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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서 내려오니 새로운 일 보여” 서독 함보른 탄광 막장 들어간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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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6> JP와 ‘국제시장’ ① 광부·간호사 서독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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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6일 민주공화당 평의원이었던 김종필(JP) 전 총리가 AID(미국 국제개발처) 차관사업체인 강원도 장성광업소를 방문해 갱목(坑木)들이 좌우에 설치된 지하 갱도에서 안전성을 점검하고 있다. 그보다 2년 전인 63년 7월 초 JP는 한국인 최초로 서독 함보른 탄광 막장을 시찰하고 한국 광부의 파독(派獨)을 추진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조국 근대화의 도정에 공백(空白)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앞에 있을 때는 미지(未知)의 세상을 열어나갔고, 뒤에 물러났을 땐 방치(放置)된 문제를 풀어나갔다. 5·16 혁명 2, 3년 뒤에 있었던 나의 이른바 1, 2차 외유는 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일선을 떠난 아쉬움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나라의 빈곤을 물리치고 국민에게 항산(恒産·재산이나 생업)의 기회를 제공할 숱한 일이 곳곳에서 보였다. 1차 외유(1963년 2월 25일~10월 23일)때 나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녔다.

 63년 7월 초순 서독에 갔더니 신응균 대사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그는 “서독은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정책 추진으로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부족한 노동력을 아프리카, 동남아로부터 충당해 오고 있다. 57년부터 일본에서 매년 400명을 유입해 왔으나 올해 말이면 계약 기간이 만료된다”고 전했다.

 신 대사에 따르면 62년 5월 서독의 M·A·N사(社)가 우리 대사관에 한국인 근로자 500~1000명을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고, 63년 5월에는 서독 노동부가 한국인 광부 250명을 고용하겠다고 희망해 와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당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를 맞아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이 절실했다. 노는 인력의 해외 송출도 시급한 때였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본국에서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냐”며 혀를 찼다. 나는 우선 “광부들이 오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신 대사에게 부탁했다. 이튿날 신 대사와 루르 지방에 있는 함보른 탄광으로 갔다. 서독 정부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지하로 수직 1000m, 수평 700m 들어가니 탄광의 막장이 나왔다.


 탄광 내부엔 자동 운반 장비인 컨베이어 벨트가 설치돼 있었다. 채탄 기계가 탄층(炭層)을 싹 긁으면 석탄 덩어리들이 전부 그 위에 떨어져 자동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공기 순환 상태도 한국과 비교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막장 끝의 위아래를 지탱하기 위해 알루미늄이 합금된 쇠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1000m 땅 속의 지압이 굉장히 높았다. 스템펠이라고 부르는 조립 쇠기둥은 중간에 콤프레셔가 압축 공기를 주입해 죽 늘리게 돼 있다. 스템펠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압력을 견디다 못해 ‘뻥!’ 하면서 갑자기 튕겨져 나갈 수 있어 아주 위험해 보였다. 사람이 맞으면 즉사할 수 있다. 신 대사는 “아이고, 위험한데 빨리 나갑시다”고 했고 나를 안내하는 서독 정부 사람도 “그만 나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일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인데 내가 미리 체험하면서 문제될 만한 요인들을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시간 후 바깥으로 나왔다. 소매 등을 단단하게 여민 작업복을 입었는데도 온몸 구석구석 탄 찌꺼기가 파고들어 새까맣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사정이니 일본인들이 서독 전역에 3000명까지 와 있다가 나라 경제 사정이 나아지니까 하나 둘 철수해 다 가버렸다고 서독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이집트나 인도·파키스탄 인부들을 쓰자는 말도 나오지만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지런하기는 동양인이 좋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관계자는 “여러 나라의 광부들을 써 보고 있지만 당신 같은 고위 인사가 막장까지 내려가 현장을 체험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 관리들도 그러지는 않았다”며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1963년 8월 중순 JP(왼쪽 둘째)가 서독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본사를 방문해 차량을 살펴보고 있다.
 이 정도 탄광이면 버틸 만하다, 조건도 괜찮다 싶었다.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탄광 사무실에서 바로 서울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서독 루르 지방의 함보른이라는 탄광입니다. 지금 지하 1000m, 옆으로 700m 막장에 내려가서 한 시간 동안 본 뒤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박 의장은 무슨 말인가 싶은지 “응, 그래서?”라고 되물었다. “서독이 우리나라 광부 250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제때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있으니 각하께서 빨리 조치해 주십시오. 일을 할 만한 조건입니다.” 박 의장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야? 내가 조치하지.”

 그 후 우리 정부의 움직임은 신속해졌다. 63년 12월 16일 한국과 서독 간 제1차 광부파견 협정이 체결됐다. 12월 21일 제1진 123명 출국을 시작으로 77년 말까지 11년간 7936명의 광부를 서독에 파견했다. 광부 파견은 그때까지 민간 차원의 간호사가 약간 명 나가 있었으나 정부 차원에서 한국의 간호요원 1만32명을 대량으로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은 서독 정부의 기대대로 성실하고 일 잘하고 부지런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64년 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 두 분은 12월 10일 내가 1년 반 전 들렀던 함보른 탄광을 찾았다. 박 대통령 내외와 한인 광부·간호사들은 함께 애국가를 부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북받친 감정이 폭발해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워싱턴에 있었다. 당시 한·일 수교 문제로 또다시 쫓기다시피 나라를 떠나 ‘2차 외유(64년 6월 18일~12월 29일)’ 중에 있었는데 ‘함보른의 눈물바다’ 소식을 듣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무슨 느낌이 통했던 것일까. 박 대통령은 서독 방문 중이던 12월 9일 수행하던 김동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시켜 “연말까지 귀국하라”는 전화 지시를 내렸다. 2차 외유를 해제한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기 위해 덕수(가운데·황정민 분)와 달구(왼쪽·오달수 분)가 함보른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고속도로 건설의 영감(靈感)도 서독 여행 중에 얻었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광부 파견 문제를 해결하고 한 달여 지난 63년 8월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본사를 방문했다. 회사 측의 배려로 벤츠 차를 손수 몰고 아우토반(독일 고속도로)을 시속 200㎞로 달렸다. 마침 국제회의 참석차 서독에 들른 이석제 내각 사무처장(육사 8기, 뒤에 총무처 장관·감사원장)을 조수석에 태웠다. 신호등도 없고 속도제한도 없는 아우토반을 한바탕 달린 뒤 친구인 이 처장한테 ‘구경 잘했느냐’고 물었더니 “어휴, 구경이고 뭐고 어찌나 달리는지 소름이 끼치고 정신이 없었다”고 대답해 서로 웃었다.

 고속도로는 독일이 미국보다 앞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만들었다. 국경선과 접해 있는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싸우려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적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기동성 있게 움직여야 한다는 발상으로 아우토반을 건설했다. 군사용 도로가 전후 산업용 도로가 되고 라인강 기적의 생명줄로 변했다.

 65년 나는 공화당 평의원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9월 25일 마지막 인천 연설에 1만여 인파가 모였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신의주로 도로를 연장해 한반도를 종단하는 길을 뚫어야 한다. 어느 날인가, 젊은 사람이 자동차 옆에 연인을 태우고 청춘을 구가하면서 시속 100마일을 질주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궐기하자.”

 그러고 서울에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어이, 인천에서 고속도로 얘기했어?”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김형욱 부장)를 시켜 나의 인천 연설을 실시간으로 보고케 한 것이다.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했더니 “그거 내 생각하고 똑같아. 내가 고속도로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거 해야 합니다.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일일 생활권으로 확 바꿔놔야 합니다”라고 했다. 돈 한 푼 없는 신생 독립국이 경부 고속도로라는 국토의 대동맥을 1970년에 완공한 건 기적이었다. 연인을 옆에 태우고 백수십㎞ 속도로 청춘을 구가한다는 꿈과 비전, 신념과 의지가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 소사전 아우토반(Autobahn)=독일의 자동차(auto) 도로(bahn),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망이다. 처음엔 속도 무제한이었으나 현재 대부분 도로가 권장속도 130㎞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됐다. 33년 나치당 집권 뒤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청년실업 구제, 군수·전쟁용으로 건설을 본격화했다. 5년 만에 3000㎞를 확충했으며 오늘날 통일된 독일 곳곳에 1만1000㎞의 도로가 나 있 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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