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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죽자고 혁명했잖아, 도와줘” 눈물 글썽인 박정희 … “각하와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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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7>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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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1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종필 국무총리가 식사(式辭)를 하고 있다. 69년 3선 개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 출마해 성공한 것이다. 김 총리는 “박 대통령을 거듭 선출한 것은 민족 중흥과 근대화, 통일 과업을 성취하려는 염원의 발로”라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 총리와 부인 박영옥 여사, 민복기 대법원장 부부, 박정희 대통령, 큰딸 박근혜, 육영수 여사. [사진 국가기록원]

1969년 초반 정국은 3선 개헌(三選改憲) 논의로 시끌시끌했다. 모든 공직을 던지고 정계를 떠나 있었지만 3선 개헌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했다. 장기 집권에 항거한 4·19의 교훈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재건을 위해 궐기한 5·16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고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 혁명의 지도자로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3선 개헌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민주공화당 안에서 개헌을 추진하는 당 지도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양순직·예춘호·박종태·신윤창 의원은 69년 2월 초 의원총회에서 개헌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업적을 역사에 새기기 위해서라도 개헌은 안 된다. 민주적인 정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하순 양순직·김택수·박종태 의원과 한남동에서 만났다. 저녁 식사 자리는 개헌 성토장이 됐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의 민주 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서도 3선 개헌은 반대한다”는 강한 소신을 밝혔다. 당적 없는 야인(野人)이라 해도 나의 이러한 입장 표시에 당내 개헌 반대 세력들은 힘을 얻었다. 정구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 구주류계 의원들은 개헌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4인 체제(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들을 돌려놓기 위한 설득과 회유, 협박에 나섰다.



 2월 말부터 두 달간 나는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사이 공화당 내 개헌 찬반 세력의 갈등이 국회에서 4·8 항명 사태로 불거져 나왔다.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 공화당 의원 40명 이상이 찬성표를 던져 가결된 것이다(참석 152명 중 찬성 89표). 박 대통령 시대가 열린 뒤 최초의 항명 사건이었다. 권 장관은 무리한 정책 추진과 의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로 여야 할 것 없이 거부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항명을 주도한 건 구주류계였던 양순직·예춘호·박종태·정태성·김달수 의원이었다. 개헌 반대파의 핵심이었던 이들 5명은 항명을 이유로 모두 당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69년 7월, 칩거하고 있던 청구동 집으로 이후락 비서실장이 불쑥 찾아왔다. 내가 당의장에 있을 때 끊임없이 견제하더니 3선 개헌 반대운동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반대 세력 설득을 위해 내가 필요해진 것이다. 당시 개헌 추진 세력이 총동원돼 포섭한 찬성 의원은 90명 에 불과했다. 그는 “각하께서 부르신다”며 청와대에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각하의 의사냐, 당신의 권유냐? 당신이 꾸민 것이라면 나는 안 가겠다”고 했다. 이후락은 “각하께서 불러오라고 하셨다”며 재차 권했다. 그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집무실로 들어가자 박 대통령이 문 앞에 서서 맞이했다. 이후락은 들어오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박 대통령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라고 말을 건넸다. 내가 “그냥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요즘 돌아가는 얘기를 들었겠지? 임자는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의견을 털어놨다. “반대하는 의원들 때문에 심통해 있으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하를 생각해서 걱정하는 거지 각하께 반항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모두 순수한 생각이지, 저를 표면에 내세우기 위해서 개헌을 저지하겠다는 생각들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임자밖에 없어. 임자가 날 도와야지 누가 날 도울 거야. 날 도와주고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줘. 이번 한 기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되겠어?”라고 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

 대통령의 눈에 눈물까지 글썽글썽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리 두 사람이 지프차를 타고 처음으로 혁명을 다짐했던 그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통령과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을 결의했다. 나를 붙잡고 있는 대통령의 손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 입에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박 대통령은 “그럼 조금 더 생각하고 다음에 얘기하자”며 나를 놓아줬다.

1970년 1월 30일 청와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이후락 주일대사가 부임을 앞두고 인사차 청구동 김종필 전 공화당 의장 자택을 찾았다. [중앙포토]
 며칠 뒤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뉴코리아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치러 가자면서 시커먼 지프차를 갖고 나오셨다. 나는 박 대통령과 함께 지프차 뒷자리에 탔다. 앞자리 조수석엔 신동관 경호실 차장이 타고, 경호원 몇 사람은 다른 차로 뒤따라왔다. 박 대통령은 내게 “그래, 생각을 좀 해봤어?”라고 물었다. 나는 “생각을 해봤는데,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냉큼 찬성이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명분이 뭐 있어. 하는 것이 명분이지”라고 했다. 이어서 대통령은 이런 말로 나를 설득했다. “우린 혁명을 하지 않았나. 그 이전에 있던 모든 질서와 체제 일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혁명을 했어. 그 정신에서 볼 때 3선 개헌 아니라 4선 개헌이라도 필요하면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나도 내 의견을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이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나아가는 과정에 이것저것 기복이 있다고 해도 이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는 동감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기에도 각하 이외엔 이 나라를 이끌어갈 분이 없습니다. 그런 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개헌을 하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들 겁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힘이 드니까 임자가 좀 선두에 서서 해달라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골프를 치고 식사하는 동안 개헌 문제를 서로 꺼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박 대통령이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조금 더 얘기하자고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골프장으로 올 때 나눴던 이야기가 되풀이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은 찬성을 하게 되지가 않습니다”라고만 했다.

 며칠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이 왔다. 박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자네가 찬성해주지 않으면 이건 안 되는 일이야! 그동안 생각해봤어?”라고 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마지막 답을 내놨다. “정 그러시다면…, 하시지요.” 대통령과 나는 혈맹(血盟)이었다. 박 대통령은 내 아내 박영옥의 삼촌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그런 관계였다. 결국 청와대에 세 번을 불려가 내 주장을 꺾었다. 박 대통령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대통령은 “임자가 이제 좀 돌아다니면서 설득해줬으면 해. 임자가 설득하면 많이들 귀를 기울일 거야. 해줘”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나는 며칠 만에 돌아서고 말았다. 그토록 굳게 결심하고 나를 설득하는데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을 해서 더 일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대통령이 이 나라에 근대화의 꽃을 피우겠다고 결심한 이상 도와드리는 게 정도(正道)라고 여겼다. 앞으로 개헌 지지로 인한 상흔과 고통이 개헌 반대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감내하면서, 박 대통령을 모시고 혁명을 한 나로서는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끝까지 모시고 끝까지 같이 가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물러났다.

 내가 개헌 지지로 돌아서자 항간에는 어떤 보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후계자로 삼겠다거나 그에 준하는 자리를 약속받았을 것이란 얘기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후계자 문제는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건 박 대통령과 나 사이에 무언가를 주고받은 거래나 일방적인 강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나와 대통령은 혁명을 같이한 죄로 죽음으로써 그 책임도 함께 질 수밖에 없는 혁명적 의리로 맺어진 관계다. 박 대통령이 혁명적 의리로 호소하는데 그걸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게 3선 개헌 지지의 진실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양순직(1925~2008)=민주공화당 내 3선 개헌 반대파의 대표 인물. 충남 논산·서울대 사대 출신으로 해군본부 정훈차감과 서울신문 사장(1962년)을 거쳐 6·7·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 재경위원장이었던 69년 ‘4·8 항명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제명당한다. 이후 무소속 의원으로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였다. 79년 11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재야세력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가담했고, 87년엔 김대중(DJ)과 손잡고 평민당 부총재를 맡았다. 이후 국민당 상임고문, 신민당 최고위원, 자민련 상임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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