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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차고 JP 호위병 되겠다”던 김형욱, 중정부장 권력 맛본 뒤 사람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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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2> 김형욱과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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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7일 김종필(JP·왼쪽) 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전역식을 갖고 예편했다. 전역식 직후 육사 8기 동기생인 김형욱 최고위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JP는 이날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1등 보국훈장 통일장을 수여받고 정보부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1월 18일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에 취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형욱은 JP의 충실한 지지자였다. [사진 국가기록원]

내 인생의 여러 인연들 가운데 김성곤·김형욱·이후락은 악연에 속한다. 셋 모두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추천했고 한 시대를 누렸다. 그들은 나와 박 대통령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그 가운데 김형욱은 1973년부터 박 대통령과 조국을 배신하고 미국 망명객 행세를 하면서 죽을 때(79년 파리에서 실종)까지 대결 자세를 취했다. 김성곤은 그래도 사업과 정치, 사상 문제의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인생무상을 맛봤던 인물이었다. 말년엔 나와 화해했다. 이후락은 재간을 부리며 권력을 추구했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성심(誠心)은 갖고 있었다.

 


김형욱은 왜 박 대통령에게 끝까지 대들었을까. 나는 그의 인간적인 문제에 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형욱은 자기가 힘이 있고 치밀하다는 터무니없는 자부심에 사로잡혔다. 권력으로 그러모은 돈을 해외에 빼돌리거나 미국 CIA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자만이 있었다. 육영수 여사도 그의 월권(越權)과 인간성에 위험을 느꼈다. 박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경질을 건의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3선 개헌(69년 10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 직후 김형욱을 그만두게 했다. 이것저것 종합해 보면 ‘언제 김형욱이 내게도 덤빌지 모른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김형욱은 61년 내가 국가정보기관(중앙정보부)을 창설한 이래 지금까지 최장수 정보기관장(63년 7월 12일~69년 10월 20일)이다. 정보부장 김형욱은 저돌적이고 예리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저돌성을 높이 사 중용했다. 중앙정보부를 이끄는 데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김형욱을 둔하다고 보면 큰일 난다. 그는 아주 예리한 측면이 있었다. 자기 이해관계가 걸린 일엔 몇 사람이 달라붙어 꾀를 내도 그를 이기기 힘들 정도다.

 김형욱 인간성의 여러 색깔은 골프를 칠 때 잘 나타났다. 신진자동차 김창원(1917~96) 사장은 김형욱 전성시대의 단골 골프 멤버였다.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박태원(1924~2007) 경기지사도 그 멤버였다. 그들은 늘 내기 골프를 쳤는데 사람 좋은 김창원 사장은 김형욱의 먹잇감이었다. 김 사장이 오죽하면 나에게 “김형욱과 골프를 치면 이겨도 돈 받아본 사람이 없고 지고서도 돈 안 뺏겨 본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상대를 안 할 수도 없고…”라고 하소연했겠는가. 필드에 넷이 모이면 김형욱은 익살스럽게 오른손 검지를 펴 안경알 옆에 턱 갖다 댄다. 점(타수)당 100만원(짜장면 값 기준 지금 3000만원)짜리 내기를 하자는 표시다. 코스를 돌다가 공이 잘 안 맞으면 “더블” “프레스”를 연거푸 외치면서 두 배, 네 배 내기 값을 올린다. 겉으론 웃지만 눈매 무서운 중앙정보부장의 서슬에 반대할 수도 없다.

 김형욱이 불리해져 돈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저쪽 필드 바깥에 있던 수행비서가 고꾸라지듯 급하게 뛰어온다. 그러고선 숨을 몰아쉬며 큰소리로 한다는 말이 “부장님, 각하가 막 급하다고 찾으십니다.” 김형욱은 ‘왜 하필 이때 대통령이 나를 찾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 으흠. 각하가 찾으시니까 가야겠네”하면서 골프장을 빠져나간다. 돈도 안 내고 줄행랑을 놓는 그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김형욱이 실각하고 71년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70년 봄, 그는 골프 치자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쓸쓸히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터무니없이 괴롭혔지만 위로 전화를 하고 골프를 한번 치자고 했다. 그가 김창원 사장, 김성곤 회장을 불러 달래서 넷이 같이 골프장에 나갔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울컨트리클럽이었다. 라운딩 도중에 내가 김창원에게 “이제 김 부장은 벼슬이 다 떨어져 무서운 존재가 못 되니, 오늘은 그동안 말 못하고 당했던 원한을 마음껏 풀어보세요”라고 했더니 김 사장은 “그렇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뭐가 무섭겠습니까. 오늘은 원수를 좀 갚아 줄랍니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 순간 김형욱이 험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봐 김 사장, 당신은 호랑이가 왜 무서운지 모르는구먼. 그래 이빨은 빠졌다 치자. 하지만 진짜 무서운 발톱이 남아 있어. 이리 와. 갈기갈기 찢어줄게”라고 했다. 이 기막힌 순발력에 김창원 사장은 저만치 달아났다.

 김형욱은 상대방의 약점을 순발력 있게 파고드는 힘이 있다. 그의 별명처럼 멧돼지 같은 저돌성 뒤엔 예리한 호랑이 발톱이 숨겨져 있다. 미국으로 도망가기 전 김형욱은 내게 이런 소리를 자주 했다. “나를 미련한 놈으로 여기는 놈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그 두 배 세 배로 내가 재간을 부린다고.” 일본 속담에 ‘한 줄 새끼 갖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김형욱의 성향은 이렇게 여러 새끼줄이 꼬여 만들어졌다.

196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수행했다. [중앙포토]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나와 동갑에 육사 8기 동기생이다. 49년 육사 졸업과 함께 나는 바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로 배치됐지만 김형욱은 전방 소대장으로 나갔다. 그가 60년 3월 육본 작전참모부로 오게 돼 우리는 11년 만에 해후했다. 4·19 의거를 겪고 나는 군 내 부정선거 문책과 부패 장성의 숙정을 주장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이끌었다. 5월 8일 이른바 ‘정군 연판장’을 작성하기 위해 청파동 우리 집에 모인 동기생 8명 중에는 김형욱이 있었고, 5월 17일 국가변란음모죄로 육군 방첩대에 나와 함께 구속된 5명 중의 한 명도 김형욱이었다. 그는 나한테만은 충성(忠誠)으로 느낄 만큼 깍듯이 행동했다. 정군운동부터 5·16 혁명, 나의 1차 외유, 그리고 그가 4대 중앙정보부장이 되던 63년 7월까지 김형욱은 시종여일 그런 태도를 견지했다. “내가 권총 차고 네 호위병이 되겠다. 어떤 위협이 오고 어떤 희생을 당하더라도 너를 돕겠다”는 결의를 밝히곤 했다.

 그랬던 김형욱은 자리가 달라지면서 사람까지 달라졌다. 정보부장이 돼서 가만히 앉아 보니까 권력이 좀 재밌었던 모양이다. 인간이 자꾸 변해 갔다. 장소가 달라지면 물건도 변한다는 격언이 있는데 김형욱이 그런 경우다. 60년대 정보부장 때 박 대통령에게 바쳤던 절대적 충성은 70년대 미국에 가서 적대적 공격으로 돌변했다. “나 좋지 않게 건드리면 하나부터 열까지 부조리를 전부 미국에 알려주겠다”며 마구 박 대통령을 물고 덤벼댄 것이다.

 다시 63년으로 돌아가 보자.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이던 나는 2월 25일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났다. 내가 떠난 권력의 빈자리는 이른바 ‘반(反)JP 세력’의 선봉장인 김재춘 3대 정보부장(2월 21일 임명)이 차고 들어왔다. 그는 혁명 거사 때 육사 5기의 대표로서 실병력을 지휘한 공을 내세워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김재춘은 혁명정부의 이른바 5기파·이북파·장군파 세력을 규합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민정불참 선언’을 하도록 포위, 압박했다. 박 의장은 고심하면서 그 세력에 밀려 김재춘을 중정부장에 임명해 버렸다. 김재춘의 다음 수순은 내가 만든 공화당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구정치인과 혁명 주체 중 자파세력을 끌어들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이란 언필칭 범국민정당을 만들었다. 김재춘은 정보부의 전국적 조직과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신당을 급조해 갔다. 얼마나 급하게 당을 꾸몄는지 ‘범탕’이란 우스개 별명까지 얻었다. 김재춘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취해 있었다. 박 의장과 상의 없이 멋대로 새 당을 만들어 갔다.

 이때 박 의장 옆에 착 달라붙어 김재춘을 배격하고 공화당에 올라타야 한다고 밀어붙인 인물이 김형욱 최고회의 운영위원장이었다. 내가 해외에 있었지만 그의 정치노선은 내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김형욱은 최고회의에선 홍종철·길재호, 공화당에선 김동환·신윤창·오학진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내 입장을 대변했다. 박 대통령에게 ‘민정 참여’ ‘대선 출마’를 결단하도록 몰아갔다. 63년 7월 12일, 박정희 의장은 김재춘을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김형욱을 앉혔다. 떠들썩하던 김재춘이 5개월 만에 쫓겨났다. 6년3개월에 걸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인물 소사전 김창원(金昌源·1917~96)=한국 자동차산업의 개척자다. 옛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를 설립했다. 1955년 신진공업사를 세워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고, 군용차량 엔진을 재생하고 드럼통을 펴 승용차 ‘신성호(新星號)’를 만들었다. 65년 외자 고갈로 문을 닫은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해 신진자동차로 재출범시켰다. 이듬해 일본 도요타와 제휴, ‘코로나’를 생산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산 자동차를 보급해 자동차공업을 일으켰다. 70년대 들어 기아·현대 등 후발업체와의 경쟁에 밀려 결국 자동차산업에서 손을 뗐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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