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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최전선의 JP “6·25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 전투병 보내자”…3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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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8> JP와 ‘국제시장’ ③ 월남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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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14일 월남에 파병된 비둘기부대를 찾은 김종필(JP) 공화당 의장이 현지 여성으로부터 월남모자를 선물받고 있다. 비둘기부대는 건설지원단으로 구성된 비전투 부대다. 김 의장은 이날 월남 국립묘지에 헌화·참배하고 전선(戰線) 인근의 월남인들을 만나 위문품을 전달했다. 왼쪽부터 신상철 주월 대사, JP,김택수 의원(공화당),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혁명 9개월이 지난 1962년 2월 13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월남을 방문했다.

 당시 월남은 북쪽의 공산 월맹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튿날 북위 17도선의 최전선 1사단을 방문했다. 수도 사이공에서 1000㎞ 이상 떨어진 오지였다. 그곳엔 3년 뒤 대통령에 오른 구엔 반 티우(1923~2001) 사단장(대령)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티우 사단장은 17도선 표지판을 가리키며 “이게 한국의 38도선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10여 년 전 북한·중공군의 남침을 맨주먹으로 막아내던 6·25가 상기됐다. 38도선을 넘어온 북한군이 의정부 야산 일대를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밀고 올라오고 정찰 나간 내 머리 위로 포탄이 펑펑 떨어지던 장면, 육사 8기 동기생 40%가 소대장·중대장으로 전사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북위 17도선을 설명하는 티우의 눈빛은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의 도움으로 한국이 살아난 것처럼 월남도 당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튿날 고딘디엠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한국군이 월남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형편을 검토해보자”고만 답했다. 월남 파병에 대해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심 ‘파병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고딘디엠의 첫인상은 퍽 부드러웠으나 그 속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고딘디엠은 나와 만난 이듬해인 63년 11월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 정부가 고딘디엠을 제거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내건 민족자주 노선이었다. 그는 월맹과 전쟁을 하면서도 그쪽 지도자인 호찌민(胡志明)과 별도 비밀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 중앙정보국(CIA)이 입수했다.

 미국은 고딘디엠과 호찌민, 두 민족주의자들이 몰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고딘디엠을 제거한 건 실수였다. 그 뒤 월남은 쿠데타가 빈발했고 새로 들어선 정부들은 자기 나라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려고만 했다. 무능과 분열, 부패로 정치 불안정이 커지면서 국민의 의지를 묶어내지 못했다. 반면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다. 강대국 미국과 끈질기게 싸워 통일까지 이뤘으니 말이다. 자유는 무위재래(無爲齊來·가만히 있어도 다가 옴)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덕(德)이다. 힘은 사용하려는 주체의 의지가 따르지 않는 한 진정한 힘이 되지 못한다. 자유와 힘은 결국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62년으로 돌아가자. 2월 24일 귀국해 박정희 의장을 바로 찾아가 동남아 순방 결과를 보고했다. 월남파병을 검토해 보자고 건의했는데 박 의장은 소극적이었다. 박 의장은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을 봐서 다른 나라에 군대를 지원하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의장은 파병이 가져올 인명 손실을 걱정했다. 야당이 반대하며 물고 늘어질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월남파병은 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처음 방문해 존 F 케네디(1917~1963) 대통령과 만날 때도 나왔다. 박 의장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는 반대급부로 월남 파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신중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 월남에 본격적으로 군대를 보내기 전이었다.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이때부터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월남전 지원을 호소했다.

 월남전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파병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64년 2차 외유(6월 18일~12월 31일) 중 미국에 체류하면서 월남 파병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느껴졌다. 미 국무부는 나의 외유 프로그램으로 하버드 대학의 헨리 키신저(이후 국무부 장관) 교수가 주관하는 정치경제 특별세미나 과정을 마련해줬다. 난 하버드에는 적(籍)만 걸어두고 주로 워싱턴DC에 가서 미국 의원들을 만났다. 9월 16일 토머스 도드(1909~1971)의원 등 상원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군이 월남에 가서 미군과 함께 싸울 수 있다”며 내 소신을 밝혔다. 그때 월남전 전황은 몹시 악화됐으나 미국과 같이 피를 흘려줄 나라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호주가 병사 몇 명을 보냈고, 태국이 공군기지를 빌려주고 심부름해주는 정도였다. 유럽국가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마저 파병에 소극적일 경우 미국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2개 사단 중 일부를 월남으로 옮길 가능성도 봐야 했다. 월남이 아니라 미국이 간절하게 우리한테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이제 파병에 따르는 고민의 나날에 매듭을 지어야 할 시점이었다. 우리의 의지와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는 판단을 했다.

 나는 미 상원의원들에게 “여러분이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에 동의하면 국무부에 얘기해서 우리 외무부에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해 결론을 내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에게 “PL(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을 춘궁기 적기(適期)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모두 감사의 박수를 쳤다. 나는 이어 도드 의원 방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넣었다. 대통령은 내 얘기를 듣더니 “어이, 하버드에 가 있는 줄 알았더니 거기 가서 그런 일을 다 했어? 그래그래, 알았어. 나도 동감이야”라며 반가워하셨다.

 월남 파병의 최종 결정은 박 대통령의 몫이었다. 우리 젊은이를 사지(死地)에 보내는 선택 앞에 박 대통령은 밤잠 못 이루는 고뇌에 직면했다. 64년 12월 존슨 미국 대통령이 파병요청 친서를 보냈고, 이듬해 1월 8일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결단을 내렸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월남전 근로자로 파견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왼쪽첫째)와 달구(오달수 분·왼쪽 둘째)가 베트콩을 만나 몸을 숨기고 있는 장면.
 월남 파병은 6·25 남침 때 우리나라를 위해 피를 흘려 준 미국에 대한 보답이란 의미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신뢰와 신의라는 무형의 자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進駐)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다.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5년 3월 건설지원단으로 구성된 비둘기 부대가, 10월에는 해병여단 청룡부대가 월남으로 떠났다. 66년까지 전투병력 3개 사단이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월맹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버드에 있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난다. 수업을 하던 어느 날 키신저 교수가 나를 지목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 300여 년 역사에서 강의실에 보디가드를 둘씩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놀렸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기록하기 위해 통역으로 데리고 온 것”이라고 응수해 “와” 하고 웃었다.

 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존슨 대통령은 파월(派越)에 무척 고마워하며 보답으로 뭔가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은 한국인의 이민을 허용하고 한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며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박 대통령은 나와 정상회담 때 제시할 요청사항을 협의했다. 당시 한국군의 병기는 전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걸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또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선진 공업 기술을 도입하고 연구하는 전문기관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66년 2월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다. 미국 측에서는 공과대학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공업기술연구소가 우선이었다. 먹고사는 게 급한 나라에서 기초 기술보다는 기업에 필요한 응용 기술을 제공하는 기관이 절실했던 것이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고딘디엠(吳廷琰·1901~63)=패망한 월남의 초대(1956~63) 대통령. 54년 제네바협정으로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철수하자 독립한 월남의 총리를 거쳐 56년 대통령에 올랐다. 북쪽 월맹과 대치 속에서 지배계층을 기반으로 반공 민족주의 노선의 정치를 폈다. 63년 11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됐다. 월남전 초기인 62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수도 사이공을 찾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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