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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야화(明洞夜話) - 최남진 1982년도作

파비아노 2 1830  

박인환 <세월이가면> 노래가 된 詩 명동백작 中에서


명동야화(明洞夜話) - 최남진 1982년도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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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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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임응식이 촬영한 사진으로 나이 29세에 요절한 박인환(1926-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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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김성장이 신영복 민체로 쓴 것이다.
직직 갈겨서 쓴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공들여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민체는 민중체를 말한다. 민중을 지향하는 글씨체라는 의미가 있다.



'세월이 가면‘은 '신시론’과 ‘후반기’ 등 1950년대 문단의 모더니스트 그룹을 이끌던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이 쓴 시다.
이 시는 해설이 필요없는 시다. 읽는 대로 가슴에 그대로 들어와 박히는 시다.

진실로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름을 잊었다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한 '그 눈동자, 입술'이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명언이다.
그 과거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에 남아 있고,
'그 눈동자, 입술'은 서늘한 시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한 정한(情恨)을 읊은 시다.

이 시에는 소설 같은 사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지난 1956년 3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 거리 곳곳은 물론 목로주점 안에도 6․25전쟁의 상흔이 어지러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명동 뒷골목  자그마한 목로주점 은성에 시인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李眞燮), 국제신보 주필이자
소설가 송지영(宋志英) 등 몇몇은 초저녁부터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가수 겸 영화배우 나애심(羅愛心, 본명 전봉선)도 있었다.


이들이 술을 마신 목로주점은 은성이 아니라 경상도집이었다는 설도 있다.
은성이든 경상도집이든 아무러면 어떤가!
박인환과 벗들은 은성, 경상도집 외에도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 유명옥,
해방 이후 명동 인근에 최초로 문을 연 고전음악 전문 봉선화다방,
한국전쟁 이후 명동에 최초로 문을 연 모나리자다방을 즐겨 찾았다.
차와 술, 간단한 안주를 팔던 동방싸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포엠도 이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술이 거나해지자 이진섭은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하지만 나애심은 딴청만 부리고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나애심은 삶의 고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인환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박인환이 주모에게 종이 한 장을 갖다 달라고 했다.
주모에게서 받아든 누런 종이를 받아든 그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눈으로 박인환이 끄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진섭은 갑자기 정신이라도 든 듯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마치 무엇에도 홀힌 사람처럼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로 시작되는
시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박인환의 명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를 읽고 있던 이진섭의 머리에 불현듯 곡조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그려 박인환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 그리고는 나애심에게 한 번 불러보기를 청했다.
나애심은 악보를 보며 건성으로 노래를 한번 부르고는 송지영과 함께 자리를 떴다.
불멸의 대표곡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만 셈이었다.


잠시 뒤 성악가로 배우가 된 임만섭(林萬燮)과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주점으로 들어섰다.
이봉구는 당시 '명동백작'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인환과 이진섭은 늦게 온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벌칙으로
찌그러진 양은술잔에 연거푸 막걸리 대포 석 잔씩을 권했다.
이진섭이 술잔을 비운 임만섭에게 악보를 건네주었다.


몇 번이나 악보를 찬찬히 읽어보던 임만섭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슴을 울리는 그윽한 테너로 '세월이 가면'을 열창했다.
그 노래에 끌려 명동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은성’ 앞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앵콜을 연호하자 임만섭은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 다음 '세월이 가면'을 다시 한번 열창했다.


명곡 '세월이 가면'은 또 그렇게 탄생했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고 금새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사람들에게는'명동엘레지'로 알려졌다.


'은성’에서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 여인의 기일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녀왔다.
가랑잎이 나뒹구는 옛 연인의 헐벗은 묘지를 바라보던 청년 박인환의 가슴 저 밑에서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구절이 저절로 솟구쳐 올라왔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그의 첫사랑에 얽힌 애절한 추억을 피를 토하듯 써내린 가슴 아픈 정한의 시였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남긴 박인환은 며칠 뒤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 자택에서 잠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박인환은 그렇게 먼저 간 연인 곁으로 하늘나라 여행을 떠났다.
한국 모더니즘의 큰별이 진 것이다.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놀란 친구, 동료 문인들은 21일 박인환의 세종로 집으로 황망하게 모여들었다.
송지영은 그의 치뜬 눈을 감겨 주었고, 다른 친구는 그의 주검에 생전에 좋아하던 조니워커를 부었다.


박인환의 장례식인 시인장으로 치러졌다.
박인환과 함께 명동의 목로주점을 드나들던 5년 연상 친구 조병화(趙炳華) 시인은 발인 때
‘……참으로 너는 정들다 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가는구나' 하고 조시를 읊었다.
'정들다 만 애인.....'이란 표현에서 진하고 애닯은 마음이 묻어난다.
동료 문인들은 미망인의 양해를 얻어 박인환을 망우리 공동묘지 옛 연인의 묘 옆에 나란히 묻었다.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주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화 비평가, 영화 감독 장 콕토를 선망했고, 러시아의 농촌시인 세르게이 에세닌을 좋아했던
박인환은 춥고 배고픈 시절임에도 언제나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명동을 누볐던 명동신사였다.
그는 도시풍의 시를 쓰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남긴 명동의 '댄디 보이'였다.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 박인환은 그렇게 가고,
이루지 못한 그의 애절한 사랑은 '세월이 가면'이란 시로 남아 시공을 뛰어넘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마도로스파이프로 유명했던 조병화 시인도 2003년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훗날 맑고 애잔한 음색의 대중가수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을 리바이벌해서 크게 히트시켰다.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 외에도 박인환의 대표시 '목마와 숙녀'도 노래로 불렀다.
사람도 가고, 사랑도 가고, 시와 노래만 그렇게 남았다.


박인환은 해방 뒤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던 오장환(吳章煥)이 서울 낙원동에서 운영하던 서점을 인수했다.
서점 이름은 마리서사(茉莉書肆)라 지었다. 마리서사는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마리서사는 문학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으로 자리잡았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김광균과 김광주, 김기림, 오장환, 이봉구, 장만영, 정지용 등 시인들과
몇몇 소설가, ‘신시론’ 동인 김수영과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후반기’ 동인 조향과 이봉래, 화가 최재덕과 길영주 등이 드나들었다.
김수영과 박인환은 함께 어울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박인환은 국내 시인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그는 3월 17일만 되면 이상의 기일이라면서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이상의 생애와 문학을 기리며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다.
하지만 이상이 실제로 죽은 날짜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였다.  



이상(李箱)을 좋아했던 박인환은 그의 詩 <세월이 가면>을 짓고

1주일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 Comments
벤치에앉아 2020.07.30 10:48  
박인환의 어느시 중에서 " 삶이란 대중잡지 표지 처럼 통속하다."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 인상적인 시인이죠.  청순했던 옛사랑 의 그 눈동자 입술이 생각 나는 아침 입니다.
파비아노 2020.07.31 11:45  
1950년대 중반, 질곡의 그 시절에 박인환은 불후의 詩 <세월이 가면>을 남기고
1주일 후, 심장마비로세상을 떠났지만 너무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니 더욱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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