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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학생들의 잡지 - 학원(學園) 1952. 11. 창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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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학생들의 잡지 - 학원(學園) 1952. 11. 창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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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53년 5월, 즉 7월호부터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활판 본문 100면을 150면으로 늘리고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대폭 싣자고 했다. 사장은 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여태까지의 〈홍길동전〉·〈노틀담의 꼽추〉·〈코주부 삼국지〉의 3대 연재물에다

새로운 연재소설로 〈일곱별 소년〉(최인욱)·〈월계관〉(방춘해)·〈돈키호테〉(이원수 역)

그리고 연재만화 〈꺼꾸리군 장다리군〉(김성환)을 내세워 7대 연재물이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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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의 《홍길동전》홍길동은 학업에도 열중했지만, 무예도 능했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려고 말을 타고 무악재를 넘어 녹번리 쪽으로 힘차게 달리고 있다. 〈백낙종 그림〉

​7대 연재물이 주축이 된 내용을 본 사장은 2만부를 찍자고 했다. 6월호는 1만5천부였는데 5천을 더 찍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7월호는 반품이 거의 없이 완전 매진, 그중에서도 〈돈키호테〉와 〈꺼꾸리군 장다리군〉이 단연 화제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한더위 속에서 만지는 9월호에는 김내성 번역 탐정소설 〈검은별〉이 등장한다.
김내성은 당시 장편소설 《청춘극장》〈전5부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었는데,
《학원》이 마침내 이 〈검은별〉을 받아낸 것이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검은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기상천외의 무서운 도둑이, 평화스러운 이 거리 전체를 공포와 전율 속으로 휩쓸어 넣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넉달 전이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검은별이 반드시 있곤 하였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붙잡지 못하였다.
검은별은 아주 득의양양하게 경찰이나 신문사에 그들의 무능을 비웃는 편지를 연방 내면서
한층 더 대담하고 교묘한 수단으로 범죄를 실행하였다. ······”


삽화는 백문영(白文英)이 그렸다.



이 무렵 7월 27일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발행부수는 매달 2천, 3천이 늘면서 10월호는 3만부가 되고,

창간 1주년 기념호인 11월호는 다시 50면을 더하여 232면으로 해서 3만5천부를 발행했다.
창간 1주년에 3만5천부, 참으로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10월 열흘께, 필자는 혼자서 원고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군용열차에 딸려 있는 객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중구 양동 87번지’, 서울역이 내다보이고 남산공원 돌계단이 쳐다보이는 그러한 위치였다.
전쟁이 지나간 서울은 완전 폐허였다.
여장을 풀고 야경을 보려고 남산 돌계단에 올랐더니 100만 장안에 불빛은 간 데 없고 그야말로 암흑의 밤이었다.
혼자서 보자니 으스스했다.


서울에 오기는 했건만, A5판(국판) 200면을 맡아 줄 조판소가 없었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독립문 쪽에 있는 배화(培和)사에다 100면, 서소문 쪽에 있는 한흥(韓興)인쇄에다 100면을 맡기고,
지형은 지금의 명보극장 뒷골목에 있는 문화지형소에서 떠가지고 야간열차로 대구에 가서 인쇄를 했는데,
부수는 5천을 더하여 4만부를 찍었으니 얼마나 후다닥거렸겠는가. 이것이 ‘53년 12월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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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주부 삼국지》의 첫 장면

왼쪽이 유비, 오른쪽에 긴 칼을 메고 있는 장수가 관우, 그 옆에 창을 짚고 있는 장수는 장비.




응모 5천 편, 제1회 ‘학원문학상’ 발표


1954년 1월호에는 전국의 문학소년 소녀들이 작품을 보내놓고 기다리던 ‘제1회 학원문학상’을 발표한다.
여느 달의 독자문예 투고수는 시·산문 합해서 300~400편 정도였는데, 문학상을 겨누어 보내온

작품의 수는 무려 5,000편이나 되었다고 한다면 얼른 곧이들릴까?
초선은 편집부에서 반수 가량을 추려내고 선자에게 돌렸는데, 선자인 시인 장만영은 그 심사평에서 쓰기를,

“내 손에 들어온 것이 2,000편이 넘으면 넘었지 ······, 이것을 모조리 읽기에는 1주일이 필요했다.

우선 그중에서 80편을 추려놓고 하나하나 정성껏 읽어서 40편을 뽑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10편을 뽑은 것이 바로 여기 당선된 작품들이다.

10편은 내가 눈을 감고도 외울 정도로 읽은 것들이다.
이것이 다시 심사위원들에게 넘어가 여기서 우수작 입선작이 결정되었다.”


또 소설의 심사평을 쓴 소설가 최인욱은,

“편집부에서 초선하여 넘어온 작품은 무려 500편이나 되었는데, 이중에서 선자가 뽑은 것이 70여편,
여기서 또 한번 고르니 12편이 되었다. 이 12편의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 다섯 분이 함께 심사한 결과
정종진 군의 〈선생님〉과 박경석 군의 〈모밀꽃 필 때〉가 우수작으로 뽑혔다.”



심사 결과, 시와 소설에서 ‘우수작’ 각 2편씩, ‘입선작’ 각 8편씩이 뽑혔다.
그리고 시에서는 ‘입선가작’ 20편, ‘선외가작’ 30편, 또 소설에서는 ‘입선가작’ 20편이 뽑혔으니 상을 받는 사람은 모두 90명이다.
 “하늘 아래 이만한 수로 발표되는 문학상이 어디 또 있겠느냐”고 하면서 심사위원들이 함께 박수를 보냈다.
‘학원문학상’이 있기 전에 이땅에는 이렇다 할 문학상이 없었다.
그 심사위원은 시에 김용호, 장만영, 서정주, 조지훈, 조병화, 소설에 마해송, 정비석, 최정희, 김동리, 최인욱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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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학원문학상 심사위원, (앞줄 왼쪽부터) 정비석,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서정주,

(뒷줄 왼쪽부터) 김동리, 최인욱, 김용호, 조병화, 장만영



지면 사정으로 수상자명을 다 들지 못하고 우수작은 작품·작자·학교명, 입선작은 작자와 학교명만 적는다.

 
시의 ‘우수작’은 〈기(旗)〉 김동기(안동고 3), 〈청솔 그늘에 앉아〉 이제하(마산고 1),
‘입선작’ 장원달(영남고 2) 조정숙(경기여고) 차수영(마산고 2) 이상호(부산 대신중 3) 하정자(부산 남성여중 2)
최순옥(전주사범 2) 유경환(경복고 1) 송명호(경복고 1), 또 산문의 ‘우수작’은 〈선생님〉 정종진(서울사대부고 1),
〈모밀꽃 필 때〉 박경석(광주서중 3), ‘입선작’ 이종보(대구사대부고 1) 지영호(광주북중 3) 황동규(서울중 3)
이제하(마산고 1) 홍순진(청주고 1) 최태수(한얼고) 마종기(서울중 3) 손광식(서울중 3) 등이다.

 
이 20명의 작품은 30여면에 걸쳐 다 실었으며, 잡지는 껑충 1만부를 더하여 5만부를 발행했다.

50년 전의 이 학생들의 이름을 보면 그 학생이 바로 오늘의 유명한 그 사람이었구나 하는 이름이 많다.


 
이를테면, 시의 우수작을 낸 김동기(金東基, 1934~)는 경제학박사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으로,

또 이제하(李祭夏, 1938~)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화가로 다재다능을 보이며 활약하고 있다.
이제하의 〈청솔 그늘에 앉아〉는 한 시절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많은 학생들이 애송했던 명시가 되었다.
‘학원문단’ 출신으로 출세한 시인·소설가 등 유명인사는 누구누구일까? 대충 적어 본다.



김종원(金鍾元, 시인·영화평론가) 정규남(丁奎南, 시인) 유경환(劉庚煥, 시인·신문학박사) 황동규(黃東奎, 시인·서울대 교수)
이제하(李祭夏, 시인·소설가) 허 유(許 洧, 시인·한국투신증권 사장) 마종기(馬鍾基, 시인·의사) 박경석(朴倞錫, 시인)

송영상(宋榮相, 시인·수필가) 갈천문(葛天文, 연합통신 상무이사) 김동기(金東基, 경제학박사·고려대 교수)

송명호(宋明鎬, 아동문학가) 정종진(진주문화방송국장) 정용화(鄭容和, 수필가·의학박사)

오광수(吳光洙, 미술평론가) 김춘복(金春福, 소설가) 최원식(崔元植, 시인) 구석봉(具錫逢, 시인·극작가)
문충성(文忠誠, 시인·제주대 교수) 김한규(金漢圭, 아동문학가) 김준오(金俊五, 문학평론가·부산대 교수) 김성탁(金成鐸,
김병총(金?總) 소설가) 서영수(徐英洙, 시인) 김원중(金元重, 시인·포항공대 교수) 김재원(金在元, 시인) 박곤걸(朴坤杰, 시인)
박종찬(朴鍾贊, 시인) 유봉영(柳鳳永, 시인·법학박사) 장윤우(張潤宇, 시인·성신여대 교수)

김평기(金枰琪, 시인) 김병익(金炳翼, 문학평론가) 정공채(鄭孔采, 시인) 변종식(卞鍾植, 시인)

김종한(金鍾漢, 아동문학가) 신일수(辛一秀, 철학박사·한양대 교수) 반헌수(潘憲秀, 변호사) 박경용(朴敬用, 시인·아동문학가)


이상은 ‘52년 12월호부터 ‘56년 12월호까지에 나온 사람이고, 다음은 ‘57년 1월호에서 ‘61년 9월호까지에 나온 사람이다.



이수익(李秀翼, 시인) 송상옥(宋相玉, 소설가) 이재령(李在寧, 시인) 이성부(李盛夫, 시인) 정진규(鄭鎭圭, 시인) 백인빈(白寅斌, 소설가)
김만옥(金萬玉, 소설가) 홍문신(洪文信, 경제학박사·한국감정원장) 이봉신(李奉信, 시인) 김화영(金華榮, 시인·고려대 교수)

이청준(李淸俊, 소설가) 김원호(金源浩, 시인) 이양근(李良根, 시인) 김광협(金光協, 시인) 윤청광(尹靑光, 방송작가)

용수(吳容秀, 시인) 김영준(金榮俊, 시인) 김원일(金源一, 소설가) 권오운(權五云, 시인) 이승훈(李昇薰, 시인·한양대 교수)

김형필(金炯弼, 필명 이탄(李炭), 시인) 오탁번(吳鐸藩, 시인·고려대 교수) 공석하(孔錫夏, 시인·동덕여대 교수)

정광숙(鄭光淑, 소설가) 박의상(朴義祥, 시인) 이세방(李世芳, 시인) 원동은(元東垠, 시조시인)
주광일(朱光逸, 시인·법학박사) 박용삼(朴龍三, 시인·소설가) 양윤식(楊潤植, 시나리오작가) 한석근(韓石根, 수필가)
윤수천(尹守天, 아동문학가) 양문길(梁文吉, 소설가) 민용태(閔鏞泰, 시인·고려대 교수) 전상국(全商國, 소설가·강원대 교수)
양성우(梁性祐, 시인·전 국회의원) 최인호(崔仁浩, 소설가) 마종하(馬鍾河, 시인)


여기서 ‘61년 9월호까지로 한 것은, 그달로 해서 《학원》이 언제 속간하겠다는 기약도 없이 휴간을 했고,

편집주간인 필자 또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관여했던 동안의 이야기가 되다 보니 이렇게 구분을 지은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학원》은 ‘62년 3월에 속간되어 ‘60년대 ‘70년대로 이어지면서 ‘학원문단’을 통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한 줄로 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문단에는 160명 이상의 중견 시인·작가들이 ‘학원문단’ 출신이라고 하니,
학생잡지 《학원》이 해 놓은 일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는다 할 것이다.


 


《학생계》와의 한판 승부


1954년 4월호는 경쟁자로 나타난 《학생계(學生界)》와 한판 겨루게 되었다.
대구 문성당(文星堂, 대표 주인용(朱仁龍))이 발행한 《학생계》는 4월호를 창간호로 3월 20일께 《학원》과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필자(편집장)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잡지를 사다 놓고 펼쳐보았다. 그 내용이 《학원》과 너무 닮은 꼴이었음에 자못 놀랐다.


《학원》은 〈홍길동전〉(정비석)·〈검은별〉(김내성)·〈소년 수호전〉(윤백남)·〈파초의 꿈〉(김말봉)·〈어디로 가나〉(박계주)·

〈로빈 훗의 모험〉(김영일 옮김)·〈바다밑 2만리〉(최인욱 옮김) 등 7가지 소설과, 〈코주부 삼국지〉(김용환)·
〈꺼꾸리군 장다리군〉(김성환)·〈꼬마 루루〉(마지 원작) 등 3가지 만화, 즉 ‘10대 연재’가 있는데 비해,
《학생계》는 〈애꾸눈 대왕〉(박계주)〈태양을 향해서〉(최요안)·〈별을 헤는 소녀들〉(최정희)·〈사랑의 집〉(박영호 옮김)·
〈소년 철가면〉(김내성)·〈아인슈타인〉(이한직 옮김) 등의 6가지 읽을거리와 〈만화 수호전〉(김용환)·〈럭키 칠봉이〉(신동헌)·
〈Victory 조절구〉(김상환) 등 3가지 만화를 합쳐 ‘9대 연재’라고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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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계, 1954년 5월호>



이쪽의 별책부록은 《한국소년시집》인데 저쪽은 《로빈 훗의 모험》(이봉구 옮김)이었고,
또 저쪽에서는 1등에 자전거 한 대를 준다는 5만환 대현상도 내걸었다.
편집주간은 시인 박두진(朴斗鎭), 편집장은 소설가 이종환(李鍾桓)이라는 진용을 미리 듣고,
필자(편집장)는 대단한 내용인 줄 알고 사실은 겁을 먹다시피했는데, 열고 보니 별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흉내내고 저것도 모방한, 한마디로 해서 새로운 기획성이 없는 편집이었다.


발행인들끼리는 서로 아는 터수라, 과당 경쟁에서 오는 출혈을 막기 위해 분량과 정가는 협정을 한 모양, ‘본문 282면 값 120환’은 꼭 같다.
《학원》 4월호는 6만부를 발행했는데, 창간 《학생계》는 3만부를 찍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하여 《학생계》는 제3호(?)를 내고는 더 나오지 못했다.


이런 바람이 불고 있던 어느날, 수필가 조풍연(趙豊衍, 1914~1991, 호 청사(晴史))이

6월호부터 연재할 〈동방의 무지개〉 원고를 가지고 편집실로 왔다.

〈동방의 무지개〉는 주로 《노자(老子)》·《장자(莊子)》·《한비자(韓非子)》·《전국책(戰國策)》 등 중국 고전에서 추린
우화(寓話)적인 것, 말하자면 동양의 이솝이야기가 되는 흥미있는 읽을거리였다.

 
조풍연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학원》은 얼마나 찍느냐고 묻는다. 잡지사에 오면 누구나 궁금한 일이다.

그러자 편집장은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3월호는 5만5천부, 4월호는 6만부를 찍었다고 했더니, 청사는 놀라면서
그것은 《동아일보》보다 더 많은 부수가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한다.


“며칠 전에 《동아일보》 민재정(閔載禎) 편집국장이 점심을 하자기에 나갔더니, 그날로 해서 피난갔다
돌아온 《동아일보》가 마침내 5만부를 찍었다고 자랑하면서 기분이 좋아 술까지 한 잔 했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아일보》하면 우리나라에서 최고부수를 발행하는 신문인데
그 신문보다 더 많은 부수를 발행한 학생잡지가 있었다고 하면 얼핏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학원》의 부수는 계속 상승, 6월호는 《학생용 세계인명사전》을 별책부록으로 붙여 6만5천부, 7월호는 《학생애창곡집》을 별책부록으로
붙여 7만부, 이어서 8월호는 부피도 310면으로 하여 여름방학 선물이 되게 ‘20만환 대현상’을 내세워 1만부를 더하여 8만부를 내놓았다.
그때까지의 한국 잡지 역사상 최고부수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간혹 《학원》이 10만부를 돌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고등학생들의 큰 마당 학원 - 1952. 11 (한국잡지백년3, 2004. 5. 15., 현암사


2 Comments
안나푸르나 2018.01.28 20:15  
사촌 언니나 오빠 집에 가면 책꽂이에 학원 잡지를 많이 봤는데요...
그 시절에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학원이 배출한 문학가가 참 많네요!!!
파비아노 2018.01.28 23:14  
60년대 학창시절에 學園을 자주 사보았습니다. 한때는 문학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위 포스팅에 관련하여 네이버 블로그에 관련 포스팅을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fabian562/221193882490    황보(皇甫)선생과 영어(英語)

http://fabiano.dothome.co.kr/bbs/board.php?bo_table=blog&wr_id=1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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