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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책임제 총리 꿈꾸던 김성곤 “오치성도 못 치냐” 항명 주도…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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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0> 10·2 항명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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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신년 회에서 김종필 국무총리가 김성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JP 견제에 앞장섰던 김성곤은 71년 항명파동으로 정계를 떠난 뒤 JP의 천거로 73년 상의 회장을 맡았다.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한 민주공화당의 4인 체제(김성곤·백남억·길재호·김진만)는 기세가 등등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연임을 성공시킨 이들의 세력은 공고해 보였다. 하지만 4인체제가 무너지는 건 하루아침의 일이었다. 바로 71년 ‘10·2 항명파동’ 사건이다.

 71년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이 오치성 내무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신직수 법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원 204명 중 공화당이 113명이었다. 공화당은 해임안을 본회의에서 부결시키기로 당론을 정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육사 8기 출신인 오치성은 박 대통령이 직접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오치성 장관은 김성곤(성곡·省谷)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싸움이 붙어 있었다. 김성곤은 쓸 만한 경찰 정보를 박 대통령에게 종종 보고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경찰총수인 오치성 내무장관에게 “이런 일 아느냐”고 물으면 모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벌어지자 오치성이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 각 도의 경찰국장들이 상당액의 활동비를 김성곤으로부터 매달 받고 있었다. 경찰국장들이 내무장관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슨 일이 생기면 김성곤에게 먼저 보고했다. 오치성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국무총리인 나를 찾아와서 “경찰이 내무장관이 아닌 김성곤 관할하에 있다. 김성곤이 뭔데 세상을 어질러 놓느냐”며 야단을 했다. 나와 육사 동기인 그는 흥분하면 나오는 버릇대로 웃옷자락을 잡아 뜯으며 씩씩거렸다. 나는 “그렇게 표 나게 싸우면 안 된다. 참고 정당한 방법으로 압력이 들어가게 해보라”고 말렸다. 그래도 오치성은 “단도직입으로 덤벼야 한다”며 별렀다. 71년 8월 오치성은 경찰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4인 체제의 손발 노릇을 했던 경찰들이 대거 교체됐다.

 김성곤을 포함한 4인방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오치성을 쫓아내기로 뜻을 모았다. 상당수의 야당 의원들도 정치자금을 주무르는 김성곤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때다. 김성곤이 야당의원들로 하여금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백남억 당의장을 불러 그만두게 하라고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해임안이 국회에 제출된 9월 30일 밤 나는 서울 신문로에 있는 김성곤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단둘이 술을 마시면서 그를 붙잡고 설득했다.

 “오치성을 쫓아내면 결국 대통령한테 덤벼드는 일인데 그건 안 됩니다. 지금 ‘내 세력이 이만큼 크다’ 하는 걸 대통령에게 보이려고 하는 모양인데, 어림없습니다. 대통령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아직 모릅니까. 잘못하면 당신이 다칩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 오치성이가 나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기색이 있어요. 자기가 내무장관이면 답니까”라며 열을 올렸다. 내가 “오치성과 정 같이 일할 수 없으면 대통령한테 경질을 건의드리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미 결심이 돼서 하게 됐으니 일 없습니다”라며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난 내무장관을 치는 거지, 대통령을 치는 게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새벽 2시까지 설득했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 김성곤은 자신감이 있었을 거다. ‘정치하는 데 돈이 필요하니까, 그래도 대통령이 날 찾을 거다. 나 없이 되나’라고 생각한 듯했다.

1969년 7월 공화당 사무총장 이·취임식에서 인사를 나누는 전임 길재호(왼쪽)와 신임 사무총장 오치성(오른쪽). 가운데는 윤치영 당의장 서리. [중앙포토]
 10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3부 장관 해임건의안 찬반 투표가 진행됐다. 국회의원이자 국무총리인 나도 투표를 위해 본회의장에 있었다. 김학렬·신직수 장관 해임안은 부결됐지만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은 가결됐다(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김성곤은 의기양양해서 자기 휘하의 국회의원 몇 명과 함께 지프를 타고 골프를 치러 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질을 잘 아는 나는 ‘이거 야단났다’ 싶었다.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국회 표결 결과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이것들이 나한테 덤비는 거야?”라며 흥분했다. 노기 어린 목소리로 “중앙정보부장 불러!”라고 소리쳤다. 그 자리에 벌써 대령해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이 “ㅈㅈㅈ···저 여기 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후락은 급할 때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었다. “김성곤 일당을 다 잡아들여! 무슨 마음을 가지고 항명했는지 전부 조사해!”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후락 부장은 “예. 다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답하더니 나갔다.

 주동자인 김성곤·길재호를 포함해 항명에 가담한 공화당 의원 20여 명이 그날 밤 남산 중앙정보부에 붙들려 갔다. 대통령의 화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정보부 요원들은 김성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의 콧수염을 잡아당겨 뽑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성곤·길재호 두 사람은 탈당계를 내고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났다. 그때 법은 탈당을 하면 의원직을 상실했다. 함께 항명을 준비했던 4인방 중 눈치 빠른 백남억과 김진만은 표결할 때 참여하지 않아 화를 면했다.

75년 2월 26일 김종필 총리가 김성곤의 빈소에 들러 문상하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73년 1월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김성곤과 다시 만났다. 그는 정계에서 쫓겨난 뒤 보스턴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지난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대통령이 당신을 부당하게 쫓아낸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 씨를 뿌린 겁니다”라고 말했다. 김성곤도 “내가 미련한 짓을 했습니다. 어디 대통령한테 그렇게 대들 수가 있소.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수긍했다. 나는 “무엇을 해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뭐든지 본국에 들어가서 아무 일이나 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고 답했다.

 그날 저녁 박 대통령한테 전화를 걸어 말씀드렸다. “각하, 제가 여기서 성곡을 만났는데 뭐 하나 시켜주면 다시 심기일전해서 각하께 충성을 하겠다고 합니다. 풀이 죽어 있는 걸 보니 안됐어요. 일자리 하나 주시지요.” 박 대통령은 웃으면서 “뭐든지 하겠대? 또 한번 속으란 말이야?”라고 했다. 나는 “이젠 그런 일 못할 테니 하나 시켜주시죠”라고 청했다. 대통령은 “알았으니 기다려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뒤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상공회의소 회장, 그거 시키면 하겠느냐고 성곡에게 물어봐.” 김성곤에게 이 말을 전하니 “감지덕지(感之德之)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고마워했다. 나는 그에게 “작건 크건 상부상조하면서 사는 게 사회 아닙니까. 일 잘하면서 대통령을 잘 도와 드리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성곤은 73년 9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재기해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75년 2월 성곡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예순둘에 뇌출혈로 집에서 쓰러져서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그날 저녁 운명했다. 그가 그렇게 간단하게 세상을 등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고인의 빈소를 찾아가 박 대통령을 대신해서 그의 영전에 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했다. 새삼스레 인생무상을 뼈아프게 느꼈다. 성곡이 숨지기 얼마 전에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정치를 하면서 왜 그렇게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습니까”라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는 내게 속내를 털어놨다. “나는 대통령은 생각해 본 일 없습니다. 내각책임제에서 총리를 한번 지내보는 게 내 소원이었습니다. 여야 의원들 다수가 내 세력하에 있으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지난 얘기입니다. 헛된 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대통령이 얼마나 무서운 권력을 갖고 있는지 그때야 알았습니다. ‘여야 의원들 다수를 가지고 저항을 하면 대통령인들 덮어놓고 자기 고집을 부리겠느냐, 타협으로 나올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어림없는 생각이었습니다.” 항명파동에 대한 뒤늦은 후회였다. 성곡은 야심이 큰 정치인이었지만 너무 서둘러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스스로 기회를 흐려버리고 말았다.

● 인물 소사전  오치성(89)=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육사 8기. JP와 함께 정군운동과 5·16을 주도한 핵심 멤버다. 1963년 JP의 민주공화당에 맞서 5월동지회를 결성했지만, 결국 공화당에 합류해 6·7·8·10대 국회의원을 지낸다. 69년 당 사무총장에 이어 70년 정무담당 무임소장관에 올랐다. 71년 내무장관 재직 중 4인 체제와 갈등을 빚다가 김성곤이 주도한 ‘10·2 항명 ’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온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2 Comments
skywalker 2015.07.01 11:57  
측근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견제하던 박 전대통령의 용인술은 정말 탁월했었지요. 그런 카리스마가 없었으면 당시의 대한민국을 만들 길이 없었을겁니다.
fabiano 2015.07.01 21:59  
다소, 무리한 사례도 있었지만 작금의 정치행태를 보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박정희대통령의 카리스마적인 권위와 다소, 억압적인 통치가 우리에겐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도무지, 말같지 않은 말장난이며 행동이 기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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