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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꾹꾹 눌러쓴 ‘육필 소통’ 해외 두뇌 귀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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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딸 근혜(현 대통령)가 붓글씨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놓고 나니 생전에 대통령이 남긴 인간적 향기가 나를 휩싸 안았다. 그는 18년 권력자였지만 본색은 혁명가였다. 세상을 뒤집고 바꿔나가겠다는 혁명가적 기질이 넘쳤다. 혁명가는 다정다감하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관통하는 격렬한 열정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과 감성, 유머와 상상력이 박 대통령의 내면에 흘렀다.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내가 육사를 마치고 육본 정보국에 배치돼 박 대통령을 만났던 1949년 6월, 박정희 문관의 첫인상은 ‘조그맣고 새카만 분’이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작은 키를 농담의 소재로 삼곤 했다. 70년대 중반 내각에 박 대통령보다 키가 작은 사람으로 김용환 재무장관이 있었다. 대통령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김 장관을 자기 옆으로 부르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서로 키를 견주는 동작을 한 다음, “자, 봐. 김 장관이 나보다 작지?” 하면서 씩 웃으면 분위기가 쾌활하게 바뀌었다.

 박 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했는데 필드에 나갈 때 자외선 방지용 선크림을 유난히 많이 발랐다. 나는 그럴 때마다 ‘까무잡잡한 그 살갗에, 바르나 안 바르나 똑같은 것 아닌가’라며 혼자서 웃곤 했다.

72년 3월 박 대통령이 김용환 상공 차관을 임명하면서 보낸 축하 편지(사진 왼쪽), 78년 박 대통령이 진해 저도 휴양지에서 강아지 ‘방울이’를 들고 있다(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골프를 정확하게 또박또박 치는 스타일이었다. 골프라는 게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서 잘 나갈 때 흥분하지 않고 안 나갈 때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박 대통령은 18홀 내내 공을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맞춰 쳤다. 공이 날아가는 거리에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보기 플레이어(90타 전후)였다. 대통령은 골프를 할 때 돈내기를 하지 않았다. 내기 자체를 싫어했다. 화투조차 쳐본 적이 없다. 농한기 때 농민들이 심심풀이 화투를 치면서 게으름과 퇴영적인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운동은 즐거운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골프장의 잔디를 밟으면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자연 경관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린에 공을 올린 뒤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홀을 겨냥해 요리조리 신경 쓰는 퍼팅은 싫어했다. 홀 마감을 ‘온 그린’ 후 제2타로 끝내는 게 박 대통령의 골프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퍼팅 실력은 늘지 않았다. 막내 외아들 지만이는 청소년 시절 박 대통령, 나와 함께 골프를 친 적이 종종 있었다. 아들이 그린에서 한 번에 공을 홀컵에 집어넣자 박 대통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야, 지만이가 골프 신동이네”라며 좋아했다.

75년에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 대통령, 지만, 근혜, 근영. [중앙포토]

 대통령은 사전에 팀을 짜서 골프장에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파트너가 대통령에게 억지로 끌려왔다는 느낌을 갖는 걸 원치 않았다. 골프장에 도착해 그날 운동하러 온 사람들 명단을 죽 훑어본 다음 아는 사람들을 찾아 동반자로 초청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단골 골프장은 뉴코리아, 서울, 뉴관악, 태릉 군골프장이었다. 클럽하우스에선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만든 ‘막사이다’를 즐겼다.

1978년 8월 31일 경남 진해 저도에 있는 대통령 휴양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휴가를 즐기고 있다. 반팔 차림 셔츠에 웃음이 편안해 보인다. 저도 휴양지는 54년부터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됐다. 2013년 7월 휴가를 간 박근혜 대통령은 해변에 ‘저도의 추억’이라는 모래 글자를 쓰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술을 좋아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셨는데, 골프장이나 논두렁에서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사이다’를 즐겼다. 그런데 아무리 마셔도 무각(無覺·정신없이 취한 상태)에 빠진 적을 보지 못했다. 주변 사람한테 주정을 해대거나 몸이 헝클어지는 경우도 없었다. 자기 관리가 엄격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술버릇엔 관대했다. 60년대 박종규 경호실장은 술에 만취하면 청와대 본관 앞에서 “야, 박정희 나와”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곤 했다. 박 대통령은 이튿날 아침 박 실장에게 “이그, 그 술버릇 언제 좀 고치나”라고 한 번 꾸짖곤 그만이었다.

 대통령이 흥얼흥얼할 때 부르는 노래는 ‘황성옛터’와 ‘추풍령’이었다. “아, 아~ 으악새 슬피우니~”로 시작하는 ‘짝사랑’도 좋아했다. 30년대에 유행한 황성옛터는 박 대통령이 청년 시절부터 좋아해 18번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노래가 사람의 심정을 흔들어 대중을 동원하고 국민을 단결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간파했다. 쉽게 같이 부르는 노래를 만든 게 ‘새마을 노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박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그 시대 근대화의 현장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노래였다.

 박 대통령은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3년간 했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정규 교육을 받아 문예적인 소양이 깊었다. 시와 일기, 편지 같은 글쓰기와 오르간·트럼펫·클라리넷 등 악기를 두루 다뤘다. 나도 사범대학을 다니고 잠시 국민학교 선생을 했지만 각고면려(刻苦勉勵, 고생을 무릅쓰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 하지 않으면 이런 문예적 재능은 발휘되기 어렵다.

1966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태릉군골프장에서 티샷을 하는 모습. 박 대통령은 욕심을 내지 않고 정확하게 공을 날리는 이른바 ‘또박이 골퍼’로 보기 플레이어였다. 그린에 올라가선 퍼팅을 두 번 이상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특히 편지를 많이 썼다. 해외의 고급 두뇌를 유치하거나 일 잘하는 각료를 격려할 때 대통령의 친필 서신은 감격과 분발의 원천이었다. 이른바 ‘한국형 전자공업 발전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완주 박사는 60년대 미국 컬럼비아대의 잘나가는 교수였다. 박 대통령은 김 박사에게 온갖 정성을 들여 서울에 초빙, 정착시켰다. 대통령이 10여 년간 그에게 보낸 편지는 100통이 넘는다고 한다. 68년 박 대통령이 그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은 “또다시 상봉의 기(機)를 고대하면서, 귀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박정희 배”라고 썼다. 아홉 살 어린 김 박사에 대한 존칭이 깍듯하고 ‘대통령’이란 직함은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나에게도 따뜻한 정이 담긴 생일 축하 편지를 써주곤 했다. 생활 편지, 실무 편지, 격려와 고마움을 표시하는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손으로 펜을 잡고 갱지에 꾹꾹 눌러 가며 써 넣는, 말 그대로 육필(肉筆)이어서 지금처럼 A4 고급용지에 워드프로세스로 톡톡 쳐 넣는 e메일 편지와는 감동의 깊이가 다르다. 박정희식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는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역사성을 의식해 주요한 사건이나 행사가 있을 때 기록에 남기기 위한 용도로 꼬박꼬박 썼다. 나도 비슷한 목적의 일기장이 있었는데 77년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불시에 우리 집을 덮쳐 내 온갖 기록을 마구잡이로 가져갈 때 없어진 뒤로 일기를 쓰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붓이나 펜글씨는 학교 선생님이 칠판에 분필로 쓰듯 또박또박 정자체다. 단정하면서 꼿꼿했다. 총리 시절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대통령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내가 “글씨가 꼬장꼬장하네요. 성격 그대로이십니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내 성격이 이렇게 생겼나”라며 씩 웃었다. 돌이켜 보면 박 대통령의 매력은 그 씩~ 웃는 미소였다. 무슨 일에 대해 당신이 잘못 알았거나 상대방이 좋은 소리를 하거나 해서 딱히 뭐라고 하기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때 대통령은 멋쩍다 할지, 수줍어한다 할지, 쓴웃음을 짓는데 묘하고 복잡한 기운이 묻어났다. 나는 이 웃음을 ‘일품 미소’라고 이름 붙였다. 그게 대통령의 진짜 매력 아닌가.



 박 대통령 정신세계의 특징이라면 집중력과 정밀한 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선견지명, 실용정신과 과학기술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척결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심한 가뭄에 농촌에서 지내는 기우제(祈雨祭)를 아주 싫어했다. 초보적인 생활과학이 결핍됐다는 것이다. 바짝 마른 땅엔 곳곳에 댐과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쟁여놨다 공급할 생각을 해야지 왜 무심한 하늘에 운명을 의지하느냐는 말씀을 자주 했다. 나는 66년부터 69년까지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를 설립해 총재직을 맡았는데 청소년들에게 평생의 전문 기술 하나씩 습득하는 국민 정신을 퍼뜨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박 대통령은 기능올림픽 얘기만 나오면 유쾌해 했다. 일인일기(一人一技), 생활과학운동이 국민의 기질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돌아오면 대통령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청와대로 불러 격려를 했다. 그때 하시는 말씀이 “우리 젊은이들이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60~70년대 국민의 머릿속에 뿌리 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의식을 깨려고 애를 썼다. 대학 정책도 법학·인문학같이 전통적으로 강세인 문과 중심에서 물리·화학·전자·기계·토목·건축 같은 이공계 중시로 선회했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 혁명의 한복판에서 큰 영애 근혜를 서강대 전자공학과로 진학시켰다. 나라 산업의 미래를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찾겠다는 집념이었다.

● 인물 소사전 김용환(83)=충남 공주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박정희 시대의 개발연대를 이끈 대표적인 경제 관료.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974~78년 재무장관을 지냈다. 혁신적 재정조치였던 8·3사채동결(72년)과 부가가치세 도입(78년)을 주도했다. 88년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대천-보령)으로 정계에 진출한 뒤 4선 의원을 했다. 97년 이른바 DJP 공동정권의 산파역이었으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원로 자문모임인 이른바 7인회의 수장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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