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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갈보 누나와 굶어 죽은 판사

파비아노 0 1974  

양깔보 누나와  굶어 죽은 판사


1947.8.27일, 33세의 일본 도꾜 지방법원 경제담당 판사 山口良忠(야마구찌 요시다다)가 

재판을 끝내고 법원 계단에 쓰러저 죽었다. 아사(餓死)였다.


패전 일본은 극도의 식량부족으로 식량 배급제를 실시했고 부족한 식량은 

암시장의 거래에 의존하여 연명하던  아사자 속출시대였다. 

젊은 판사는 매일매일 배급제를 위반한 경제사범을 판결하면서 

암거래 금지 원칙을 지키다보니 본인은 영양실조에 의해 아사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일곱살 때 6.25 부산 피난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어 뇌리에 남았고  

그 판사의 신상은 인터넷 시대가 된후 찾아 알게 되었다.


 

“양갈보 누나”는  6.25 전쟁시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녔던 우리 세대의 일반 명사였다.


부산으로 피난했던 나는 피란민들의  통조림  양철 조각 지붕 촌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부산 동래로 피란했던 [서울 일신국민학교]가 나의 학교였다.

 

매일 피난민 동네인 거저리에서 부산 동래까지 학교 길 10여리를  동네 또래들과  걸어서 다녔다. 

학교를 가는 목적은 학교에 가면 점심 때  [꿀꿀이 죽]이라고 불렀던 강냉이 분유 죽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학년 첫 학기 산수(수학)시험에  나의 점수는 25점이었고 거의 동네 또래가 나와 비슷했다.


더하기는 손가락을 꼽으며 했는데 빼기는 10보다 커지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는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고  [꿀꿀이 죽]을 먹을 수 있었기에 열심히 걸어 다녔다.


 


피난민 동네 “거저리”에는 산등성이에 천막으로 지어진 유엔군 야전병원이 있었고, 

매일 헬리콥터가 여러 번 부상병들을 실어 날라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했고, 

야전병원에는 많은 동네 아줌마들이 부상병들의 빨래일로  식량을 마련했고,  

부대 주변에는 항상 예쁜 누나들이 있었고 

동네 꼬마들은  부산 아이들의 억양데로 “양깔보 누나”라고  양갈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렀다.


왜 “누나”가 붙었는지는 그 누나들이 우리가 지나가면 우리를 불러서 

사탕이나 초코레트를 나누어 주면서 “몇 살이니?  내 동생하고 같네~”라며 귀여워 해 주었기에 

“양갈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누나로 불렀다.


하루는 초코렛 하나를  받고  신이나서  “할머니  나  양갈보  누나한테 초코래트  하나 얻었다” 소리치며 할머니를 찾았다. 

무엇이든 맛있는건 할머니와 나눠먹는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는 안보이고  아버지 방문이 열리며 “ 너 이리 빨리 들어와”라는 호령에 아버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찰사닥하며  내 뺨에  따귀가 따가웠다. 

“ 너 이놈 누구한테서 그 따위 말을 배웠나???” 엉겁결에 따귀를 맞고 아 이게 나쁜 말이구나.. 

무슨 뜻도 모르면서 나쁜말을 썼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때 말씀이 “ 하여간 엽전들은 왜 이 모양들인지.. 똑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일본 사람들은 “종훈부(從訓婦: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국가의 어려움에 자신을 희생하며 

점령군이었던 미군들에게 봉사하며 생활하는 여인 이라는 뜻), 從夫女(지아비를 따르는 여성)로 부르며 

서로를 보살피는데 이 엽전( 아버지가 화가나면  우리 민도를 경멸어로 자주 썻던 표현)들은 

허구 많은 말들 중에 아주 못된 “갈보”라는 말을 쓰니… 너는 앞으로 절대 이런 말을 쓰면 안돼! 알았나?.. 


이때 또한 굶어 죽은 일본 판사 이야기도 같이 들었다.



나는 그날 저녘 내내 얼얼한 뺨을 만지며 이런 저런 생각을 곱 씹으며 잠들었다.


 


그로부터 17년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월남전장의 말단 소대장이었다.


부대의 최 말단 후임 장교였던 나는 누구나  싫어하는  보직인 [기동 타격소대장]에 부임되었다.


야자수 그늘 밑의 십자성 마크 부대로 전투사단이 아닌 군수부대라서 아주 안전하다고들 했지만 

전선이 불명확한 게릴라 전장에서 후방이란 없었고


[기동타격소대]는 각 부대에서 축출된 꼴통들로만 구성된 편제 외(外) 부대로서  

문자 그대로  비상용  기동 타격소대이니 장교든 사병이든 기피하는 부대였다.


 


독립소대로  독자적 식당을 운용하며 소대의 취사원으로  3명의 월남 여성이 지원되어 

그  3명이 모든 취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젊은  월남처녀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 영어와 불어 소통이 가능한 수준으로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치자 곧 가장 맛 있는 김치로 유명해저 

입맛 잃은 많은  장교들이 우리 소대에 와서 김치를 얻어가곤 했다.


 

내가 신경을 쓴 것은 혹 있을 수 있는 소대원과의 성적 사건의 예방에 신경을 썼다.


그들의 급여는 1968년 당시 $50/월 정도로 거의 한국군 하사급 수준으로 높았다.


그녀들을 보는 순간 나는 부산 피란 시절의 그 “누나”들을 생각했고, 

무수히 많은 동네 아줌마들이 그 야전 병원의 세탁원으로 일했던 

아득하며 아련한 6.25피난 시절기억들이  떠 올랐다.


 


월남 한 가족은 통상 한 부모 가 평균 열두명의 아이들을 낳아 한 가족이 14명 정도였다.


세명의 군무원 가족의 총수는 결국 우리 소대원의 총인원수와 대등한 42명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매주 3명중 누군가의 가족  하나는 생일을 맞이하는  셈으로  매 주당 

누군가 하나는 오후 1시나 2시에 퇴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이유는  누군가의 생일 혹은 결혼식 등등이었다.


하여 각각 전부 부모님 생일, 형제들 생일을 작성하여 내 참호 방카 벽에 붙여놓고, 

작은 선물( 과자, 고기,쌀등)을 미리 준비하고 축하 카드를 동봉하여 

퇴근 오토바이,자전거 뒤에 실려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들의 처지나 내  6.25 시절이 같았기에 그런 마음으로 대했다.


약 2개월이 지난 후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소대가 출동준비를 하면 즉각 이들이 눈치를 채고는  시키지도 않은 반찬을 더 만들어 내놓고 신경을 더 쓰곤 하였다.


 


어느날  XX호아(花) 양이  날 찾아와 혹시 어느어느 지역에 매복하면 조심해 달라고 말했다. 

그 녀는 카톨릭 계통의 여고를 졸업한 여자로 영어가 꽤 능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였고  반신 반의 하면서 참조했다.


그런 때문인지 아니면 행운이었는지 나의 기동타격소대장 8개월 부임기간중 

우리 소대원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


 


“양갈보 누나”와  “아버니의 뺨” 이 밑거름되어 만든 결실인  

월남 게릴라 전의 핵심;  “인민의 마음 얻기 전쟁”의  나의 작은 승리였다.


월남전 한국 육군 우리 소대는 “인민으로부터 사랑 받았던 군대”였다.


우리 소대뿐만 아니라 그들은 “따이한 군인”을 좋아했다.


한국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월남인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아버지들의 후손들임을 알라…


월남민 학살군? 증오를 심는 빨갱이 말에 속지 말라!!!



출처: 시스템클럽 500만 야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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