7

51.8~52.6
(질식작전)

북베트남
(롤링썬더)

총량

32,357

4,204

 

군사행동저지

3,815 

2,192

34,261

 (단위:t)





폭격후 북진하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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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3일 187공수연대전투단 소속 미군이 충북 단양에서 불에 탄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 본보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입수한 사진이다. 

















네이팜탄 참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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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네이팜탄] 생존자 엄한원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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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계굴에 폭격이 시작됐을 때 엄한원 씨(81·단양군 영춘면 상2리·사진)는 굴 밖에서 친구 10여명과 놀고 있었다.

그는 전투기가 달려드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이다.

"어찌나 낮게 날던지, 그대로 굴 안으로 빨려들 것 같았습니다."

엄 씨는 친구 10여 명과 굴속으로 뛰어들었다.

"냉기를 피해 굴 바닥에 깔아두었던 짚더미에 불이 붙고, 유독가스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엄 씨는 20여분 만에 굴 밖으로 뛰쳐나와 밭 배수로를 향해 달렸다.

"땔감이 없어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어버렸던 시절이라 도대체 불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흙바닥이 타고 있지 뭡니까. 유황처럼 끈적이는 것이, 손에 묻으면 불이 붙었어요."

엄 씨와 함께 굴속으로 들어간 친구 10여 명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엄 씨는 친구들 이외에도 동생 다섯과 어머니 등 일가 친척 11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들 모두가 굴속에 남아있다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바위로 된 굴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숨을 참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나만 이렇게 살아 남았습니다."




[한국전쟁과 네이팜탄-화보] 충북 단양 곡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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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20일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365명이 숨진 충북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 앞에서 조병우(64) 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네이팜탄] 생존자 안식모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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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모씨가 산성리 폭격 당시 마을에 떨어진 포탄 철판조각과 탄환을 들어보이고 있다.
"경고? 경고는 무슨 경고! 절대 그런 거 없었어."

안식모(76) 씨 등 산성리 주민들은 미군 폭격에 앞서 어떠한 경고도 받지 않았다고 조사보고서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안 씨는 "학가산 너머 신전리에는 인민군이 머물렀지만 이곳 산성리에는 인민군이 단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폭격 전날 해질 무렵 한국군 1개 소대가 마을로 와서 그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함께 경계근무까지 섰단 말이야."

안 씨는 폭격이 있던 날 아침 국군이 마을을 떠나면서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경계근무를 서면서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경찰지서에 신고하라는 주의까지 주고 갔다며 산성리가 폭격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국군이 시키는 대로 19일 오전 경계근무를 서고 점심 때 집으로 돌아와 막 숟가락을 드는데 '쾅'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 불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마을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는데…채 5분이 안 걸렸어."

안 씨는 이웃집에서 파놓은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폭격이 끝난 뒤 그는 명주를 짜다 정수리에 총탄을 맞은 어머니를 들쳐업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어머니가 크게 다쳐 움직일 수 없었던 한 사람만 빼고 마을 사람 전부가 달아났어. 애·어른 할 것 없이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시신 수습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까마귀만 들끓는 마을에선 며칠 동안이나 연기가 치솟았다.

"사흘 뒤 마을에 돌아와 보니 불에 탄 시신이 온통 널부러져 있고,친구 집에 놀러갔던 여섯 살짜리 막내 여동생은 벽에 기대 선채로 시커멓게 타버린거야. 불에 타 오그라든 시신은 돌로 때려 펼 수밖에 없었지."

안 씨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동네 사람 중 절반 가량이 마을을 버리고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


4 Comments
햇빛(안연식) 2006.09.08 00:35  
이런 산 역사를 아직도 믿지 않고 북한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이 정치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 정말 큰일 입니다...
bae21c 2006.09.08 00:56  
쥐길 넘들 같으니... 온갖 만행을 저지른 건 알량한 우유와 밀가루 그리고 쵸코에 묻혀서 마치 우리를 구원한 은인처럼 오만함을 누리다니... 맥아더가 정녕 평화유지군인가? 점령자인가?
fabiano 2006.09.08 07:12  
bae21c님, 이 카테고리에 일본의 만행 기록물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갖가지 만행을 저질러 놓고 뻔뻔한 행위를 지금도 아니  먼 훗날까지도 반성하지 않고 그렇게 갈겁니다. 역사는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당시 미국의 경우,모든 면을 종합하여 볼 때 과오가 없지않으나 이 땅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이 정도의 국력을 가진 것도 미국의 도움이 컸음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비판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전쟁의 모순이 당시 한국전쟁때에 비껴가지 못한 비극입니다. 우리도 월남전에서 비극과 모순을.
fabiano 2006.09.08 07:15  
전쟁의 비극을 잘 아는 강 거시기란 작자도 저런 사고방식이니...제자들이...외국에서 조차도 Reds(빨갱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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