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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8·18 도끼만행 사건' 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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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2005년 8월 20일자 코나스에 게재됐던 기사입니다. 오늘(18일) 8·18판문점 도끼만행사건 3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진실을 다시한번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지난해 기사를 그대로 올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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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당시의 상항을 미군측에서 촬영한 사진. 문제의 미루나무 아래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미군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8·18 도끼만행 사건' 의 진실, 북한의 생떼
 - 北 '미국이 일으킨 사건', 賊反荷杖에 우리정부는 침묵-

 18일 오전 서울 용산 미 8군 영내에서는 '8·18 도끼만행사건'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퇴역 장병들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에 헌화를 했다. '8·18 도끼만행사건'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미군 2명이 살해된 사건이지만, 북한은 사건 발생 29주년이 되는 18일 평양방송을 통해 " 1976년 8월18일 판문점사건은 미국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적반하장(賊反荷杖)식 주장을 또다시 되풀이 했다.

 북한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히고, 남북 분단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친북학자들에게 경종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 사건의 진실을 다시 정리한다.

 8·18 도끼만행 사건은 북한군에 의해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된 사건

 1976년 8월 18일은 북한군에 의해 미군 2명이 살해되면서 한반도의 전쟁기운이 최고조로 달아올랐던 날이었다.

 이날 오전 10시경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당시 UN군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약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고, 북한군에 의한 미군의 납치를 우려하여 이날 가지치기 작업을 수행한 것이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15명의 사병을 인솔하고 나타나 미군측에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11시경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몽둥이와 UN군측 노무자들이 나무 밑에 두었던 도끼 등을 휘두르며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바레트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명, 한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휴전협정 조인 이후 23년만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한반도는 즉각 긴장상태로 달아올랐다. UN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던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3(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하고, 미군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 때에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까지 올라갔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로 인민군과 예비군격인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북풍 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긴급참모회의를 열고, '워싱턴특별대책반'을 구성하여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고, 1976년 8월 21일 아침 7시에 강력한 무력시위를 동반하여 전격 단행되었다.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는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한국군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투입되었고, 1사단 수색대도 참여하였다. 당시 특전사 장병들은 카투사병으로 위장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담당하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무력시위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까지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에는 "도발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루나무가 절단되기까지 북한군은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었고, 한국군과 미군은 미루나무 뿐만 아니라 공동경비구역 안의 북한군 제5·6·7·8초소를 파괴해 버렸다.

 작전 종결후 북한은 긴급 군사정전위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북한의 유감표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만에 이를 수락하였다.

 이후 북한군과 UN군사령부는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 제446차 비서장회의에서 판문점 '공동경비'를 군사분계선에 따라 '분할경비'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또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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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산역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친필사인이 된 철로 목책이 전시되어 있고 연설문 전문도 게시되어 있다.

 2002년 2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경의선 복원 현장인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직전, 서부전선 미군부대를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북한의 터무니 없는 침략이나 세계평화를 깨는 행위에 대해선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연설을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날 부시 미 대통령이 방문한 부대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북한의 경비병들에게 살해당한 두 미군 장교들 중 한명인 아더 G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 딴 '보니파스부대'였다는 것이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불과 100m 떨어진 미군부대 초소에서 이날 부시 대통령이 한 말은 매우 인상적이였다. 북쪽 건너편 '평화박물관'을 바라보는 부시 대통령에게 미군 부대장이 "저곳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북한군이 사용했던 도끼가 전시돼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내가 저들을 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혀 잘못이 아니었군(No wonder I think they're evil)"이라고 했다.

 현장을 지켜봤던 증인들의 회고

 전세계를 전율케 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북한군의 만행을 지켜 봐야했던 곽희환(사건당시 41세,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씨는 지난 1999년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어느덧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잔악한 북한군의 만행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 몸이 떨려옵니다"라며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닙다. 야수만도 못한 게 바로 저들입니다"라고 회고했다.

 1960년 제대하자 마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노무자로 취직한 곽씨는 당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하던 노무자 5명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우리 작업반의 도끼를 빼앗아가 인솔책임자인 미군 보니파스 대위의 머리를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북측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적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북한군입니다."

 그후 20여년동안 노무자로 근무했지만 곽씨는 당시의 충격으로 심장병과 당뇨를 얻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특전사 여단장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참여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작전시간 2시간 30분 동안 목숨을 걸고 용맹함을 보인 특전용사들의 민첩하고 과감했던 작전수행은 한편의 입체적인 드라마였다"고 회고하며 "만약 당시 북한군이 경계선을 침범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고 잔인한 보복을 가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전 총장은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한 바 있다.

 북한은 '미군이 일으킨 사건'으로 생떼..

 사실이 이러한데도 북한은 엉뚱하게도 미군이 일으킨 사건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6.25를 미군에 의한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생떼'다.

 북한 평양방송은 사건 발생 29주년이 되는 18일 '응당한 징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1976년 8월18일 판문점사건은 미국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며 사건발생의 원인과 관련, "판문점 사건은 대형 화물자동차를 타고 온 10여 명의 미제 침략군이 판문교 부근에 들이닥쳐 우리측 인민군 초소 앞에 있는 나무를 무작정 찍으려고 덤벼든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날 정상적인 순찰근무를 수행하던 우리(북)측 경비인원들은 적들의 도발행위를 단호히 저지시켰다"면서 "그러자 미제 침략꾼들이 오히려 저들의 수적 우세를 믿고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왔던 도끼와 몽둥이를 마구 휘둘러 대면서 우리측 경비인원에게 달려들어 야수적인 폭행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방송은 "부득이 자위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측 경비인원들은 적들에게 보복의 타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방송은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이 사건이 미제 침략자들이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데 있다"면서 "미제는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촬영 준비를 해 두었다가 저들에게 유리하게 찍은 사진자료를 보도하면서 진상을 왜곡해 만든 그 무슨 서한이라는 것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해 공식문건으로 배포하도록 요청하는 놀음을 벌였다"고 말했다.

 또 "남조선 미군부대에 비상대기령을 내려 이른바 전투태세에 들어가게 했다"면서 "오키나와와 미국 본토로부터 F-4 초음속 비행기와 F-111 전투폭격기를 남조선에 끌어들이고 핵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주축으로 하는 미 제7함대의 기동타격 함대와 오키나와에서 1천800여 명의 해병대를 끌어들였다"고 밝혔다.

 평양방송은 "판문점사건을 통해 우리 군대와 인민은 침략자들의 그 어떤 모략사건도, 도발행위도 우리한테는 절대로 통하지 않으며 도발자들은 징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미제에게 다시금 똑똑히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평양방송은 사건발생 직후 김일성이 사과의 뜻을 담아 낸 '유감성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일언반구 말이 없기는 우리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가 전쟁위기 직전까지 다달았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지 29주년이 되는 18일,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거나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정부 기관이나 시민단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미 8군 영내에서 미군들만 참석한 조촐한 추모식이 있었을 뿐이다.

 남과 북이 어우러져 '민족공조' '미군철거'를 외치며 서울에서 4일 동안 함께 치룬 광복 60주년 잔치판의 취기(醉氣)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정부의 안보관련 부처 책임자들 만이라도 빨리 그 취기에서 깨어나길 바란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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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서울 용산 미 8군 영내에서 열린 8.18 도끼만행사건 추모식에 참가한 퇴역 장병들이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에 헌화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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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경비구역(JSA) 인근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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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SA내 제3초소에서 바라본 전망. 왼편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유엔사 관할 초소와 북측 초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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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지켜보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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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더 G 보니파스 대위를 공격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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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미루나무 도끼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들의 추모비.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의 남측 지역에 있다.

 김 철 기자 konasnet@korva.or.kr

2006-08-18 오후 12:08:33 입력
2 Comments
햇빛(안연식) 2006.08.19 17:20  
저 그림을 보니 오래전에 직장 후배가 저 현장에서 통신병으로 근무 햿었는데 그 때 살아남은 병사들 모두에게 그 때 배어낸 미루나무로 기념패를 하나씩 만들어 보여주던 생각이 납니다. 이처럼 살벌한 현실인 것을 전후 세대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원.....
fabiano 2006.08.19 17:55  
지금 작통권 얘기하는 인사나 친북좌파들은 이 기록물을 보고도 생떼를 쓸겁니다. 그저 저런 넘들은 몽땅 북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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