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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뭘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 낙심한 박정희의 화살, 과녁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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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0> 유신의 책사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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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 통영 한산도에서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뒤 한산정(閑山亭)에 올라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왜군을 격파 , 한산대첩을 이룬 곳이다. 박 대통령은 평소 청와대 뒤뜰에서도 육영수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활쏘기를 할 정도로 국궁(國弓)을 가까이했다. 이순신 장군 탄신일엔 현충사에서 활을 잡았다. [중앙포토]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634만여 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95만 표는 상식적으론 많은 차이지만 박 대통령의 기대치에 미흡했다. 그의 생각이 깊어졌다.

 대선 다음 날 중앙선관위의 대선 결과를 통해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인한 나는 충남 서산농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열리는 충무공 탄신 기념행사에 참석하니 오라는 주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매년 4월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이 되면 육영수 여사와 함께 현충사에 들러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행사를 마치면 으레 경내의 활터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평소 활 쏘는 것을 좋아했다. 오른손잡이지만 가끔 왼손으로 활을 잡기도 할 정도였다. 145m 거리의 먼 과녁에 열 발을 쏘면 서너 개는 맞혔다. 그런데 그날은 하나도 안 맞았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그땐 짐작을 못했다. 뭔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요동을 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현충사 행사에 참석한 뒤엔 늘 온양관광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박 대통령이 5층 숙소로 올라오라고 했다. 육 여사는 옆방으로 가 있으라고 했는지 대통령 혼자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음…’ 하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났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7대 대통령선거에서 나는 적어도 100만 표 이상 차이로 박 대통령이 이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후락은 200만 표라고 장담했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69년 3선 개헌 찬성으로 돌아서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나로서는 또 한 번의 개헌을 시사(示唆)하는 박 대통령의 말을 걱정 반(半), 긍정 반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알게 됐지만 그날 박 대통령의 마음속에 10월 유신(維新·72년)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국내외 안보 상황은 긴박했다. 한 달 전인 3월 27일 미국 닉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주한미군 2만2000명(7사단)이 철수했다. 북한의 무력과 경제력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는 가운데 김일성은 자신의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박 대통령은 안팎의 위기를 돌파할 비상한 정치체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유신의 기본 계획을 만들고 실무책임을 맡은 건 이후락(1924~2009)이었다. 그는 혁명 주체세력도 아니면서 대통령 비서실장(1963~69)에 중앙정보부장(1970~73)까지 지낸 인물이다. 공화당 4인 체제의 선두주자 김성곤 의원과 함께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주도했고, 3년 뒤 또다시 10월 유신으로 박 대통령을 장기집권 체제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할 때 박정희 당시 작전정보실장(문관)과 이후락, 나 이렇게 세 사람의 인연이 얽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6·25가 나던 50년 초 나와 박정희 실장이 다옥동(茶屋洞, ※현 중구 다동, 일제시대 다옥정(町)이란 동명이었지만 46년 6월 한국식 동명인 다동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당 기간 일제식 동명을 썼다)에서 술을 잔뜩 마시다 보니 통행금지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나는 서울역까지 걸어가 ‘리어카 자전거’를 타고 삼각지까지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그땐 서울역 앞에 자전거 뒤를 리어카처럼 만들어 인력거식으로 영업하던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박 실장은 용산의 삼각지 뒤쪽 옛날 일본군이 쓰다 떠나 버린 육군 관사에, 나는 이태원에 숙소가 있을 때였다.

 박 실장은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락씨가 요즘 여기 다옥여관에서 지내고 있어. 그 사람 지프가 있을 테니까 그것 좀 빌려 타고 가자.” 다옥여관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하나 나오기에 “이후락씨 있느냐”고 물었더니 시큰둥하게 “잔다”고 답했다. 다시 “박정희란 사람이 왔으니 잠깐 좀 만나자고 전해라”고 말했다. 잠시 뒤 안에서 “잔다고 그래”라고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락의 말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락은 박 실장이 훗날 큰일을 할 분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다분히 속으로 ‘공산주의자가 되려다 수가 틀린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51년 육본 정보국 차장(대령) 시절의 이후락. 이때 나이가 27세. 해방 직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 임관한 덕에 진급이 빨랐다. [중앙포토]
 박 실장과 나는 하는 수 없이 서울역까지 걸어가 리어카 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강기정(岡崎町, 지금의 용산구 갈월동)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기분이 좋아 막 소리를 질렀다. 인근 파출소에서 경관 한 명이 나오더니 “서라”고 했다. 우린 “그런다고 설 사람이 아냐~”라고 대꾸하고는 삼각지까지 마구 내달렸다.

 이후락을 혁명정부에 끌어들인 사람은 나였다. 일본 항공하사관 특별 간부 후보생 과정을 졸업했으며, 해방 후 바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박 대통령보다 임관이 빨랐다. 출발이 이른 덕에 출세도 빨랐다. 27세에 대령을, 29세에 별을 달았다. 이승만 정권에서 주미 대사관 무관을 거쳐 국방부 장관 직할 정보부서인 79부대의 책임자를 맡았고, 4·19 이후 장면 정부의 정보기구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차관급)을 지냈다. 79부대는 이후락이 자기 군번인 10079의 숫자를 따서 작명했다. 5·16 직후엔 이후락이 장면 정부에 충성하고 혁명을 방해하려 했다고 해서 혁명군에 체포돼 한 달간 마포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그런 이후락을 살리는 데 내가 나섰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이후락이 잡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다닐 때인데, 이병희(1926~97, 육사 8기) 중정 서울지부장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 둘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보고했다. 나는 맞는 얘기라 보고 혁명 주체들에게 “그 사람의 직책이 장면 정부의 정보부장이다.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라도 우리 혁명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박 대통령하고도 잘 아는 사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후락이 육본 정보국 차장으로 있을 때 과장으로 있던 내가 모신 인연도 있었다. 그를 직접 만나 “격동기가 되다 보니까 일이 잘못돼 유감스럽게 고통을 준 것 같은데 이제부터 혁명정부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는 냉큼 “아, 내가 여부(與否)가 있소? 뭐든 하겠소.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신세가 됐는지 나도 모르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내가 지켜본 이후락은 이해가 빠르고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킨 게 당시 영자신문사 ‘코리아 리퍼블릭’의 사장이었다. 그는 신문사 운영을 잘했다. 비교적 공정하게 신문을 잘 만들어 주한 외교사절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다.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도 이후락이 신문사에서 이것저것 하는 게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박 의장은 61년 12월 나에게 “이후락을 써 보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내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쓰시겠다면 데려오죠”라고 답했다. 이후락은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됐다.

그는 윗사람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뭘 지시하면 “예예예 그렇습니다~” 하면서 재빨리 만들어 왔다. 박 의장은 그런 이후락이 좋았던 모양이다. 63년 10월 대선 승리로 당과 정부를 새로 정비하면서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중용했다.


● 인물 소사전 이병희(1926~97)=경기도 용인 출생. 육사 8기로 임관해 육군 특무대 등 정보·수사기관에 근무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JP)과의 친분으로 중앙정보부 서울시지부장을 지내다 62년 공화당 사전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63년 6대 총선에서 수원에 출마해 당선된 뒤 7·8·9·10·13·15대 7선 의원을 기록했다. 80년 신군부 집권으로 정치 규제에 묶였으며 87년 신민주공화당, 95년 자민련에 입당해 JP와 정치 행로를 함께했다. 64년부터 80년까지 대한농구협회장 역임.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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