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한국전쟁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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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 <James A. Van Fleet>

파비아노 2 2058  

  한국을 위해 헌신한 James A. Van Fleet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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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1892∼1992)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쟁 후에도 그는 우리 군을 현재의 모습으로 키워내는 데 많은 기여를 했고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 미국 주요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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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밴 플리트 장군은 와해된 한국군을 미군과 함께 재편성하면서
미 육군 규정의 기준량을 5배 이상 초과하는 탄약 사용을 승인했다.


이후 미 48포병대대의 경우 하루 동안 1만2000발의 화력을 퍼붓기도 했다.
비용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50억 원을 쓴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물량 공세는 ‘밴 플리트의 탄약량’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콜린스 참모총장은 1952년 7월 1일 서신에서
“유럽 나토군이 보유하고 있던 탄약 비축량까지 줄여가며 한국에 탄약을 공급했다”고 적고 있다.
콜린스 참모총장은 “지난 4개월간 주한미군이 쓴 탄약량은 54만5000발에 달한다”며
“미 탄약공장의 생산량도 앞으로 1년 안에 매달 10만 발에서 65만 발까지 늘리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러한 결정은 미 육군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위험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중공군 개입 후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길은 화력을 강화하는 방법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본국에 소환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직책을 걸고 군 수뇌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남 소령은 “6·25전쟁 당시 아군의 전략은 초기 땅을 내어주고 시간을 버는 전략이었지만 전쟁 중반 이후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물량공세로 전환해 아군이 승기를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밴 플리트 장군의 결단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선봉 부대장을 맡았던
다양한 전투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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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계 미국인인 밴 플리트 장군은 1892년 3월 19일 뉴저지 주 코이츠빌에서 태어났다.


1893년 플로리다로 이사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26세의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지휘능력으로 그는 단 8개월 만에

부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까지 승진했다.


유럽 대륙에서 보여준 그의 탁월한 야전지휘능력을 눈여겨본 조지 마셜 미 국방장관은

맥아더 장군 해임 3일 후인 1951년 4월 14일에 밴 플리트 장군을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밴 플리트는 1953년 2월까지 22개월간 미8군 사령관 자리를 지켰다.

6·25전쟁 기간에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 중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6·25전쟁에서도 탁월한 전투지휘능력을 발휘했다.

 

밴 플리트 장군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51개 사단을 동원해 서울을 공격하는 등 1952년 4월과 5월 두 차례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 사령관은 물러서지 않고 전선을 지켜냈다.

 

이후 밴 플리트 사령관 재임 기간에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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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벤 플리트 장군의 외아들 <제임스 A. 벤 플리트 주니어> 대위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아들이 몰고 출격한 B-26 폭격기가

그날 북한 해주 부근에서 북한군의 대공포에 맞아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들은 밴 플리트 장군은 얼마 후 아들을 찾기 위한 수색작전을 중단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조치이자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 냉철한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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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도 기여했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밴 플리트는 6·25전쟁을 계기로 와해된

한국 군사학교 체제를 다시 정비하자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의 노력으로 1951년 10월 30일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됐다.

그는 국군 20개 사단을 증설하고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유학을 추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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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53년 1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2월 미 제8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생전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이라 불렀던 밴 플리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제주도에 대규모 축산목장을 만드는 데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57년에는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 결성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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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장군은 1992년 9월 23일 10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뉴욕타임스는 다음 날 실은 부고기사에서 6·25전쟁 당시 그의 부하 장교였던 사람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전했다.


“밴 플리트 대장은 그야말로 발로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창에서 장병들과 함께 뒹굴었고, 참호 속에서 지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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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A. VAN FLEET - PHOTOGRAPH SIG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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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Press Photo Gen James A. Van Fleet Gives Piggy-Ride Ride to Young Korean 



2 Comments
사랑받은자 2019.07.26 22:00  
그는 6.25 전쟁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하나뿐인 아들을 내주었군요. 참으로 훌륭한 군인이자 은인이네요.
파비아노 2019.07.26 23:36  
당시, 미국인의 위대한 힘이자, 훌륭한 장군의 한 사람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의 됨됨이를 잘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기가 찹니다. 외아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이 나라를 지켜준
미국에 대해 반미와 좌파 짓을 일삼는 개돼지들을 척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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