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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학생들의 잡지 - 학원(學園) 1952. 11. 창간 (1)

파비아노 0 3402  



그 시절, 학생들의 잡지 - 학원(學園)  1952. 11.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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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전쟁 중에 ‘학원장학생’ 선발!
 응모 5천 편, 제1회 ‘학원문학상’ 발표
《학생계》와의 한판 승부
 전국 중고생 미술전, 제1회 ‘학원미술상’!


《학원()》은 1952년 11월 1일자로 창간된 중고등학생의 교양지로서 1961년 9월호까지 통권 92호를 발행하고 휴간한다.

그러다가 1962년 3월에 속간, 1969년 2월호까지 내고, 1969년 3월호부터는 발행권을 학원출판사 박재서()에게 이양,

1979년 9월호까지 내고 종간했다. 그후 다시 학원사에서 ‘학생지’와는 다른 성격의 잡지로 몇 호를 냈으나 더 나오지 않았다.

창간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김익달(), 인쇄인 하영오(), 인쇄소 경화()인쇄소,

발행소 대양()출판사(학원사의 전신, 부산·초량동 2가 53, 임시 본사 대구·삼덕동 29), A5판 114면, 값 4,000원이다.

임시 본사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대구가 본사였고, 부산에는 출장소가 있었다.


발행인 김익달이 쓴 〈창간사〉를 읽어 보자.


“시대의 요구에 응하여 본사는 이에 중학생 종합잡지 《학원》을 간행한다.

《학원(學園)》은 글자 그대로 배움의 뜰이 되어야 할 줄 안다.
우리의 장래가 모든 학생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을 위한 이렇다 할 잡지 하나가 없는 것이 오늘의 기막힌 실정이다.

 ······ 아직 시작이라 무어라 앞일을 말하기 어려우나, 불행한 이 나라 학생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본디의 뜻만이라도 알아 주었으면 이 이상 더 고마운 일이 없을 줄로 안다. 〈하략〉”


여기서는 ‘중학생 종합잡지’라 하고 표지에까지 박았으나, ‘독자문예’ 등의 투고 비율이 고등학생이 많아지고,

실제의 독자도 중·고생이 어슷비슷하게 되자 ‘중고등학생 종합잡지’로 내세웠다.



창간호의 목차를 본다.

표지 그림 백영수, 제자 박상득(), 목차그림 김용환, 삽화·컷 이순재, 변종하, ‘창간사’ ··· 김익달/ ‘축사’ ··· 이효상,

〈명화소개〉 ‘장작 패는 사나이’ ··· 밀레/ ‘사진화보’ ··· USIS 제공, 〈시〉 ‘성좌’ ··· 박목월/ ‘길을 걷자’ ···

조병화/ ‘가을이 흐른다’ ··· 김용호/ ‘고무신’ ··· 이원수, 〈영시대역〉 ‘The Wind’ ··· 로젯티 지음·마은영 옮김,

〈수필〉 ‘가을 하늘’ ··· 마해송, 〈가을일기〉 ‘일기초’ ··· 최인욱/ ‘푸른 하늘’ ··· 박영준

〈동화〉 ‘신문 파는 박사’ ··· 김요섭, 〈연재소설〉 ‘홍길동’ ··· 정비석 지음·백낙종 그림,

〈연재 세계명작〉 ‘노틀담의 꼽추’ ··· 위고 원작·김광주 옮김·김영주 그림, 〈연재만화〉 ‘코주부 삼국지’ ··· 김용환,

‘나의 중학시절’ ··· 김팔봉/ ‘재일 우리나라 학생의 동태’ ··· 김원규/ ‘중학생에게’ ··· 우타관, 왕학수,

이청전/ ‘내가 음악가가 되기까지’ ··· 김동진, ‘단편만화’ ··· 김성환/ ‘해외만화 : I don’t like too


〈시사해설〉 ‘중·소회담’ ··· 박호윤, 〈오늘의 인물〉 ‘나기브 장군’, ‘아이젠하워 원수’, 〈학습취미강좌〉

‘사회생활 : 자연환경과 인생’ ··· 노도양/ ‘과학 : 단풍의 과학’ ··· 박만규/ ‘영어 : 미녀와 야수’ ···

여석기/ ‘수학 : 일곱다리 건너기’ ··· 엄상섭, 〈학교방문〉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편’/ ‘부산서여자중학교 편’,

〈편지〉 ‘어머님께 드리는 글월’ ··· 김필정, 〈콩트〉 ‘백합꽃’ ··· 신명수, ‘학원장학생 모집’ 등, 필진이 30여명에 이른다.



연재물 중에 정비석의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는 단연 인기였다.

그때까지 잡지에 소설은 연재되는 것이 있었지만 장편만화를 몇 년에 걸쳐 연재한 것은 〈코주부 삼국지〉가 처음이요,

《학원》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만 있던 세상에 TV가 나타난 만큼이나 독자들을 흥분시켰다.

〈삼국지〉를 영화로 보듯 그림으로 볼 수 있었으니 그 기획은 단연 히트였다. ―― 넓고 넓은 중원()천지를 누가 잡느냐 잃느냐 하는

파란만장한 영웅 호걸들의 이야기를 매달 10면씩 연속 홈런을 치다시피하고 나갔으니,

잡지를 사면 누구나 맨 먼저 〈코주부 삼국지〉부터 읽게 되었다. 그것은 열독()이었고 열광이었다.

오락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피난시절의 소년소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큰 선물이었다.



코주부 김용환(, 1911~1998, 호 목정())은 1938년 도꾜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일찍이 일본의 소년잡지 《소년구락부()》

 등에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펜화’는 당시 일본 제일의 ‘가바시마() 펜화’를 따를 만큼 잘 그렸다는 평판이었다고 한다.

《학원》에도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등 여러 작품을 펜화로 그렸다. 해방 후 우리나라 만화계에서는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을 만큼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코주부’란 만화의 주인공인데, 그만 그의 별호가 되어버렸다.



필자는 코주부가 만화를 그릴 때 옆에서 자주 보았는데, 연필로 자리만 매겨놓고 밑그림 없이 바로 펜으로 그려나갔다.

참으로 능란한 솜씨였다. 그러면서 만화보다 더 재미나는 유머도 곧잘 터뜨리며 일을 하는데 언제나 웃음이 많았다.

그의 아우 김의환()도 우리 출판물에 많은 삽화를 남겼으며, 특히 그는 아름다운 동화()를 그렸다.

김용환, 김의환 형제는 8·15해방 전 일본서도 날리던 화가들인데,

일본 이름으로 형은 기다 고지(), 아우는 시바 요시오()였다.



또 〈홍길동전〉은 조선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소설임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홍길동이 판서( : 오늘날의 장관)의 아들로 태어나 인물·학식·재주가 뛰어났건만,

한갓 첩의 소생이기 때문에 천대가 심하여 집을 나가 활빈당()을 조직,

그 괴수가 되어 신출귀몰하는 재주로써 탐관오리를 쳐부순다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학생들에게는 읽힐 만한 〈홍길동전〉이 없었다.

단지 일제 때 나온 ‘빨간딱지 이야기책’이 있었을 뿐, 이것조차 보기 힘든 판에 정비석 특유의 필치로

스릴이 넘치는 새로운 〈홍길동전〉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갔으니, 소년소녀들이 매료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첫머리에서 한 대목을 소개한다.



“며칠 만에 타 보는 말인지라, 길동은 말 위에 오르자 기분이 상쾌하였다. 그는 말을 구보()로 달려 무악()재로 향하였다.

말을 마음껏 달려 보자면 아무래도 성밖으로 나가야 하므로, 홍제원()으로 해서 녹번리()까지 가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 무악재 마루턱에 오르기까지는 그냥 구보로 달렸다.

그러나 고개 위에 오르자, 그때부터 눈 아래 굽어보이는 한길에 행인()들이 보이지 않으므로,

길동은 별안간 말 배때기를 기운차게 차며 말혁을 확 늦추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호되게 휘갈겼다  〈하략〉”



이 잡지를 읽는 중학생들, 그중에서도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친구들의 형편은 어떤지, 그 〈방문기〉의 한 대목은 이러하다.



“하꼬방(판자집) 교사들, 전쟁이란 이렇게도 처참한 것인가. ······ 전교 학생 총수가 2,830명인데 중등과 2,300여명, 고등과 500여명,

이것을 지역별로 보면 서울 학교가 94개교, 서울 외의 학교가 30개교, 도합 124개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배우고 있다.

판자집 교사, 교실 수는 30여개, 한 교실의 평수는 대개 14평 안팎인데, 책상도 없이 100명 이상이 앉아서 공부를 한다.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51명, 이분들 또한 서울에서 피난을 왔다. ······”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이 이젠 모두들 60을 넘고 70노인이 다 되었으니, 세월 50년이 어느새 흘렀구나 하고 눈을 감아 본다.


창간호에서 가장 특기할 뉴스는 〈학원장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전국 남녀 중학생 가운데서 성적이 특히 우수하고 덕성을 갖춘 모범생으로서 집안이 가난하여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중2 학생 중에서 10명을 선발하여 중3 때부터 매월 20만원씩을 주는 것이다.

피난살이하는 그 고달픔 속에서 이 기사는 하나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교육계는 물론 언론계 문화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창간호의 편집주간은 시인 장만영(, 1914~1975), 편집장은 김성재(, 현 일지사 사장)였다.

필자가 학원사(대양출판사)에 들어간 것은 창간호와 12월호가 나온 뒤 1952년 12월 초였다.

80여명이 이력서를 내고 그 가운데서 6명이 전형되어 여러 과목의 시험을 치고 작문을 쓰고 나서, 한 사람을 뽑는데 거기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 나이 25세, 35세인 젊은 사장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첫 출근을 했을 때, 잡지는 1953년 1월호가 인쇄 제책을 거쳐 막 출간되고 있었다.

인사를 드린 편집장은 남소희(, 현재 미국 거주 문필가)였다.

잡지가 세번째 나오는데 주간도 물러나고 편집장도 바뀌었으니, 나는 한동안 이 수수께끼가 궁금했다.


전쟁 중에 ‘학원장학생’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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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발행인 김익달



학원사는 잡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세가지 업적을 남겼으니, 첫째는 해마다 ‘장학생’을 선발하는 일이요,

둘째는 ‘학원문단’을 열어 매년 ‘학원문학상’을 발표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해마다 ‘전국 중고등학생 미술전람회’를 주최하여 ‘학원미술상’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미술전람회는 사정이 맞지 않아 제3회로 중단했으나, 앞의 두가지 일은 회사의 명운과 함께 오래 지속되었다.


1953년 3월호에는 창간호에서 모집한 장학생 응모자 중에서 34명을 서류 전형하여 수험하도록 그 요령을 발표했다.

수험 일시는 ‘53년 2월 22일 9시, 수험생의 왕복 여비는 본사가 부담하여 이미 학교장에게 보내주었다.


22일 그날, 전국에서 모인 34명의 수험생들은 대구 중앙국민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국어·영어·수학·사회생활(공민·역사·지리)·과학(생물·물상) 및 음악·미술·보건 등이었다.

 

출제위원은 문교부 편수관인 홍웅선(), 이상선(), 김홍주(), 조기환(), 박만규(),

오연석(), 경북대 교수 김상호(), 대구대 교수 이규동() 등이었고, 필기시험은 100분간이었다.



오후에는 면접이 있었고, 저녁에는 대구에서 유명한 호수그릴에서 출제위원 전원과 마해송(), 정비석(),

최정희(), 장만영() 등 《학원》의 필자 및 관계 인사가 모여 만찬 겸 환담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튿날 엄격한 채점과 전형으로 12명을 선발했다. 처음 약속은 10명이라고 했지만 사장의 결단으로 2명을 더 뽑았다.

다음의 이름은 그때 발표한 성적순대로 적은 것이다.


송영필(, 청주중) 고무환(, 상주중) 윤교필(, 서울피난 대구연합중) 신상하(, 대구서중)

김인원(, 인천 황해중) 김해도(, 대구 제일중) 김창복(, 부산서중) 김진무(, 대전중)

도진영(, 제주 피난중) 유재천(, 부산 대신중) 이경자(, 부산 동여자중) 옥경신(, 진주남중).


오늘날은 장학금을 주는 사람도 적지 않고 받는 사람 또한 많은 세상이 되었지만, 전쟁을 하고 있던

그 당시에는 《학원》을 발행하는 김익달 사장 말고 누가 또 그런 일을 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도 중3 1년 동안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제4기 이후는 고1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8년 동안을 다 주었으니, 이럴 때는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장학금을 다 받고 대학을 마친 사람과 현재 받고 있는 학생의 수를 합치면 60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액수도 액수려니와 그 주는 마음은 무엇으로 헤아리겠는가.

​학원장학생 출신으로 우리 사회의 지명인사가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 방명()을 다 들 수는 없지만,

그들의 친목 모임인 ‘밀알회’ 명부(2001. 4 현재)에 의거 대충 적어 본다.


국회의원으로는 김근태(槿) 강재섭(), 법조계의 변호사로는 김석조() 박인준() 장기욱() 김성남() 이홍길() 김완섭() 박현순() 윤상일() 이정웅() 김채규() 김홍섭() 박주현() 최영로(), 판검사로는 신건수(, 서울고검 부장검사) 권선룡(, 춘천지검 부장검사) 이덕선(, 서울지검 부장검사) 유연만(滿, 전주지법 군산지원장) 임호영(, 서울지법 부장판사) 박정식(, 서울지검 검사) 오관석(, 서울고법 판사) 이승섭(, 청주지검 충주지청장) 이재덕(, 서울지검 검사) 한정규(, 서울지법 판사) 조정찬(, 법제처 법제관),


대학교수로는 유재천(, 한림대 부총장) 이창주(, 한림대의대 교수) 이정은(, 재미 병리학자) 김생기(, 성결대 교수) 곽병만(,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김효중(, 효성가톨릭대 교수) 박응격(, 한양대 교수) 여운승(, 한양대 교수) 소광섭(, 서울대자연대 교수) 이광원(, 아주대 교수) 이명언(, 공주대 교수) 배손근(, 고려대 교수) 이정숙(, 서울여대미대 교수) 김선행(, 고려대의대 교수) 김승태(, 미국 매릴랜드주립대 교수) 강봉순(, 서울대농대 교수) 유장발(, 대구대 교수) 이재구(, 포항공대 교수) 임대우(, 호서대 교수) 조남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김윤명(, 단국대 교수) 배의용(, 동국대 교수) 김승협(, 서울대의대 교수) 김진범(, 부산대치대 교수) 도회근(, 울산대 교수)


이종학(, 경상대의대 교수) 노태욱(, 강남대 교수) 송찬섭(, 한국방통대 교수) 이영호(, 인하대 교수) 조동호(,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김선호(, 명지대 교수) 이기헌(, 명지대 교수) 전혜영(, 이화여대 교수) 정현주(, 전남대치대 교수) 주석재(, 울산대 교수) 김봉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배학수(, 경성대 교수) 이명균(, 서울대자연대 교수) 조성겸(, 충남대 교수) 이찬훈(인제대 교수) 배수돌(, 고려대 교수) 우종()원(일본 사이타마대 교수) 전태국(, 성균관대의대 교수) 최재륜(, 전남대 교수) 김태영(, 계원예대 교수) 백경란(성균관대 교수) 이경민(서울대의대 교수) 김희철(, 순천향대 교수) 등이다.


이밖에도 의사가 20여명, 화가·도예가·목사가 있고, 또 금융·실업계, 언론·문화계에서 활약하는 인사도 많으나 지면 사정으로 다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처럼 출세한 인사가 많은 밀알회에서는 이제 독자적인 ‘밀알장학재단’(이사장 이전문())을 만들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자’

매년 장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중고등학생들의 큰 마당 학원 - 1952. 11 (한국잡지백년3, 2004. 5. 15.,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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