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北에서 본 신상옥 감독의 영화
fabiano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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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08:46
[탈북자들] 북한영화 첫 키스장면…관객들 "와~" 탄성
북한영화 "철길따라 천만리"
신상옥 감독이 4월11일 세상을 떠났다.
신 감독의 부고에 접한 탈북자들도 ‘한국영화의 큰별이 졌다’는 애도를 표한다.
그 역시 납치와 탈북이라는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경험한 '탈북자'여서 그런지 모른다.
신 감독은 남한사람뿐 아니라 북한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아마 신 감독의 부고에 애도를 표할 북한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북한에서 만든 그의 영화는 메마른 북한사람들의 가슴에 사랑과 감정을 심어준 활력소와 같았다.
신감독이 북한영화예술에 준 영향은 대단했다.
신감독의 북한 데뷔작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보았을 때 나는 ‘이제야 영화 같은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다.
당시 계급교양, 혁명교양 선전 영화가 태반이던 북한영화는 생동감이 떨어지고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신감독의 영화는 경탄 그 자체였다.
신감독 영화보면 다른 영화 못봐
신 감독과 최은희씨가 북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3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서구풍의 차림에 상냥한 서울말씨를 쓰는 두 사람이 TV에 나와 '월북 동기'(한참 나중에야 납치인지 알았다)를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TV를 에워싸고 “저 사람들은 남조선에서 온 영화 연출가(감독)들"이라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북한당국은 78년에 월북했다고 했는데,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었다.
월북한 후 금방 TV에 출연하는 일반 '월북자'(이 역시 대부분 납북자)들에 비해 상당히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신감독은 TV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데뷔작으로 김정일의 방침을 받아 ‘신필림’ 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정일로부터 많은 영화를 만들어 줄것을 주문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는 조선영화촬영소와 '2.8 영화촬영소'가 있었다.
조선영화촬영소는 사회교양 소재의 영화를 찍었고, 2.8 영화촬영소는 전쟁영화를 주로 찍었다.
이후 신감독은 ‘탈출기’ ‘심청전’ ‘홍길동’ ‘철길을 따라 천만리’ ‘소금’ ‘불가사리’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등.....
불과 3년 사이에 역사물과 사랑을 다룬 영화들을 대거 선보였다.
신필림 영화가 나오면서 다른 영화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북에서도 촬영기 메고 뒹군 영화광
신감독은 불철주야로 영화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신필림을 아주 사랑했다.
신필림 영화가 개봉되는 날, 평양시내 '개선영화관'과 '전승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표를 사기 위해 젊은이들은 여러 명이 목마를 태워 매표구를 향해 결사적으로 돌진했다.
표를 사지 못할 경우, 3~4배 비싼 암표를 구했다.
영화관 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표를 사는 바람이 불어 영화관 직원이 인기직종으로 떠올랐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신 감독은 틀에 박힌 북한 영화를 대담히 깨고,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철길을 따라 천만리’를 촬영할 때 그는 생동한 장면을 찍기 위해 촬영기를 메고 레일 위를 뒹굴 만큼 ‘촬영광’이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신감독은 장르 선택에서도 "남한사람, 북한사람 모두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해 계급성을 취급하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춘향전’을 각색한 ‘사랑사랑 내사랑’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사랑 내사랑’은 오랫동안 속박에 찌들렸던 주민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녹였다.
늙은이들마저 ‘사랑사랑 내사랑’을 흥얼거렸다.
영화 한편으로 북한사람들의 눈을 확 잡은 장면도 있었다.
‘사랑 사랑 내사랑’에는 이몽룡이 성춘향의 저고리 고름을 푸는 아찔한 장면이 나오고, ‘철길을 따라 천만리’에는
북한영화사상 처음으로 키스 장면이 나온다
숨을 죽이고 영화를 보던 관객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이 튀어 나왔다.
당시 북한영화의 연애장면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얼굴을 붉힐 만큼 촌스러웠다.
당시 북한은 이른바 자본주의 침습을 우려해 사랑과 관련한 영화를 찍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들은 영화문학을 써도 당 정책에 어긋날까봐 감히 손대지 못했다.
훗날 신감독의 영화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신감독은 "사랑은 인간의 최고 예술"이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영화를 상업목적에 이용하는 자본가"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속박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감독 부부가 서방세계로 망명한 후 북한에 그를 대체할 만한 감독이 나오지 않았다.
신감독님, 부디 고히 잠드소서...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북한영화 "철길따라 천만리"
신상옥 감독이 4월11일 세상을 떠났다.
신 감독의 부고에 접한 탈북자들도 ‘한국영화의 큰별이 졌다’는 애도를 표한다.
그 역시 납치와 탈북이라는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경험한 '탈북자'여서 그런지 모른다.
신 감독은 남한사람뿐 아니라 북한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아마 신 감독의 부고에 애도를 표할 북한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북한에서 만든 그의 영화는 메마른 북한사람들의 가슴에 사랑과 감정을 심어준 활력소와 같았다.
신감독이 북한영화예술에 준 영향은 대단했다.
신감독의 북한 데뷔작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보았을 때 나는 ‘이제야 영화 같은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다.
당시 계급교양, 혁명교양 선전 영화가 태반이던 북한영화는 생동감이 떨어지고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신감독의 영화는 경탄 그 자체였다.
신감독 영화보면 다른 영화 못봐
신 감독과 최은희씨가 북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3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서구풍의 차림에 상냥한 서울말씨를 쓰는 두 사람이 TV에 나와 '월북 동기'(한참 나중에야 납치인지 알았다)를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TV를 에워싸고 “저 사람들은 남조선에서 온 영화 연출가(감독)들"이라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북한당국은 78년에 월북했다고 했는데,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었다.
월북한 후 금방 TV에 출연하는 일반 '월북자'(이 역시 대부분 납북자)들에 비해 상당히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신감독은 TV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데뷔작으로 김정일의 방침을 받아 ‘신필림’ 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정일로부터 많은 영화를 만들어 줄것을 주문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는 조선영화촬영소와 '2.8 영화촬영소'가 있었다.
조선영화촬영소는 사회교양 소재의 영화를 찍었고, 2.8 영화촬영소는 전쟁영화를 주로 찍었다.
이후 신감독은 ‘탈출기’ ‘심청전’ ‘홍길동’ ‘철길을 따라 천만리’ ‘소금’ ‘불가사리’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등.....
불과 3년 사이에 역사물과 사랑을 다룬 영화들을 대거 선보였다.
신필림 영화가 나오면서 다른 영화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북에서도 촬영기 메고 뒹군 영화광
신감독은 불철주야로 영화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신필림을 아주 사랑했다.
신필림 영화가 개봉되는 날, 평양시내 '개선영화관'과 '전승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표를 사기 위해 젊은이들은 여러 명이 목마를 태워 매표구를 향해 결사적으로 돌진했다.
표를 사지 못할 경우, 3~4배 비싼 암표를 구했다.
영화관 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표를 사는 바람이 불어 영화관 직원이 인기직종으로 떠올랐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신 감독은 틀에 박힌 북한 영화를 대담히 깨고,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철길을 따라 천만리’를 촬영할 때 그는 생동한 장면을 찍기 위해 촬영기를 메고 레일 위를 뒹굴 만큼 ‘촬영광’이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신감독은 장르 선택에서도 "남한사람, 북한사람 모두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해 계급성을 취급하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춘향전’을 각색한 ‘사랑사랑 내사랑’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사랑 내사랑’은 오랫동안 속박에 찌들렸던 주민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녹였다.
늙은이들마저 ‘사랑사랑 내사랑’을 흥얼거렸다.
영화 한편으로 북한사람들의 눈을 확 잡은 장면도 있었다.
‘사랑 사랑 내사랑’에는 이몽룡이 성춘향의 저고리 고름을 푸는 아찔한 장면이 나오고, ‘철길을 따라 천만리’에는
북한영화사상 처음으로 키스 장면이 나온다
숨을 죽이고 영화를 보던 관객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이 튀어 나왔다.
당시 북한영화의 연애장면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얼굴을 붉힐 만큼 촌스러웠다.
당시 북한은 이른바 자본주의 침습을 우려해 사랑과 관련한 영화를 찍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들은 영화문학을 써도 당 정책에 어긋날까봐 감히 손대지 못했다.
훗날 신감독의 영화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신감독은 "사랑은 인간의 최고 예술"이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영화를 상업목적에 이용하는 자본가"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속박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감독 부부가 서방세계로 망명한 후 북한에 그를 대체할 만한 감독이 나오지 않았다.
신감독님, 부디 고히 잠드소서...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