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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그때 그 시절

fabiano 18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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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밑에 釜山의 地名의 유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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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釜山 地名 유래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부산(富山)

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

(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東萊富山浦"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

에도 "東萊之富山浦"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

(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6)』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 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
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
이 나오고, 그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도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 개운포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
었다"라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사
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편찬 이전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
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355년 전인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되도록 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해수에 임하여 열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부산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구 수정동
으로 부터 산을 넘어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하고 「부산호장소
(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 감
(枾, 嶺) 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 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 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도 하
는데 시루〔甑〕와 가마 〔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
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
의 산은 옛날부터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 Comments
도돌돌 2006.07.31 08:44  
구경 잘했습니다.
fabiano 2006.07.31 09:13  
돌님, 구경  잘했으면 관람료도 내셔야지....
구포다리 2006.08.24 18:48  
제일 위의 사진은 60년대  후반 전포동에 있는 '부산 시립 도서관'의 내부 모습같아요.내가 당시 여름방학이면 그 도서관을 이용한바 책 걸상이나 브라인더가  눈에 익은듯도 하여이다.도서관 부근에 육군 교도소(?)인가가 있어서 오후 5시 일과가 끝나고 식당으로 줄을지어 등에는 영어로' P'짜를 쓴 군복을 입고 군인들이 행군을 할때면 부르던 군가가 '원수야 오랑케야 어서 빨리 물러나라 두손들어라...' 이런 가사인데 허구헌날 같은 군가라서 내가 군에도 가기도 전에  이 군가 가사는 모두 외었다우.
구포다리 2006.08.24 18:56  
네번째 사진은 옛 조방(조선방직)자리에서 당시 무슨 우량품 전시회인가가 열렸던 사진 같군요.금성사나 럭키 (현재 LG의 전신)의 간판과 동일화학,백설표의 제일제당,  미원간판이 보이는걸 봐서.....10번째가 이 전시회의 내부사진 안가봐요..동산유지의 세수비누 제품이 전시되어 있네요. 그때의 라디오 광고먼트가  '당신의 비누 다이알......'이었지 아마도.
구포다리 2006.08.24 19:10  
12번째 사진은 광복동 미화당 백화점이고요. 이 건물은 일제때 건물로서 해방뒤 백화점으로 이용되었으며 서울에는 화신백화점, 부산에는 미화당백화점이 았었지요.  뒷쪽으로는  부산의 상징 용두산 공원이 보이네요.'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발올려 맹세하고 두발올려 언약하던 한계단 두계단 일백구사계단에........'용두산엘레지의 노랫말 가사의 내용으로 미화당백화점에서 용두산 올라가는 계단에서의 추억들이 새롭네요..
구포다리 2006.08.24 19:21  
2번째 사진은 광복동 입구. 부산시청앞 로타리에서 바라본 사진이네요. 입구에 동보사 시계점이 보이는데 당시 MBC라디오에서 12시 정오를 알릴때의 광고먼트 '동보사 시계점 제공 12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 땡..'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전설. 그리고 그 옆의 만우 양복점이나 신세계 와이셔츠는 부산의 내 노라는 한량들(?)이나 들락거리던 고급맞춤집으로 당시 라디오 광고도 꽤나 하였지요.그리고 당시에 제일모직 보담도 더 고급스런 모직회사로는 하마정에 있던 해동모직으로서 이 회사는 조그마한 가내 수공업적인 규모였어도 그 품질은 제일모직을 앞지를 정도로 라디오 광고에서 '삼삼삼표 해동모직'이라고 꽤나 알려졌던 회사였으나 지금은 이름도 없어졌다지 아마...
구포다리 2006.08.24 19:31  
6번째 사진은 왼쪽이 중앙동 부산 중부경찰서와 오른쪽은 부산(?) 소방서 사진이며 사진 정면은 영주동이나 초량쪽.  소방서 이름은 부산 소방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시청방향으로 가다보면 옛 부산 본역(지금의 부산역이 아님 . 당시는 시내에만도 부산진,초량 ,부산 본역 이렇게 3개의 열차역이 있었음)못미쳐 왼쪽의 소방서 사진이 분명합니다.  6 25후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노래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 나오는 부산역의 시발점은 부산 본역이었다우.
구포다리 2006.08.24 19:54  
14번째는 중앙동의 대한통운 건물.  당시는 민영화되지 않았던 국영기업체 시절이라  마루보시(대한통운의 마크가 원 내에 마름모여서 일제때 부터 그렇게 불렀음)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다우.  비료나 밀가루등의  모든 관급물자의 운송은 철도를 통하여 이루어 지다 보니 마루보시 출신의 역두 인부들의 위세는 특히나 일자리가 없던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우.
fabiano 2006.08.24 19:55  
구포다리님께서 살아 계시는 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십니다. 지도 그 시절의 생각이 아련히 납니다. 삼일극장,삼성극장,동보,태평극장이 생각나는데 그 시절에 태평극장은 완전 창고형인데 시설도 무척 낙후된 모습에 비가 새는 모양새도..지금도 있는 하야리야부대는 그 시절엔 변두리였었고...범냇골 살 적에 불장난하다 불내고 줄행랑 치던 기억, 붕개해수욕장의 추억..
fabiano 2006.08.24 20:00  
제가 올린 에 대해서 구포다리님께서 아시는 대로 댓글 다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누군가가 보아도 아,그렇군 소리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며....
fabiano 2006.08.24 20:02  
마루보시라고 불린 통운의 일개 인부들도 위세가 제법이었지요....
fabiano 2006.08.24 20:05  
부산진역,초량역,부산역이 시내에 있어 저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산진국교에 다니다 집 가까이에 범천국교가 생기는 바람에 그리 전학갔지요.
구포다리 2006.08.24 20:06  
fabiano님의 기억속의 극장들은 범냇골이나 서면쪽의 극장으로서 특히나 태평시네마는 태평창고라고들 불렀지요.  극장 뒷쪽은 지린내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부전역 위의 물탱크 건너편으로 색씨 골목을 끼고 있었던 걸로 기억이  소록소록....
fabiano 2006.08.24 21:04  
그 시절, 그러니까 50년대 중반이나 후반쯤에 태평극장에서 를 본 기억이...지린내를 넘어서 찌린내가 코를 찌른 기억도 납니다.  ㅎㅎㅎ
구포다리 2006.08.25 19:50  
18번째 사진은 동광동 안골목 사진인가봐요.  66년도인가 부터  월남장병들은  그 집에다 '파월장병의 집'이란 깃발을 달고는 햇었지요.
구포다리 2006.08.25 19:55  
15번째 사진은 부산시청옆에 있는 제5육군병원 옥상에서 찍은 길 건너편의 모습.대선종묘농약사 간판이 보이네요.  당시 김해나 울산 마산 등지에서도 벼 멸구약이나 도열병 약들을  사러  이곳에  모여있던 농약상들을 이용하곤 하였지요.
fabiano 2006.08.25 21:06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열차타고 부산에 가니 정든 고향에 온 기분이 삼삼하였지요. 한참동안 추억에 젖어보고...살던 그곳에도 가보았지만 몰라보게 달라졌으니...어쨌던 차창가에 스쳐 지나가는 구포다리도 눈에 삼삼했습니다. 기억력도 좋습니다.
brimpond 2009.12.05 22:10  
아 옛날 미화당 백화점이 저렇게 생겼군요. 여러번 불이났지만, 내가 기억하는 미화당 뒷길은 용두산(우남)공원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있었죠.3번째 사진은 시청(16번째 사진) 맞은 편의 부산 데파트 신축사진 이군요. 어머니가 70년대중반에 시청에서 부산데파트로 연결되는 2층에서 장사를 하셨는 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월남파병 군가가의 멜로디가 아직 귀에 생생합니다. (맹호 부대 용사들아~). 부전동 시립 도서관도 기억 납니다. (저는 70년 중반에 가 봤습니다만. 일요일날 일찍 안가면 자리 없었죠.) 옛날사진 감사합니다. 토성국민학교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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