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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유신 대통령 할 생각 손톱만큼도 없다” 불출마…대통령 되자 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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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소이부답'] <77>전두환과 12·12
 
1975년 12월 20일 오전 김종필(JP?오른쪽) 전 국무총리와 최규하 신임총리가 이·취임식을 하기 앞서 중앙청 총리 집무실에서 만나 서로 상석에 앉을 것을 권하며 웃고 있다. JP는 4년6개월 만에 총리실을 떠났다. JP는 총리 시절 무리한 일정으로 건강을 해쳐 사표를 냈 다. JP는 1961년 중앙정보부의 브레인 그룹인 정책연구실에 외무부 관료였던 최규하씨를 참여시키면서 인연을 맺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고 유신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18년 구질서는 헝클어졌으며 새 질서는 형성되지 않았다. 누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끌어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거대한 공백 속에서 미래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은 최규하 총리가 맡았고, 비상계엄이 실시돼 계엄사령관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총재 자리는 비어 있었다. 군과 정부, 정치를 관통하는 중심은 없었다. 그때 나는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5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공화당에서 별 역할이 없는 총재 상임고문에 불과했다. 주요 당직자 중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박 대통령과 혁명을 같이한 혈맹으로서 새로 닥칠 시대에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을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가 나라의 현안이었다. 당내 상당수 의견은 내가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때 정치의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군부도 나를 경계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으로 유신은 막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새 시대에서 페어 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처삼촌인 박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 대한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1979년 11월 10일 공화당사에서 열린 당무회의. 왼쪽부터 김종필 고문, 박준규 당의장 서리, 이효상 고문, 정일권 고문. 이날 공화당은 보궐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1월 10일 공화당 총재상임고문단회의가 열렸다. 상임고문들은 박정희 총재 밑에서 당의장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공화당 의결기구인 당무회의는 새 대통령 선거에 당이 후보를 낼지 여부를 상임고문회의가 결정해 달라고 위임했다. 누구도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기 꺼렸던 안개 정국의 풍경이었다. 나와 이효상·백남억·정일권씨 등이 모였다. 나는 “정당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과도 정부의 대통령을 맡는 것은 객관성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럴 경우 여야 간 피투성이 싸움이 예상되고 국민의 인식도 좋지 않을 것”이라며 대선후보를 내지 말 것을 주장했다. 나는 이어서 “새 시대를 맞이하는 참된 싸움은 유신체제하의 대선이 아니라, 헌법 개정 이후의 대선에 있다. 그동안 공화당은 힘을 정비해서 진짜 대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일권 고문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설 우리 당 후보로는 김종필 고문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하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부정적이니 이번 유신 선거에는 안 나가고 다음 대선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11월 12일 나는 공화당 의원총회와 당무회의에서 당 총재로 추대됐다. 유신 대선엔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공화당 총재직은 운명이었다.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그 자리의 장래는 불안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 자리를 나만은 돌봐야 했다. 16년 전 혁명과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대화된 대중정당 하나 제대로 해보자는 일념으로 2년간 정성 들여 만든 게 공화당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공화당에 올라타 63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됐다. 내가 창당의 주역이었으나 외유와 정계 은퇴를 반복해야 했던 그 공화당이었다. 박 대통령에 이어 공화당 총재가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유신 과도기를 큰 혼란 없이 넘기고 민주화와 정상화가 보장된 새 시대에서 승부를 건다는 로드맵을 그렸다. 당 체제 정비도 필요했다. 그러나 내 편 네 편 없는 대동단결이 절실한 시점이어서 TK(대구·경북) 세력의 간판 격인 박준규 당의장 서리만 뒤로 물렸다. 신형식(4선·전남 고흥) 사무총장 등 다른 주요 당직들은 유임시켰다. TK 그룹은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그의 친위부대 역할을 자임했다.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견제했고, 내가 총재나 대통령이 되면 자기들 기득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TK 세력 중 일부는 같은 대구·경북 출신인 신현확 경제부총리와 연계해 정국을 자기들이 주도해보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하기도 했다.

1979년 2월 용산 육군본부 광장에서 열린 육군참모총장 이취임식. 왼쪽부터 이임하는 이세호 육 참총장,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신임 육군참모총장.
 공화당 상임고문단회의가 대선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한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온 국민이 관심을 갖던 차기 대통령 선거 일정에 관한 얘기였다. 그는 “본인은 현행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전임자의 임기를 채우지 않을 것이다. 이른 시일 내 헌법을 개정해 새 헌법에 따라 선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최 대행은 군부의 동의 속에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박 대통령 영결식이 치러진 11월 3일 직후 최 대행과 신현확 부총리, 노재현 국방부 장관,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이 정례 멤버로 참석하는 비상시국대책회의에서 최 대행을 대선 후보로 밀기로 한 것이다. 11월 10일은 말하자면 나의 불출마와 최규하의 출마 의지가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이 의지에 따라 형성된 과도 질서는 전두환 세력이 개입하면서 짧게는 79년 12·12, 길게는 80년 5·17까지 이어지다 파괴됐다.

 11월 13일 저녁 나는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올라가 최규하 권한대행을 만났다. 나는 최 대행에게 “당신이 과도 정부의 대통령을 맡으시오”라고 권유했다.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으니 현행 헌법으로 대선을 치르고 1년이나 1년 반 안에 헌법을 고쳐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게 맞다. 새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한 번 중임할 수 있도록 한 제3공화국 헌법을 참조하면 힘들지 않을 것이다.” 최 대행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가 무슨 정치적 야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간해선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는 건 최 대행의 스타일이지만 엉뚱한 발상을 할 것으론 보지 않았다. 대통령 보궐선거는 최 대행의 단독출마가 됐다. 12월 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 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틀 뒤 최 대통령은 공화당 총재인 나에게 내각 구성과 긴급조치 9호 위반자 처리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 대통령은 나를 무척이나 의지했다.

 그날 저녁 신현확 부총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저는 절대 공화당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내 직(職)을 걸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는 당시 공화당 소속 10대 의원이면서 경제부총리를 맡고 있었다. 국무총리를 맡아도 공화당적을 유지하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직을 걸겠다는 그의 다짐은 하룻밤 사이에 뒤집혔다. 다음날 오전 신현확은 공화당에 탈당계를 보내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표변(豹變)’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다 싶었다. 그는 훗날 탈당의 이유를 “과도정부의 총리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현직 국회의원을 자진 사임했고, 동시에 공화당의 당적도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 대통령의 마음도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최 대통령은 나에게 “지금 정부는 과도정부가 아니다. 안보·경제 불안정 등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많다”라는 말을 했다. 유신 헌법에 의한 임기를 끝까지 다 채우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럴 경우 최 대통령은 84년까지 대통령직에 있게 된다. 최 대통령의 심경 변화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 만했다. 자신감이나 의욕이 약했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에 목을 걸기 시작한 것은 신현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최규하에게 ‘그 욕심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과도정부라는 표현 대신 ‘위기관리 정부’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다.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임시·과도정부로서 구체적 정치일정은 밝히지 않았다. 나는 최 대통령이 좀 더 단순하고 선명한 전망을 내놓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그저 국회가 헌법을 개정하면 정부는 그에 따라 공정하게 선거를 치르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아마도 신현확은 절대권력이 사라진 정치공간에서 최 대통령을 앞세워 행정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리가 바뀌면 입장이 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권력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개인을 무작정 탓할 일만은 아니다. 여당과 행정부가 따로 굴러가면서 정치 주도력은 헝클어졌다. 그 사이 전두환을 리더로 한 신군부가 권력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군사반란 12·12가 태동하고 있었다. 79년 말 대한민국은 정부와 집권당, 군부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리던 혼돈의 시절이었다.

● 소사전 유신헌법 속 대통령의 궐위(闕位)=유신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궐위한 때에는 3개월 안에 후임자를 뽑는다. 다만 남은 임기가 1년 미만일 때는 후임자를 뽑지 않는다. 후임 대통령은 전임자의 잔임 기간까지 재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12월 두 번째 유신 대통령(9대)에 올랐다가 이듬해 10월 서거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79년 12월 유신헌법하의 보궐선거로 뽑혔기 때문에 개헌을 하지 않는다면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인 84년까지 재임할 수 있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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