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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김재규의 발작증, 박 대통령은 몰랐다”, “차지철 그놈 죽여야” 김

fabiano 0 1928  

[김종필의 '소이부답'] <65> 김재규 등장과 종말의 시작
 
1973년 12월 27일 서울 중앙청 국무총리 집무실로 김재규 중정차장이 찾아와 김종필 총리에게 신임 인사를하자 김 총리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있다. 김 차장은 이때부터 동갑인 JP에게 “총리 각하”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동기(육사 2기)·동향(경북 구미)이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대통령의 정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징후는 여러 군데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생활의 균형을 잡게 한 건 육 여사였다. 그분이 세상을 뜨자 대통령은 생각과 행동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박 대통령의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권력의 추는 2인자 행세를 하는 차지철 경호실장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박 대통령은 차지철과 김재규에 둘러싸였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들을 견제하지도 조정하지도 못했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충성경쟁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18년 정권, 종말의 무대에서 차지철은 불길했고 김재규는 불안했다.

 76년 12월 박 대통령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을 김재규로 바꾸었다. ‘박동선 대미 로비 의혹’으로 미국 내 한국 여론이 악화되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고무돼 국내의 반정부 운동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대통령이 정권의 고삐를 바짝 죄는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김재규는 겉으론 온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일종의 병인데 욱하는 성질이 지나쳐 한번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가지고 전후좌우 분간을 못하고 마구 욕을 해댄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땐 발작증이라고 치부했다. 요즘 말로 분노 조절 장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는 육영수 여사 서거 뒤인 74년 9월 내가 총리로 있던 내각에 건설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는 국무회의 땐 별로 발언도 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런데 국회의 정책질의에 답변하기 위해 상임위원회에 출석하면 사고를 치곤 했다.

야당 의원들이 장관을 윽박지르는 건 국회에서 예삿일인데 그걸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의원들이 장관을 공격하는 자극적인 발언을 하면 김재규는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에이, 나 이런 놈의 장관 안 한다”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여야 할 것 없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며 혀를 찼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을 가장 가깝게 모시고 마구 돈을 쓰며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의 발작증은 여덟 살이나 아래인 차지철과 경쟁하면서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고향 동생처럼 친밀하게 대했으나 그가 발작증이 있고 정보부장이 된 뒤 더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김재규가 10·26 당시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들이댈 때도 욱하는 충동에 발작증세에 빠져 있었다. 제정신이 들어 재판을 받을 때 자기가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오래전부터 준비한 거사라고 했는데, 그의 병을 알고 있는 나에겐 가소로운 얘기였다.



 김재규는 나와 동갑이지만 육사는 박 대통령과 동기생(육사 2기·46년 입교)이다. 고향도 경북 구미로 박 대통령과 동향인 데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한 경력이 있어 국민학교 선생님 출신인 박 대통령은 젊어서부터 그를 따뜻하게 살펴줬다. 박 대통령에게 김재규는 차지철과 비교(5·16 혁명 때 처음 만남)하면 인연과 세월의 깊이가 달랐다. 아랫사람을 앞에 두고 좀처럼 하대하지 않던 박 대통령도 “재규” “재규”하며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혁명 뒤 김재규는 6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에 이어 육군방첩대장,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3군단장 중장으로 예편해 바로 유정회(73년) 국회의원이 됐는데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영전의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김재규처럼 30여 년을 알아온 인물을 옆에 두면 안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대통령이 그렇게 믿음을 준 자한테 목숨을 잃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1961년 12월 나주 호남비료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의장과 김재규 호남비료 사장(오른쪽·준장) .
 나는 김재규를 건설부 장관으로 만나기 전까진 그저 그의 거동만 본 정도였다. 박 대통령은 내가 군부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와 교유(交遊)할 일도 없었다. 김재규가 3군단장 시절에는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사람’이란 악평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 연유 등으로 76년 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임명 소식에 나는 ‘곤란한 인사’라고 느꼈다. 대통령이 그를 중용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유정회 의원으로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77년 12월, 5·16 때부터 나를 도왔고 국무총리 시절 내 정무비서관이었던 김진봉 의원(유정회)이 돌연 김재규 정보부장한테 붙들려 갔다. 청와대 옆에 있던 10·26의 현장, 궁정동 정보부장 안가였다. 김재규는 김진봉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 의원, 당신 이제 큰일 났소. 어제 저녁 영감(박 대통령)을 모시고 조니워커 한 병을 따서 마셨는데 ‘진봉이란 놈, 국회의원은 내가 시켜줬는데 눈만 뜨면 종필이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안달하고 있다며? 그놈 잡아서 조사해 봐’라고 하셨어. 이것 좀 봐. 영감께서 던져주신 서류야.”

1979년 6월 일본 후쿠다 전 총리 방한 때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한 김계원 비서실장(왼쪽)과 차지철 경호실장. [중앙포토]
 김재규의 언급은 있지도 않은 ‘김종필 대권 계획’을 억지로 꾸며 만들어대는 작업의 신호탄이었다. 2주일간 사라졌던 김 의원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크리스마스를 1주일쯤 남겨둔 때였다.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퀭한 눈에 덥수룩한 수염 그대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정보부는 요원들을 보내 내 집 사방을 감시·도청하는가 하면 각종 기록들을 가져가고 우리 집을 드나드는 인사들을 다 체크했다. 기업하는 나의 사돈과 친지들도 남산에 끌려가 갖은 협박과 회유로 고초를 겪었다. 김재규의 정보부는 내 행동에서 박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낌새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김진봉 의원에겐 ‘스나이더 미 대사,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JP의 서산목장을 왜 방문했느냐’ ‘JP는 왜 여당보다 야당 의원들을 자주 만나느냐’ ‘JP가 친한 군부 인사, 외교관, 언론인들이 누구냐’ 하는 것들을 캐물었다고 했다. 하나 우스운 신문 내용은 ‘김종필이 총리 때 야당 의원들이 대정부 질문을 안 하려고 한 이유, 하더라도 아프게 질문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라는 것이다. 별로 나오는 것이 없자 ‘만에 하나 박정희 대통령 유고 시 최규하 총리와 백두진 국회의장, 김종필·정일권 전 국무총리, 윤치영 전 당의장 서리 다섯 명 중 누가 뒤를 잇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해 “김종필”이라는 답을 유도했다고 하니 유치하기 그지없는 조사였다.

 김재규는 그동안 나에 관해 조사한 것들을 모두 쏟아내놓고 어떻게든 나를 제거할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 무렵 김재규와 차지철의 충성경쟁은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78년 유신헌법 2기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두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강경파와 재야 세력들은 헌법 자체를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또 내가 정치권에 있는 한 나 역시 박 대통령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대통령은 내가 당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의심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김재규와 차지철에겐 공통 목표가 있었다. 박 대통령의 심기를 미리 읽어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향해 달려 나가는 일이다. 이 목표를 위해 서로 더 큰 공을 세워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상대방을 쫓아내려다가 무리한 짓을 저지르기 십상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나를 음해하는 투서를 올린 건 차지철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77년 크리스마스이브 때 청구동 내 집을 찾아온 김재규가 실토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자기 밑에 사설 정보기관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엉뚱한 정보를 수집해 왔다는 얘기였다. 박 대통령은 차지철로부터 보고받은 투서를 김재규에게 전달했다. 김재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강박적으로 나와 내 주변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나한테 미안했던지 자기가 조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변명하느라 투서의 전달 경로를 토로한 것이었다. 김재규는 차지철한테 피해의식이 컸다. 서로 경쟁하다 자기가 모자란 것을 대통령이 탓하면 차지철 때문에 당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김재규는 입버릇처럼 “차지철, 이놈을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78년 새해가 됐다. 김재규는 또 새로운 일을 꾸몄다. 박 대통령의 종신집권 계획이었다. 종신집권은 종말의 예고였다. 2월 어느 날, 김재규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게 그 시작이다.

◆중앙정보부의 위상=민주화 시대(1987년) 이전 정권 수호의 기둥이자 정치공작의 중심이었다. 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혁명과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종필 전 총리가 창설, 초대 수장을 맡았다. 기본 임무는 국가 주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 검찰의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된 수사권을 보유하고, 국회의 세부 심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예산 사용이 가능해 권한이 막강했다. 김형욱 부장(63~69년) 시절 정치공작으로 악명을 떨쳤고, 이후락 부장 재임(70~73년) 중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 말기엔 청와대 경호실과 충성경쟁을 벌였다.

인물 소사전 김진봉(金振鳳·81)=9대 국회의원. 1961년 5·16 직후 육군 대위로 근무하던 중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 비서관으로 발탁된 뒤 80년 5·17까지 JP 측근으로 활동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이었던 JP가 1차 외유(63년 2~10월)를 떠난 뒤 당을 지켰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63년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8월 30일 공화당에 들어갈 때 입당원서를 직접 받았다. 71년부터 김종필 총리의 정무비서관을 지내다 73~79년 유신정우회 1, 2기 의원에 지명됐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 규제에 묶였다. 학계(경영학)로 진로를 바꿔 명지대 부총장까지 올랐다. 현재 운정(雲庭·JP의 호)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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