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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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釜山 地名 유래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부산(富山)
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
(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東萊富山浦"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
에도 "東萊之富山浦"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
(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6)』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 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
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
이 나오고, 그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도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 개운포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
었다"라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사
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편찬 이전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
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355년 전인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되도록 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해수에 임하여 열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부산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구 수정동
으로 부터 산을 넘어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하고 「부산호장소
(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 감
(枾, 嶺) 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 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 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도 하
는데 시루〔甑〕와 가마 〔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
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
의 산은 옛날부터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