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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병철 회장 ‘67 회동’ 삼성 반도체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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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3> 한국 경제의 주역 이병철·정주영
 
1975년 5월 29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김종필 국무총리. 이날 박 대통령은 방위성금을 헌납한 각계 대표를 접견하고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박 대통령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수출을 계속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먹을 것이 없어서 미국에 손을 벌려야 했던 나라, 5000년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고 체념했던 나라. 5·16 혁명을 거사했을 때, 우리의 목표는 극빈에 처한 이 나라를 배고프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국가로 일으키는 것이었다. 세계 최빈국의 그런 나라가 지금은 세계 11위의 경제강국이 됐다. 참으로 기적같이 경이로운 일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경제력을 만든 사람은 어제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님, 누나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로자를 꼽으라면 나는 두말없이 두 사람을 꼽는다. 고(故) 이병철(1910~87) 삼성그룹 회장과 고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회장이다.

 오랫동안 지켜본 두 기업가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이병철 회장은 한번 결심하면 그 일은 틀림없이 최상으로 해내고 마는 사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일단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면 ‘실패를 해도 할 수 없다’며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르지만 기업인으로서 누가 더 낫다고 가릴 수가 없다. 두 분 다 한국 경제의 잊지 못할 공로자들이다.

 이병철 회장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부터 열까지 정밀하게 알아봤다. 따질 대로 따져보고, 일본의 ‘재계 총리’로 불리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의 의견까지 물어본 뒤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때야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댔다. 1967년 말 어느 날, 중화학공업 쪽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이병철 회장한테 이제 중화학공업을 좀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좀 물어봐.” 이 회장을 만나 대통령 말씀을 전했다. 그는 한참을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결심이 섰는지 “대통령 뵈러 갑시다”라며 일어섰다.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내게 말했던 대로 이 회장에게 “중화학공업에 손을 대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회장이 “중화학공업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자 박 대통령은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공업 중 하나를 해보십시오”라고 제안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돼서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채택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삼성전자다.

 69년 수원에 삼성전자의 첫 공장이 들어섰다. 나는 이 회장과 함께 최신 설비의 TV와 라디오 생산공장을 돌아보았다. “ 전력을 들여서 한번 해보겠소”라는 이 회장 말에 힘이 느껴졌다. 나는 “이 회장님은 대한민국 제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성격 아니십니까. 한번 해보십시오”라고 응원했다. 그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대한민국 제일이란 말이 무색할 수준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내가 총리로 재임하던 71년 어느 날이었다. 이 회장이 총리실로 찾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장소를 찾아봤더니 경기도 용인 쪽이 제일 좋은데, 거기에 섞여 있는 국유지를 사지 못해 골치가 아픕니다”고 하소연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유럽의 티볼리나 미국의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를 세우려고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그가 “산림청이 땅을 나한테 좀 팔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산림청장을 만났더니 땅을 절대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산림 녹화가 국정의 주요 목표였던 시절이다. 하도 강경하게 반대하기에 머리를 짜냈다. 나는 이 회장에게 “정부 땅의 두 배쯤 되는 땅을 사서 주고 용인 땅과 교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바로 “ 그거 좋습니다”며 반겼다. 산림청은 대토(代土)를 받고 삼성에 땅을 내줬다. 그 자리에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뀐 용인 자연농원이 들어섰다. 테마파크의 원조가 이렇게 탄생됐다.

생전에 이병철 회장과는 퍽 가깝게 지냈다. 나는 이 회장과 정기적으로 골프를 치는 ‘수요회’ 멤버였는데, 늘 그와 한 조를 이뤄 라운딩을 했다. 골프장에서 그는 제대로 샷을 날리고서 나를 향해 “못~ 됐지요~”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자신의 성격대로 정교하게 또박또박 공을 잘 치고서는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그의 소나무 사랑은 대단했다. 골프를 치면서도 필드 양옆에 소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민감하게 신경을 썼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선 기술이 모자라서 소나무를 옮겨 심으면 90%가 죽었다. 그게 안타까웠던 이병철 회장은 직접 일본에 가서 이식기술을 배워 왔다. 소나무를 이식할 땐 그 뿌리를 가마니로 싸서 묶어두었다가 얼마 지나 아픈 기운이 좀 없어지면 그때 옮겨 심어야 한다. 그가 내게 가르쳐준 소나무 다루는 비법이다. 기업 경영뿐 아니라 취미에 있어서도 이 회장은 그렇게 정성을 쏟았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배포와 뚝심이 대단했다. 이거 괜찮겠다 싶은 일엔 무섭게 달려들곤 했다. 정 회장이 본격적으로 국산 자동차 개발에 뛰어들 때도 그랬다. 73년 어느 날, 정 회장이 국무총리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100% 국산 자동차를 만들려고 하는데 총리가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62년에 국산 새나라자동차를 생산하다가 실패를 맛본 나로서는 매우 환영할 일이었으나, 그런 일이라면 경제기획원을 통해 대통령께 말씀드리는 게 마땅한 절차였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상공부와 경제기획원이 반대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만든다 한들 그게 수출이 되겠느냐, 라는 이유였다. 나는 “대통령께서 기계공업에 관심이 크신데 말씀은 드려 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정주영 회장은 “말씀드렸더니 대통령이 ‘모두가 반대하대…’라고 하신 뒤 대답이 없으십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정 회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다.

1970년대 흑백 TV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수원공장. 아래는 75년 12월 첫 생산한 현대자동차 포니.
 나는 박 대통령에게 “정주영 회장은 뭐든지 결심하면 해내지 않습니까. 믿고서 한번 하게 해보시지요”라고 건의드렸다. 박 대통령은 “될까? 장관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될까?”라며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재차 강하게 이야기했다. “될까가 아니라 되게끔 해야지요!” 박 대통령은 나와 정 회장이 거듭 말씀드리자 고민을 접고, “내가 설득당했구먼. 그래, 그거 잘해보시오”라고 승낙하셨다. 현대자동차는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맺고 74년 7월 울산에 국산 종합자동차공장을 착공했다. 그 결과 75년 12월 탄생한 국산 고유모델 1호 자동차가 ‘포니’였다. 이것이 세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현대자동차의 시작이었다.

  기아자동차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김철호 기아산업 사장은 오토바이급인 삼륜 화물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를 데리고 청와대에 갔다. 김 사장이 박 대통령한테 대뜸 “각하, 바퀴 하나만 더 붙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거 무슨 소리요?”라고 되물었는데, 네 바퀴 달린 자동차공장을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박 대통령이 “해보시오”라고 허락을 했고, 그 후로 기아자동차는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자동차와 함께 오늘날 세계시장을 누비고 있다. 대우에서 만든 최초의 경차인 ‘티코’ 1호도 내가 처음으로 중앙청을 돌며 시운전했었다. 자동차와 나의 인연은 이처럼 깊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1972년 2월 24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울산 현대조선소 부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날 김 총리는 “공업의 역군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72년 3월 건설 공사를 시작한 현대조선은 2년3개월 만인 74년 6월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준공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마주친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벅차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지을 부지인 백사장 사진 몇 장만 들고 유럽을 다니며 유조선 수주를 따내서 세운 바로 그 조선소다. 73년 7월 헬기를 타고 현대조선소를 방문했다. 30여 명의 젊은 직원이 아직 채 완공되지 않은 조선소 바닥에 엎드려서 일하고 있었다. 영어 원서를 옆에 펼쳐놓고서 설계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여간 대견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학교를 어디 나왔느냐고 물으니 당시 공과대학으로 이름났던 한양대·경희대 공대를 나왔다고 했다. 그 시절,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시골의 부모님이 키우던 소를 팔아서 비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 부모님의 땀과 정성으로 세워진 우골탑이 바로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기초가 됐다.

 많은 기업인이 있지만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두 분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만든 주역이다. 국방은 이순신 장군, 문화는 세종대왕이 상징이다. 두 회장의 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동상을 광화문 광장에 세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에 경제 공로자 두 분의 동상이 세워졌으면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우리 후손들이 그 두 동상 앞에 서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상상한다. 더불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과 조국 근대화를 이룬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 세워지는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기를 희원한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1904~87)=일본을 철강대국으로 부상시킨 인물. 상공성 관료로 일하다 야하타 제철소에 들어가 62년 사장에 올랐다. 70년 후지제철과 합병해 신일본제철을 탄생시켜 초대 사장·회장을 지냈다. 일본 철강업의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이끌었다. 80~86년엔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에 철강 기술을 전수해줌으로써 포항제철소 설립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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