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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민비 시해, 일본 황거에서 같은 일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라” …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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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4> JP, 2005년 한·일 수교 40년 연설 회고 … 경륜·지혜 담아 한·일 관계 대안을 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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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다. 양국 수교 문제는 곡절과 파란의 반복이었다.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은 61년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동, 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JP는 한·일 수교에 담긴 협력과 우호를 양국 전중(戰中)세대의 작품으로 회고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일본 전후(戰後) 지도층이 전중세대의 고뇌와 결단에 어이없는 상처를 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JP는 10년 전 40주년 때 이야기로 증언을 시작한다. 그는 격정적으로 과거를 회고하면서 오늘을 돌파할 경륜과 지혜를 내놓는다.

10년 전 2005년 6월3일 도쿄 게이단렌(經團連)회관의 강연이 떠오른다. 그 행사는 일본의 정·재계 인사, 정부의 국장급 이상 관료, 언론사 대표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이었다.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讀賣) 회장이 마련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나와 함께 초청된 자리다. 나는 현역 정치인일 때 묻어 두었던 가슴속 얘기를 40분간 쏟아냈다. 전후세대가 모르는 과거사를 얘기해줬다.

 “올해 일본인들은 일·러 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그 승리가 식민지로 직진(直進)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당해 본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강자·지배자·가해자의 시각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중들은 외교적 수사를 억제하고 역사 인식으로 바로 들어간 내 얘기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분의 영웅이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메이지 유신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元兇)으로 불립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장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올해는 고종의 황후인 민비가 일본의 미우라 공사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 되는 해입니다.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설을 마쳤는데 행사장은 조용했다. 충격을 받은 듯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현역에서 정치를 할 때 ‘언젠가는 가슴은 아프겠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직설법으로 이런 얘기를 해야겠다’는 뜻을 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해야 할 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이 시점은 내가 정계를 떠난 지 얼마 안 됐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일본의 지도층이어서 한마디하면 일반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가 왔다는 생각으로 마음먹고 연설을 했다.

 다음 순서로 나카소네 전 총리가 올라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김종필 선생과 40년에 걸친 우정을 이어오고 있습니다만 오늘 하신 이야기는 저로서도 처음 듣는 솔직한 말씀이었습니다. 40년간 일·한(日韓) 친선을 위하여 활동해 오신 한국의 지도자께서 그동안 가슴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오늘의 일본인들을 향하여 작심하고 토로하셨습니다. 김 선생은 일본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정은 계속되고 있고, 나라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이런 우정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김종필 선생의 말을 잘 새기고 머릿속에 정리해두길 바랍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같은 전후세대의 지도자들이 그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는 나를 만나면 “일본이 한국을 괴롭혔다. 일본인으로서 사과드린다. 지난날은 안 좋았지만 이제 한·일 간에 손을 잡고 한국이 부흥하기 바란다”는 말을 하곤 했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80년대까지 외무대신을 지냈는데 나와 퍽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사람이 좋고 모나는 소리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한·일 사이를 좋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내가 그와 만날 때 아베 총리는 아버지를 비서관처럼 수행했었다.

 2001년 8월 25일 한·일의원연맹 회장이며 자민련 총재였던 나는 일본 측의 초청으로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關)에 있는 ‘朝鮮通信使 上陸淹留之地’(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 비석 제막식에 참석했다. ‘엄류’는 ‘오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엄류지지’는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 거쳐 갔던 지역을 말한다. 야마구치현 지사가 한국의 포천에서 화강석을 가져와 내가 쓴 붓글씨를 새겨 기념비로 만든 것이다. 그 자리에 당시 그 지역구 중의원이자 관방부(副)장관이었던 아베 신조도 참석했다. 그때 식사는 같이했지만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아베 총리는 그 아버지와는 품성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하는 JP가 2005년 도쿄서 했던 연설 전문.

한·일 전중(戰中)세대 이심전심
양국 건설적 협력 합의


김종필 전 총리가 요미우리 주최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강연을 앞두고 쓴 육필 원고. [중앙포토]
금년은 1905년 일본이 한국과 보호조약을 맺은 지 100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60년, 그리고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 한·일 국교정상화에 일조(一助)를 했던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과의 상관관계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물론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오늘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육사 동기생 약 40%를 50년 한국전쟁 때 잃은 전중(戰中)세대입니다. 우리 육사 전우들은 김일성(金日成)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한국전쟁 때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해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더 이상 분단과 가난과 예속(隸屬)의 짐을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 국가 개조의 꿈을 안고서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을 일으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전중세대로부터 ‘근대화의 성공’이란 유산을 이어받은 오늘의 젊은 세대는 한반도의 자유통일과 국가 선진화로 나아가는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어느 시기에 한반도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 아래 통일된 인구 7000만 명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올해 해방 60년을 맞은 한국의 번영은 53년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미 안보동맹과 65년의 수교(修交)에 의한 한·일 우호관계를 토대로 하여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분단으로 사실상 섬이 되어 대륙과 단절되었지만 더 넓은 자유진영과 해양문화권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한반도의 중간선에서 막아내고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관계하여 40년 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외상과 함께 ‘김-오히라 메모’라고 불리는 합의를 했었습니다.

 그즈음 제가 만났던 일본의 지도자들도 태평양전쟁을 경험한 전중세대였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양국의 전중세대는 두 나라 사이에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정립함으로써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해 후손에게는 반드시 항구적인 번영의 유산을 물려주자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우리 두 이웃 나라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문화적·인적 교류를 통해 동양 문명의 일원이 되어 세계사에 남을 만한 창조와 건설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만 침략과 지배, 전쟁과 반목의 시기도 길었습니다. 65년 한·일 수교로 시작된 새로운 40년은 양국 간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협력기(期)였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그 성공의 가장 확실한 물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된 양국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던 65년 양국의 상호방문자는 연간 1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양국 간 상호방문자는 하루에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올해는 양국 방문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할 것입니다. 양국 무역 규모는 지난해 678억 달러에 이르렀고 일본은 244억 달러의 대한(對韓) 무역흑자를 가록했습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말했다
“과거 지배하면 미래를 지배”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가장 왼쪽). 일본 초대 총리.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사이고 다카모리( 1828~1877, 가운데). 메이지(明治)유신의 주역이다. 미우라 고로( 1847~1926, 오른쪽). 주한 일본공사 시절 낭인(浪人)들을 동원,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중앙포토]
 최근 시마네(島根)현의 ‘다케시마(竹島·독도)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양국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성장한 양국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반일(反日)시위가 일어나고 있던 지난 상반기의 관광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입국자 수는 줄기는커녕 전년 동기보다도 20% 이상 늘었고, 일본으로 간 한국인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정부 대 정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이런 국민과 국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한·일 두 나라의 공동 자산입니다. 양국의 지도층은 정치나 외교보다도 앞서가고 있는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경제적·문화적·인적인 친선협력의 바탕을 깨뜨리지 않고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국의 지도층부터 먼저 정확한 역사의식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를 직시(直視)함으로써만 미래를 투시(透視)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독도 문제 발신지인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 대사(出雲大社)가 모시고 있는 신(神)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南命)는 신라에서 건너왔다는 설(說)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에 신라 주민들이 일본 산인(山陰) 지방에 많이 건너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백제 고도(古都)였던 부여 출신으로서 수년 전엔 규슈 미야자키현 난코무라(南鄕村)를 방문해 서기 663년의 백촌강(白村江) 전투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의 도래(渡來) 유적지 안에 있는 백제관(百濟館)에 졸필(拙筆)을 남긴 적도 있습니다. 일본 천황께서도 자신이 백제 왕족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2001년 아키히토)

 고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기술·문화가 일본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가 최근 저서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일본인의 본가(本家)다. 분가(分家)인 일본인은 항상 본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본가의 한국인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찬란한 문명을 만든 분가 사람들의 진취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양국민의 인종적·지리적·역사적 밀접성이 그러한 상호 존중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올해 일본인들은 일·러 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여러분의 그 승리가 식민지로 직진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도 최근 요미우리신문 기고문에서 지적하신 대로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에 취하여 메이지(明治)시대의 신산(辛酸)을 잊고 교만해져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일·러 전쟁이 끝난 5년 뒤 일본에 합병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데 이어 만주로 진출했고, 그 침략의 관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중국 대륙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지도부는 일·러 전쟁 때 자국을 지원했던 영국·미국과는 멀어지고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와 가까워졌습니다. 이 외교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자초함으로써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적 규모의 패전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일·러전쟁 승리에 취해 일본 교만”
나카소네 전 총리 지적


 일본인들을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일련의 아시아 침략 과정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그릇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아시아 최초의 자주적 근대화라는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한 일본이 제국주의 노선으로 흘러가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끼친 계기였습니다.

 일본이 이런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근본 원인은 고대사의 기억과 문화적 본가인 한국·중국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 아시아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던 한국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면 아시아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이며, 국제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웃 나라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국가가 어떻게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이유로서 조선과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었다느니, 조선에 대한 개입이 청(淸)나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고, 이웃 나라의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해도 무방하다는 이런 생각은 바로 가해자의 논리입니다. 식민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이런 식의 변명은 아픈 상처를 더욱 도지게 할 뿐입니다. ‘일본의 생명선’이란 관념 때문에 왜 이웃 나라 국민들이 죽어가야 하며 왜 국가의 자주성을 빼앗겨야 합니까?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당해본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강자, 지배자, 가해자의 시각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은 일본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지도적 역할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여러분의 영웅이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 즉 정한론자(征韓論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英雄)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오래 전 한국 기자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이 손자는 한국 기자에게 “지금도 서울 남산에 박문사(博文寺)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박문사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절입니다. 이 절은 해방 직후 파괴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메이지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元兇)으로 불립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해방 뒤까지도 한국인의 추모를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면, 일본의 가혹한 한반도 통치를 상기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써 한국인들이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성(姓)을 빼앗아 갔고, 한글을 못 쓰게 함으로써 민족의 혼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일본인은 “우리는 과거사(過去事)에 대해 이미 사과할 만큼 했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천황과 총리의 사과에 대해서는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횟수가 많았던 소위 망언(妄言)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론은 사과, 각론은 변명’이란 것이 한국인의 느낌입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는 86년 후지오(藤尾) 문부상이 한·일 합병을 옹호하자 그를 파면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천황과 총리 등의 진실된 사과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 발언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한·일 협력은 어려울 것입니다. 후지오 문부상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 해도 러시아가 결국은 한국에 손을 댔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는 침략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변했던 것입니다.

 올해는 마침 고종의 황후(皇后)인 민비(閔妃)가 일본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을미사변)이 되는 해입니다. 미우라 공사의 지휘 아래 일본 폭도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한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흉포함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는 “민비 살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침략외교에도 없었던 포학(暴虐)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반일투쟁이 민중 속으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민비 시해(弑害)에 가담했던 일본인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아와서 민비 묘소에 참배해 눈물을 뿌리며 사죄하는 것을 볼 때 일본인의 양식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일본의 일부 지도자들이 계속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과거 100년을 뒤돌아보면 한·일 양국은 상극(相剋)의 역사에서 시작하였지만 65년의 한·일 수교를 계기로 갈등하면서도 상생(相生)하는 단계로 발전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저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해 군사적·외교적으로도 자립·자주하는 나라로 우뚝 서는 것이 대등하고 생산적인 한·일 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우선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결국은 튼튼한 안보를 뒷받침했고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은 북한에 대해서 결정적 우위에 서게 되었고, 마침내 북한의 지원 세력이던 소련 공산제국도 결국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정한론자’ 사이고 다카모리
당신들에겐 영웅, 우리에겐 역도


 65년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빈국이었으나 오늘날의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 연간 2500억 달러를 수출하는 세계 12위의 무역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일본에 이어 비(非)서구국가로서는 두 번째로 세계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한국인 모두의 비전이 되고 있습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오일쇼크를 극복하면서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중화학공업화 전략이 성공해 지금 한국은 첨단 정보산업 부문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 개방정책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성공 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한·일·중의 이 성공적 개혁은 이 세 나라의 지도층이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을 거부하고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철학으로써 선진문물을 동양의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소화시키고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동양적 실용정치의 사상은 놀라운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도 유효한 동북아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일 정권만은 지금도 실패한 공산주의를 교조적(敎條的)으로, 또 사대적(事大的)으로 수용해 전제적(專制的) 후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주민들을 굶기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유지되면 동북아에서 평화가 보전되어 활발한 교류 아래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세기 말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와 임신(壬申)의 난(亂)을 통해 집권한 천무(天武) 천황 아래 일본은 과거의 적대관계를 버리고 긴밀하게 교류했습니다. 일본이 대보율령(大寶律令)을 반포해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는 먼저 고대국가를 완성했던 신라로부터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한반도가 분열되거나 취약해지면 주변국의 개입과 침략을 불러 한반도가 국제전장(戰場)이 되고 동북아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한국전쟁과 일·러전쟁 등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이 자유진영의 전초기지이자 일본 안보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60년 동안 한국의 발전에는 일본의 효과적인 협력이 있었습니다. 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의한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8억 달러는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기간산업과 인프라 건설에 투입되었으며, 일본 기업으로부터 들여온 선진기술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조력(助力)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의 경우 초기에 투자된 약 1억3000만 달러의 청구권자금은 ‘민족적 혈채(血債)’로 불리면서 이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인해 양국 사이의 무역량도 늘었고 일본은 큰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한·일 관계는 시혜니 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은 양국의 상호 이익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 이어 중국이 놀라운 고도성장을 계속하면서 이제 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한·일·중 아시아 3국은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고, 여기에 미국을 더하면 이 4국은 일종의 태평양 4국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한·미·일·중 네 나라의 GDP를 합산하면 세계 전체의 반을 넘어섭니다. 저는 아시아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총리 시절 아시아를 위한 금융기구 즉 AMF(Asia Monetary Fund)의 창설을 제의한 바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태평양 4개국 경제공동체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동북아의 한·일·중 세 나라의 공존공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채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미 동맹과 일·미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대전 이전 유럽 열강들은 경제적 교류는 밀접했지만 이를 관리할 안보협의체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란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자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에 연쇄적으로 휘말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한·미·일·중의 태평양 4대국 사이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해야 하며, 특히 국가 지도부 사이의 정기적인 대화체제가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려면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하면서, 중국의 민주화가 자리 잡고 북한의 독재정권이 변해야 합니다. 미국·한국·일본이 역내(域內)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최근 반일(反日)시위에 대해 한·일 양 국민들이 여유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양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반일운동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작동하는 가운데서 이뤄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일 두 나라 국민들은 정부 간 외교 마찰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교류와 협력을 유지해 가고 있습니다.

한반도 분단, 남북 동족상잔
일본이 갚아야 할 역사적 빚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반(反)인류, 반평화적인 도발행위입니다.

 위험천만한 북핵 문제는 그들이 핵개발을 파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은 그렇게 쉽사리 변질되거나 종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어려운 그들을 상대로 해결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해결 방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세계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6자회담은 회담을 위한 회담에 그치고 있습니다.

핵을 무기로 세계를 가지고 놀고 있는 북한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고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에 모두 합의했다’라고 하는 관용구(慣用句)를 되풀이하면서,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 날 북한으로부터 결정적인 결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사태를 자초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 문제는 가능한 한 빠른 장래에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서, 국제사회가 단합해 ‘검(劍)과 쿠란’ 양수(兩手)로써 해결해 나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했던 한국전쟁이 한국의 힘만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과 같이 한반도의 통일은 한국인의 힘만으로써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과 남북 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화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가 불러온 결과이므로 일본 측에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주도할 남·북한 통일 과정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멸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65년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에 일조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시 국교정상화에 즈음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안부 속임수 모집, 젊었을 때 내 눈으로 봤다”

대일 청구권자금
우리 민족의 피의 채권


1966년 9월 1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오른쪽)이 제2회 아시아국회의원연맹(APU) 총회 참석차 방한한 기시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다. [중앙포토]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罪過)들이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對日)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도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지도자 중 일부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일본을 불신케 하는 발언과 행동을 끊임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 강요에 대한 변명, 강제 동원된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부정, 징용·징병자들에 대한 무시, 한·중 양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범(戰犯)들의 위패(※1978년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 합사)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대한 지도부의 참배, 그리고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 교과서의 검정 문제 등등 일본은 아직도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상처를 도지게 하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여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사려 깊은 행동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교과서 제작에 일절 간여할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공무원들이 개입해 교과서 제작자 측이 기술한 ‘독도가 한·일 간의 분쟁지역’이란 표현을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식으로 바꾸도록 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 문제를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일본이 1905년에 와서 이 섬을 자국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다시 말해 그전에는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자백과 다름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란 것은 1905년 이후를 말합니다. 한국은 6세기 신라 때부터 독도를 영유, 관리했기 때문에 별도로 영토 편입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공도(空島)정책을 쓰다가 개척정책으로 바꾼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41호로써 독도(당시 명칭은 석도·石島)를 울릉군수의 관할 범위로 명시했습니다. 일본의 영토 편입 조치보다도 5년이나 빨랐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에 일본의 시마네현 측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통보해 왔을 때 대한제국은 이 칙령에 따라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備邊司) 등록(謄錄)과 같은 국가 공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명기되어 있고, 관찬(官撰) 영토지도에도 나타납니다. 1877년 일본 메이지 정부 태정관(太政官) 문서의 기록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 또는 ‘일본 영토 이외의 지역’으로 적혀 있습니다. 일본의 관찬 영토지도에서도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일본에 겁을 집어먹느냐”
박정희, 한·일 대등한 관계 강조


 셋째, 일본이 일·러전쟁 중에 독도를 빼앗아간 것은 5년 뒤 완결되는 한·일합병의 첫 조치였습니다. 일본은 일·러전쟁을 개전하자마자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행위는 한반도 병합의 일환이었다고 한국은 이해합니다. 따라서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독도의 한국 영유(永有)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헌적으로 확실합니다. 일본은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빼앗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한·일 친선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또 일본의 국가 이익에 무엇이 합치되는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일본의 국가 이익을 생각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지도자가 있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불신감을 씻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미해결(未解決)로 놓아두는 것이 차선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태평양전쟁 전범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을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요인들은 전범들에 대한 참배가 아니고 애국자들에 대한 참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전범들의 위패를 분리해 다른 곳에 수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일본이 전시 총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한국인에 대해 창씨개명과 징용·징병, 그리고 위안부 동원 등이 조선인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더 지독한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 저의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선 농촌의 가난한 처녀들이 일본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뒤에 위안부가 되어 돌아왔다가 가문에서 버림받은 실화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라는 전사(戰史) 작가가 쓴 책에도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들이 뉴기니까지 끌려갔다가 죽어가는 대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과 중국은, 메이지유신으로 먼저 근대화했던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자존심을 만족하게 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 대등한 좌표에 위치해 일본을 대하게 이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의 침공, 보불(普佛)전쟁, 제1·2차 세계대전 등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舊怨)을 넘어서 화해 협력해 유럽연합(EU)의 경제권에서 번영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임진왜란)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을 한국인들로 하여금 잊게 해줘야 합니다.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을 일본은 성의껏 협조해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할 것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은 부드럽고 겸양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일본인에 대해서도 외국인들이 이런 인상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중·일 3국+미국
위기 관리 기구 모색해야


 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이후 북한에서는 잔류 일본인들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북한과는 반대로 이들을 평온무사(平穩無事)하게 귀국시켰습니다. 이러한 남과 북을 비교하면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류 작가 후지와라 데이(藤原テイ)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라는 소설 속에 당시 남북한의 현황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일독(一讀)해 보십시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우여곡절과 기복(起伏)도 많았지만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는 발전의 도정(途程)을 걸어 왔습니다. 특히 여기서 다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저 자신의 삶에서 보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와 같은 전중세대는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넘어야 할 고지는 아직도 많이 있으나 그 일은 저와 같은 노병(老兵)의 임무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남은 생애 중에 우리가 졌던 역사의 짐을 다음 세대에게는 넘기지 않도록 저의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여러분 한·일, 일·한 양국이 영구히 변함없는 우정과 협력과 평화와 번영이 함께하는 장래를 약속할 수 있도록 노력과 전진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표시는 정리기자 주)


● 소사전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천황) 복고를 이룩한 변혁. 메이지 정권은 학제·징병령·조세 개정 등 개혁을 추진하고, 서구 선진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중국(청나라)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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