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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명영 교수가 밝힌 '김일성 회고록'의 날조와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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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명영 교수가 밝힌 '김일성 회고록'의 날조와 거짓


도태우 변호사 "김일성 회고록은 정신에 대한 전체주의 독극물이 섞인 제품과 마찬가지... 

일반적 유통 상태로 내보내는 것은 자유체제의 파괴를 용인하는 셈"



글 | 김성훈 기자    2021-05-0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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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에 출판된 이명영 교수의 저서 '金日成(김일성) 회고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 問題(문제)와 認識(인식)'.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도태우 변호사가 '세기와 더불어'의 날조와 거짓에 대해 분석한 故이명영(李命英) 교수의 연구 자료를 발췌해 5월 2일 공개했다.

이명영 교수가 2000년에 출판한 《'金日成(김일성) 회고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 問題(문제)와 認識(인식)》 (해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발행) 이다.

이 자료는 이 교수가 김일성 회고록 제3권부터 6권까지를 분석한 논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교수는 1998년에 제3, 4권을 분석한 논문(제1, 2편)을 발표했고, 1999년에 제5권을 분석한 논문(제 3편)을 내놓았다. 2000년에 제6권(제 4편)에 대한    작업을 마쳤고, 2001년에 제7, 8권을 분석하여 전권에 대한 작업을 마무리 짓고자 했으나 2000년 6월 숙환으로 별세한다.   제1, 2권에 대한 분석은 앞서 1992년 《신동아》 7월호에 발표했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회고록 제3권 제7장을 분석해 날조된 사실 5가지를 집어냈다.
▲ 동장영(童長榮)의 역할을 김일성의 역할로 바꾸어 놓음 ▲ 이영배(李英培)의 역할을 김일성의 역할로 바꾸어 놓음 ▲ 쏘베트(소비에트) 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계급혁명노선을 항일민족혁명노선으로 전환 지시한 중공당 중앙의 역할을 김일성의 공로였다고 대서특필함 ▲ 반성위(본명 리기동)를 국제당 파견원으로 둔갑시키고 그를 감복시켰다고 함으로써   김일성을 국제공산주의 운동 선상에 부상시킴 ▲ 이승만을 비하하는 거짓말

도태우 변호사는 "김일성 회고록 총 8권의 극히 일부분인 제3권 제7장에 대해 각 항목별로 고 이명영 교수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 것"이라며 "김일성 회고록은 한 권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굵직한 거짓, 조작이 5개나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공론의 세계에서 진실이 허위를 추방하자면 거짓말의 수고보다 수백, 수천 배의 노고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며       "더구나 거짓을 바로잡았을 때는 이미 자유체제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된 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도 변호사는 "김일성 회고록은 정신에 대한 전체주의 독극물이 섞인 제품과 마찬가지"라며 "일반적 유통 상태로 이를       내보내는 것은 자유체제의 파괴를 용인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잘못된 전철을 답습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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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영 교수. 사진=KBS뉴스 캡처 

이명영 교수는 1928년 3월 31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다. 그는 1966년부터 1993년까지 성균관대에서 재직했고, 30여년간 김일성을 연구한 북한 연구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이 일제 시대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이며, 일제 시대에 4인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밝힌 김일성 가짜설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김일성 열전》을 저술했다. 2000년 6월 20일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하는 도태우 변호사가 발췌 인용한 이명영 교수의 연구 결과
 
◇ 김일성 회고록 날조의 예시: 제3권(1933. 2 ~ 1935. 2) 중 제7장(1933. 2. ~ 1934. 2)의 분석
 
▲ 동장영의 역할을 김일성의 역할로 바꾸어 놓음 

동장영이란 중국인은 1931년 만주사변 당시 중공당 만주성위 동만특위 서기로 김일성보다 다섯 살 위이며 1925년에 중공당의 파견으로 일본에 유학,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까지 다녔던 사람이다. 동장영이 소집한 명월구 회의를 회고록 2권은 김일성이 소집한 회의로 둔갑시켰고 거기서의 결의들(당 중앙 및 만주성위 노선)을 김일성의 독창적 전략노선의 천명이라 날조했으며 거기서 김일성은 그 무슨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 라는 역사적인 연설까지 했을 뿐 아니라 도시 김일성은 동장영이란 사람을 쥐고 놀았다는 식으로 써놓고 있었던 것이다. 회고록 3권 제7장이 왕청유격근거지에서의 1933년의 정황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동장영의 역할을 김일성의 거짓말 역할로 바꾸어 놓고 있다.

▲ 이영배의 역할을 김일성의 역할로 바꾸어 놓음
김일성은 안도(安圖)에 가서 1932년 4월 25일에 안도반일유격대를 조직했고 그것이 만주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최초의 반일무장유격대였으며 그것이 나중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되고 그것이 해방 후엔 북한의 조선인민군으로 되었다고 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창건기념일을 (1932년) 4월 25일로 삼고 있는 터인데 중공당은 이런 일들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 중국의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의 벽면 가득히 전시되어 있는 항일유격대 조직 서열표에 따르면 1932년 4월 25일에 안도반일유격대를 조직 영도한 대장은 이영배로 되어 있지 김일성의 이름은 없다. 뿐만 아니라 안도유격대보다 앞서서 그해 3월에 왕청 유격대가 먼저 조직되었다는 것과 그 대장이 양성룡이란 것을 명시해 놓고 있다.

▲ 쏘베트 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계급혁명노선을 항일민족혁명노선으로 전환 지시한 중공당 중앙의 역할을 김일성의 공로였다고 대서특필함

회고록 3권의 제7장에서 김일성의 대단한 역할이랍시고 역설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제3절의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하는 문제이다. 동만특위 예하에서 유격대가 완전히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유격구' 또는 '쏘베트 구역‘ 이라 불렀는데 여기가 항일유격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동만특위는 여기에다 '쏘베트 정부'란 것을 세워 놓고 무차별적 토지몰수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 시책을 실시했다. 산간 오지의 '만주국' 의 행정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여러 곳에 쏘베트 정부가 1932년 가을부터 1933년 봄 사이에 섰었다. 그런데 회고록은 이 계급혁명 노선의 쏘베트 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전환시킴으로써 민족혁명노선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 김일성의 역할이며 공로였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쏘베트 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계급혁명노선을 항일민족혁명노선으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쏘베트 노선을 좌편향(左偏向) 오류로 보고 민족혁명 단계에 맞는 정권 형태로서의 인민혁명정부로의 전환을 지시한 것은 중공당 중앙이며 만주성위였지 김일성이 아니다. 

중공당 중앙은 1933년 1월 26일에 만주성위에 보낸 「만주 정세와 우리 당의 임무」란 부제가 붙은 서신을 통해 만주 정세의 특수성을 논하고 모든 항일투쟁을 민족혁명전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인민적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싸워 나갈 것을 지시했다. 만주성위는 5월에 확대회의를 열고 중앙의 「1월 서신」에 따라 종래의 쏘베트 구역 건설 및 홍군 조직 노선이 좌경 오류였다고 비로소 비판을 내리고 투쟁의 방향을 반일민족해방으로 전환키로 하여 쏘베트 정부를 인민혁명 정부로, 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해 나가기로 했다. 동만에서 이 일을 집행한 것은 동장영이다. 1933년 6월부터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항일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934년 3월 21일에 왕청현 십리평 일대에서 적과의 교전 끝에 전사했다. 회고록은 동장영을 지도한 것이 김일성이란 주객전도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 반성위를 국제당 파견원으로 둔갑시키고 그를 감복시켰다고 함으로써 김일성을 국제공산주의 운동 선상에 부상시킴
이 인민혁명정부 노선으로의 전환과 관련된 회고록 제3권 제7장의 또 하나의 큼직한 거짓말은 제4절 '국제당 파견원'이란 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1933년 4월에 동장영이 국제당(코민테른) 파견원(순시원) 반성위란 사람을 데리고 김일성에게로 왔다고 한다. 반성위의 본명은 리기동(李起東)이고 또 하나의 별명은 반경유(潘慶由, 어떤 기록엔 반경우로 나온다)인데 반성위란 별명은 그가 만주성위 위원이라 해서 그렇게 불리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일성보다는 20세가량 위였고 황포군관 학교를 나오고 북벌전쟁에 참가했으며 소련에 가서 공부도 한 유력한 노간부였다고 한다. 쏘비에트 정부 노선을 고집하는 일부 당원들이 국제당에 청원서를 보낸 것으로 해서 동만의 실정 파악 및 지도를 위해 국제당이 파견한 사람이 반성위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한 열흘 반성위와 같이 묵으면서 혁명 정세를 논하고 조선의 진로를 논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반성위는 모든 면에서 김일성을 혁명의 선배라고 해야 하겠다면서 탄복했다고 한다. 인민혁명정부로의 노선 전환이 옳다는 것을 반성위는 시인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이 1928년에 국제당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한 일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지적했을 때 반성위는 커다란 놀라움으로 동감을 표시했으며 당시엔 조선 공산주의 운동 대열에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 만한 출중한 인물이 없었고 영도 핵심이 없어서 그랬다는 데와 조선 사람이 조선의 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조선혁명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데 두 사람은 완전히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쓰고 있다. 

회고록이 힘주어 길게 길게 설명하고 있는 반성위에 관한 이야기는 김일성의 식견이 국제당 파견원을 능가했다는 것과 나아가 그것은 만주나 조선혁명에서의 김일성의 식견은 국제당을 능가했다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마치 동장영을 지도한 김일성의 역량이 중공당 중앙이나 만주성위의 역량을 능가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묘사이다. 사실 반성위는 국제당 파견원이 아니었다. 국제당이 중공당 머리 너머로 또 만주성위 머리 너머로 동만특위에까지 직접 파견원을 보낸다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규율상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며 또한 동만특위의 간부나 당원들이 직속 상부나 자기 나라 당의 중앙을 제치고 직접 국제당에다 청원을 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평생 국제당과의 관계를 가질 만한 처지에 있지 못했던 김일성은 1933년이란 시점에서 반성위를 국제당 파견원으로 둔갑시키고 그를 감복시켰다고 함으로써 자기의 위상을 국제공산주의운동 선상에 부상시킨 것으로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 이승만을 비하하는 거짓말
회고록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제당과의 연계를 모색하였으나 외면당하고 말았다고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이승만이 모스크바에 가서 거액의 재정 원조를 요구했다가 묵살당하자 반소 친미 일변도로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도 들어 있다. 이승만은 일본의 동북아 세력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 모색을 위해 1933년 7월 19일에 모스크바에 갔다가 그날로 퇴거명령을 받고 다음 날에 떠나온 일은 있다. 이유는 비자가 잘못 발급되었다는 것이었다. 국제당에 재정 원조 운운은 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다.


1 Comments
파비아노 2021.06.08 23:16  
김일성 회고록은 최악의 위조화폐, 그걸 까발린다 - 조우석 칼럼 2021.06.08 [뉴스타운TV]
https://youtu.be/psOmUR3JY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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