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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19세때 6.25사변이 터졌다.

fabiano 0 1829  

내 나이 19세때 6.25사변이 터졌다.

 

 

아래 글은 질곡의 한국전쟁을 몸소 경험하신 동탄 임성택씨가 큰 누나의 마음을 읽고
간략히 살을 붙인 글로써 KBS 방송국에 그 시절 마당 애환 낭송원고이다.

 

 

우리 아버지는 남대문시장에서 포목 옷감 장사를 하셨다.

당시로선 대중교통이 전차 뿐 이기에

나의 집은 흑석동(지금의 흑석2동)이라서 교통문제로

집에는 가끔오셨다 제1 한강교가 끊기면서

아버지의 소식이 마저 연락 두절상태

집안에 남아있는 할머님 어머님 이남 이녀중 맏딸인 나는

노량진 고개에서 줄 곧 아버지 기다리다가

아예 피난도 못가고 집은 한강변 이였지만

그 수많은 참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보아 왔었다.

 

한강다리가 끊기니 나룻배에 피난민들이 서로탈려고

아우성이었고 말 그대로 아비규환 이었고

배에다가 사람을 너무많이 싣고 강으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서

백사장 한강변에는 물에 떠다니는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또 강물이 빠지면 모래사장에 물이 불으면 시체는 둥둥 다시 떠다니고,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잣었다.

 

그런데 우리 남아 있는 가족들은

당시 서울에는 모두들 피난을 나가 양식 구할 수가 없어서 걱정을 하는데

친척 할아버지가 이를 잘못 알고 먼저 피난 떠나 서울에 온줄 알고

찾아 왔다기에 때마침 양식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선

황해도 해주 연안 지금은 이북땅이지만 그 당시엔 남한 땅이었으니까...

남쪽은 한창 낙동강에서 피아간 공방 사투의 전쟁을 할때라

할아버지께서 거기는 시골이라(아드님이 사범학교 교편잡고 있었음)

양식은 걱정 없으니 따라 오라고 하시기에

결국은 친척 할아버지 따라 서울서 임진강 건너 개성을지나 황해도 연안까지

그먼 삼백리길을 하루에 백리씩 삼일동안을 걸어서 그곳에 갔다.


먹거리 풍성한 얼마간은 그럭저럭 걱정 없이 지내다가 그래도 서울에 게신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다시 또 서울로 피난을 나오는데

미군비행기(F-80 쎅세기)가 편대를 이루어 얼마나 폭격을 하는지

바로 앞에 가던 피란민들이 수없이도 파편에 맞아

안타깝게도 길가 연도에서 아녀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총소사를

포함한 오인 폭격으로 비명에 억울하게 죽어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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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우리 가족들은 천신만고 끝에 요행으로 무사했지만 고생은

이루 헤아릴수가 없었고, 그 고생 고생 끝에 흑석동 집에 와보니

집은 피폭되어 반파 돼 있었다.

이때가 바로 9.28 UN군 인천상륙작전

성공직후의 노량진 전투당시 그때 였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황해도 연안에서 피난길로 안돌아 왔으면

지금쯤 소름끼치는 빨갱이나라 이북에서 못빠져 나올 뻔 했었다.

 

한편 아버지는 영영소식이 없으시고,

그후 1.4후퇴때 옆집 아주머니가 자기 친정이 오산인데 같이 피난 가자고 해서

다시 남쪽을 선택해서 무작정 떠나기로 했었고 철길을 따라 안양지나서

군포역에 갔는데 마침 남행을 위한 화물열차차가 몇량이 서있길래

무조건 화물차 지붕으로 올라탔다.

 

때마침 짐칸에는 후퇴하는 중대병력의 미군들이 타고 있었고,

피난민들인 우린 이 기차를 타면 부산까지 가는줄 알고

너도나도 짐칸 위로 몰려들었고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자릴 차지하려고

생지옥 인산인해의 다툼으로 간신히 식구들 몰려 올라 갔지만

막내동생(동탄/임성택)은 6살박이라서 올라갈 수가 없어서

노끈으로 드레박 달듯 달아 올리고..,모두 행운이 있어 안착을 했긴 했었는데

 

 

아 글쎄 문제는 여기서 일어났다.

집을 떠나올때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비상식량으로 짐 보따리에 챙겨

간수한 것이 날씨가 추우니까 그만 떡밥으로 꽁꽁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먹을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 배고픈김에 허기때운 식구들은

모두 배탈이났지요 밤은 어두운데 기차지붕 꼭대기서 오도가도 못하고

심히 낭패를 당하였다.

 

어찌 할 수 없이 궁여지책 용변을 바가지에 달아 기차 레일 바닥에다가

대충처리하고 모두는 생사의 결단 상황이라 죽기살기 마음들이라서

그 갈림길인지 체면이고 뭐고 신체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차디찬 배앓이는 물론이지만 도통 떠날 줄 모르는 화물칸 기차

지붕 위에서 온가족들 꼬두 밤샘을 지키고 남행의 꿈을 위해

그나마 희망을 안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아침해가 떠올라 날이 밝아오고 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없었다.

 

아 글쎄 함께 있어야 할 짐칸의 미군들은 오간데도 없고

기차 머리만 살짝 돌려

다른 화칸을 이용해(작전상) 깜쪽 같이 달아나 버리다니....

이를 신뢰하고 크게 믿고 있던 피난민은 망연자실하고, 또 지친 몸을 이끌고

군포역에서 어쩔 수 없이 남쪽 철길로 피난대열들을 따라 나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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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옆집 아주머니댁 집을 믿고 일단 오산 친정집으로 찾아 가보니

거기서도 피난들 가고 없는지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할 수 없이

같이 뭉쳐서 피난 갔었던 외지인 다섯가구가 한데 뭉쳐서 한집에 머물렀는데,

알고보니 이곳은 임시 완충 역활한 교전지역으로서

아군은 서정리에 진을치고 우리가 머무는데서 이십리 북방엔 밤만 되면

중공군이 따발총 매고 돌아다니니 피아간 격전지 틈새인줄을 전혀 몰랐었다.

 

 

날이새면 미군 비행기가 수 없이도 북쪽에 적진을 향해 폭격을 가하기에

더이상 머무를 곳이 못돼 우리 가족은 할수 없이 거기서 더 깊숙한

산골짝 마을로 옮겨갔다.

 

옮겨가던중 때마침 초가집 세채가 오기종기 모여 있기에 외지인을 포함한

우리 피난민 10가구가 단체생활로 몰려있었는데 다행히 곡간옆에 항아리에

묻어둔 곡식을 어쩔수 없는 처지들이라 주인 없는곳서 무단으로 찾아내

생명부지의 곡절에서 피난지 삶을 그나마 연명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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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미군 두명이 저만치 골짜기서 총 들고 사주 경계하면서 걸어 오기에

겁이나서 초가집으로 뛰어 들어 왔다.

그때는 미군들이 있는데는 여자들이 겁탈 당할까봐 겁나서 숨어야만 했었다.

이때 우리는 숨을 곳이 없어서 젊은 여인네는 전부 초가집 다락에 숨어 들었다.

 

아마도 그네들 미군은 초가집은 축사라 계란을 두는 곳인 줄로 착각 했겠지만.,

우리가 머무는 집도 닭 두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들어 왔다가 군화 발길로

안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우리 할머니가 다락문 앞에 빨랫줄 걸고 엉성하게 저고릴 걸어놓고 은폐했는데

미군이 뭐냐고 묻자 말 안통하는 우리 할머님은 온 몸 손짓으로 이를 제지하자

이들은 더욱 궁금했는지 총검으로 그만 다락문을 뚫어 활짝 열어 제쳤다.

 

워낙 다락방이 캄캄하니까 지퍼 라이타로 불을 켜 다락방 안쪽을 들여다 보니

몰려있던 아녀자들이 공포에 질린 근심드리운 얼굴 정경이 훤하게 비쳐 뵈는지라

그만 미군도 놀라서 뒤로 물러서 당황 하더니만

한참만에서야 상황을 판단한 두 미군은 서로 붙잡고 그만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마도 수색 정찰 나왔다가

닭소리에 초가집이 축사인줄 알고 계란 생각이 절로 났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선 미안했는지 연신 아임쏘릴 연발하며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돌아갔다.

 

지금에서야 당시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제 그 많은 세월들 64년을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은 지금도 그 옛 일에 주마등 처럼 얼룩진 과거

6.25동란 생각에 눈물로 흐름진다.

 

당시는 열아홉 처녀시절였기에 몸을 사렸던 것이고 절로 웃음꽃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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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 저나 행방불명된 아버지 소식은 이산가족찾기 에서도 나타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리운 아버님의 생사를 모른다...너무나 연노하셔서 돌아가셨겠지만...

그래 내고향은 바로 거기 함경남도 정평군 귀림면 장흥리 6번지이다.

 

고향땅이 금강산 너머에 아담하고 작은 작은 어촌였으니 혹여나 살아만 계신다면

한세기를 훌쩍 104란 연세가 되셨지만 자상하시던 아버님 생각에

잠시 나의 눈시울 붉혀본다...

아버님 아니 아버지 그 그늘이 오늘 따라서 웬지 못내 그립습니다.....

못내 그리운 나의 아버지시여...!

 

※끝내 손수건에 눈물을 하염 없이 적셨던 나의 누나의 통한

그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면서.....!

 

K.B.S 방송국에 그시절 마당 애환 낭송원고로 송고를 해달란다..

큰누나의 마음을 읽고 간략히 살을 붙인 동생 동탄/ 임성택 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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