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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직후 JP 찾아간 김성곤, “남로당 재정위원 경력 없애달라 …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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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9> 공화당 4인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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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은 1965년 말 민주공화당 의장에 오르지만 성곡 김성곤(SK)을 필두로 한 ‘4인 체제’의 견제에 시달린다. 60년대 후반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이었다. JP의 주류 세력과 대비해 공화당의 ‘신주류’로 불렸다. 4인 체제의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내가 두 차례 외유(外遊)하는 동안 정치 지형은 빠르게 재편됐다. 구정치인 출신인 대구·경북(TK) 세력이 나의 빈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1965년 말 나는 민주공화당 당의장으로 복귀하지만 이미 ‘4인 체제’가 당을 휘어잡고 있었다. TK의 김성곤·백남억, 이들과 손잡은 길재호·김진만 이렇게 넷이다. 그중에서도 선두는 성곡(省谷) 김성곤(1913~75)씨였다. 경북 달성 출신으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 상과를 나왔다. 80년대 재계 서열 5위였던 쌍용그룹의 창업자다.

 김성곤씨가 공화당에 합류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5·16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장실로 금성방직과 동양통신사를 운영하던 김 사장이 찾아왔다. 이름만 알던 사이였다. 그는 내게 “나 좀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슨 일인지 묻자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치안국에 나에 관한 자료가 있을 텐데 그걸 보면 내가 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라고 돼 있을 겁니다. 이게 언젠가는 나를 결딴 낼 기록인데, 김 부장께서 이걸 좀 없애주시오.” 알고 보니 남조선노동당 재정위원이었던 김성곤씨는 46년 대구 10·1사건에 연루됐었다. 대구 사건이 심상찮게 진행되자 그는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이후 안양에 금성방직을 세워서 큰돈을 벌었다.



 나는 “기록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보부장이면 없앨 수 있습니다. 기록을 가져오라고 해서 치안국으로 다시 보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답했다. 나는 “그렇게 해드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죽을 때까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충성스럽게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손가락을 잘라서 피로 쓰라면 쓸 수 있습니다.”

 그의 청이 간곡했다. 그렇게 경력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면 정말 충성을 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다. 치안국장에게 물어보니 김성곤씨 말대로 그런 기록이 있었다.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서 정보부에 두고서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그에겐 “기록을 없앴으니 약속대로 박정희 의장에게 충성을 해주시라”고 당부했다. 그는 얼마 동안 깍듯이 박 대통령을 모셨다. 공화당에서는 재정위원장을 맡아 성의를 보였다. 참고로 치안국(현 경찰청)에서 가져온 종이 서류는 내가 없앴지만 기록의 원형은 마이크로필름 상태로 치안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성곤 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유세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씨를 포함해 백남억·박준규 등 TK 출신 구정치인들은 63년 공화당 창당 때부터 참여했다. 엄민영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이들은 대구고보(현 경북고) 선후배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출신 지역이 비슷해 유·무형으로 친밀도가 높았다. 또 대통령을 돕는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치고 올라오는 인물을 누르는 데 앞장섰다. 게다가 쌍용양회로 부(富)를 쌓은 김성곤씨의 재력이 뒷받침됐다. 박 대통령 마음이 서서히 TK 쪽으로 움직였다. 한국 정치의 큰 파벌인 TK세력은 이렇게 형성됐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자신이 그 세력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을 거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경북 세력이 대통령을 이용해 힘을 키우고 있었다. 공화당 TK 세력은 나를 끌어내리려고 대통령 옆에서 자꾸 부추겼다. 60년 정군운동 때부터 함께해온 혁명동지 길재호(육사 8기·평북 영변 출신)도 여기에 합세해 반JP로 돌아섰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되는 건 못 참는 이후락 비서실장과 물불 안 가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가세했다.

 65년 12월 국회의장단 선출을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졌다. 당초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구영씨를 국회의장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대통령도 “좋지. 그렇게 하지”라고 승낙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뒤집혔다. 대구 출신 이효상 국회의장을 유임시키겠다고 박 대통령이 입장을 바꿨다. 김성곤을 위시한 경북 세력의 작품이었다. 대통령도 고지식하고 깐깐한 정구영씨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시키지 않은 듯했다. 12월 16일 국회의장단 선출투표가 진행됐다. 1차 투표에서 정구영 69표, 이효상 55표가 나왔다. 공화당 의원 상당수가 당 총재인 대통령 뜻에 반하는 ‘항명’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뒤 2차 투표에선 결과가 뒤집혀 이효상씨가 재적 과반수의 최저선인 88표로 선출됐다(정구영 60표). 이효상씨에게 온 30여 표가 야당 표였다. 김성곤씨가 야당 의원들을 상대로 손을 썼다. 정치자금을 주물렀던 김성곤씨의 영향력은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뻗치고 있었다. 항명사건에 박 대통령은 역정을 냈고, 김용태·민관식 등이 징계를 받았다.

 경북대 문리대학장 출신인 이효상 의장은 TK세력이 옹립한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도 무난한 그를 발탁했다. 이 의장은 독특한 언사로 웃음을 자아내곤 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가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엔 둘 다 틀렸습니다. 김일성 가슴 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김일성이가 뭘 얘기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1967년 4월 3일 충남 지역 한 학교 교정에서 대선 유세 중인 김종필 공화당 의장. 주전자 물을 컵에 따르며 “우리나라가 성장을 하고 나면 이 컵에 물이 넘치는 것처럼 복지를 모두가 누릴 수 있다”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65년 12월 27일 나는 공화당 당의장에 오른다. 2차 외유 직전 당의장 직에서 물러난 지 1년6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당총재에 이은 2인자로서의 실권을 쥐고 있진 못했다. 66년 1월 당 요직 개편에서 김성곤씨는 국회 재경위원장에 이어서 당 재정위원장을 맡았고, 사무총장에 길재호가 임명됐다. 백남억 정책위의장과 이후 원내총무에 오르는 김진만까지, 이른바 ‘4인 체제’가 당을 장악하고 나를 포위해 맹렬하게 활동했다.

 67년 6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내 답답한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줬다. 엄민영 내무장관과 길재호 사무총장 등이 계획을 짰는데, 나는 4월 초부터 전국 중소도시를 돌며 유세하게 돼 있었다. 하루에 대여섯 곳씩 돌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는 도청소재지 유세에선 내가 빠져 있었다. 다만 대전 유세만은 내 연고지라는 이유로 찬조연사에 포함됐다. 4월 17일 대전 공설운동장 연설회에서 마지막 연사로 무대에 올랐다. 흩어져 가려던 청중이 내가 연단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니 다시 모여들었다. 내 연설을 처음 들은 대통령은 “연설은 잘하드만”이라고 평했다. 이후 박 대통령의 지시로 대도시 유세엔 내가 포함됐다.

 4인방은 어떻게든 내가 나오는 기회를 적게 주려고 안달이었다. 연설 시간을 10분으로 제한하고, 순서도 제일 산만한 맨 처음으로 몰았다. 명색이 당의장인 내가 대구에서 연설을 하는데 마이크가 끊어져서 소리가 안 들리기도 했다. 4인방은 돈 잘 쓰면서 편안하게 유세를 다닌다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 고생이었다. 하루는 호주머니에 돈이 없길래 비서 김홍래에게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돈 좀 안 주더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견제받았지만 나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대통령에게 표를 달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내가 발상해서 하려는 일은 따져보지도 않고 방해하는 일도 빈번했다. 68년 당의장 시절 ‘스포츠소년단’ 창설을 추진했다. 올림픽에 나갈 국가대표를 키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운동을 시키자는 취지였다. 그러자 4인방은 “JP가 대통령 하려고 이제 별짓을 다한다”고 쑥덕거렸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 “스포츠소년단이 뭐하는 거야”라고 모르는 척 물었다. 결국 나는 창설 작업을 그만뒀다. 소년들을 운동시키는 게 대통령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해를 사면서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김성곤씨가 공화당으로 들어오는 걸 내가 막지 않았으니, 결국은 내가 화(禍)를 자초한 셈인지도 모른다. SK(김성곤의 이니셜)가 야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사람이 변하는 걸 탓해봐야 소용 없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니 말이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게 좀 모자란 사람일지 모른다. 나는 원래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왕자불추 내자불거(往者不追 來者不拒), 그 정신을 가지고 평생을 왔다. 김성곤씨가 올 때도, 길재호가 갈 때도 나는 막거나 붙잡지 않았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길재호(1923~85) =평북 영변 출신으로 육사 8기. 동기인 JP와 정군운동을 함께했고 5·16에 가담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을 거쳐 6·7·8대 국회의원(6·7대 충남 금산, 8대 전국구)으로 선출됐다. 66년부터 3년6개월간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내며 실세로 떠오른다. JP의 오랜 친구였지만 김성곤·백남억·김진만과 ‘4인체제’를 형성하면서 반JP로 돌아선다. 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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