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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상 의심했던 미국, 그의 정체를 황태성에게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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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3> 한미 갈등과 ‘황태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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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9월 주한 미국 주요인사와 만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가운데). 박 의장 왼쪽은 조상호 의전 비서관과 멜로이 미8군사령관(대장), 오른쪽은 버거 주한 미국대사와 이임을 앞둔 맥나마라 부사령관(중장)이다. [중앙포토]

‘거물 간첩 황태성’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미묘했다. 김일성의 밀사로 자처한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친형 친구다. 박 의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나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박 의장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서울 주재 미국 정보기관들은 황태성을 직접 신문(訊問)하려 했고, 그 문제로 양국 정보기관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황태성 체포 사실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지국장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가 나를 찾아왔다. 이북에서 내려온 황태성을 잡아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드 실바는 “우리 CIA가 신문을 해야 하니 황태성의 신병(身柄)을 넘겨 달라”고 내게 요구했다. 나는 “우리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 끝나면 그때 조사하라”고 거절했다.

 20여 일쯤 지나 드 실바가 다시 찾아와 같은 요구를 했다. 거듭된 요구에 나는 황태성을 미국 측에 내줬다. 대신 “신문이 끝나는 대로 우리한테 돌려보내라”고 했다. 드 실바는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하고 황태성을 데리고 갔다. 내가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둔 뒤에야(1963년 1월) 미국이 황태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항간의 얘기는 틀린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 의장의 과거 좌익 경력을 의심했다. 황태성이 남한에 내려온 것도 사전에 내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겼고, 황태성을 통해 박 의장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 것이었다. 박 의장은 사상적으로 아무 문제될 게 없었으니 CIA가 정체를 알아낼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황태성을 처음 붙잡았을 때부터 빨리 재판절차를 마치고 간첩죄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는 박 의장을 위해서였다. 그땐 툭하면 박 의장을 사상적으로 음해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을 간첩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긴 건 61년 12월 1일이었다.

 서울 주재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황태성의 조사를 질질 끌었다. 나는 “조사할 게 도대체 뭐냐”고 따지기도 했다. 내가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하고,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으로 1차 외유(外遊)를 떠난 63년 2월까지도 황태성의 재판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63년 가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황태성 사건을 쟁점으로 삼아 이념 공세를 폈다. 박정희 후보의 좌익 전력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윤보선은 “김종필이 몇 차례나 황태성을 만났다더라” “공화당 창당자금을 황태성이 댔고, 그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윤보선은 선거 막판까지 박정희 의장을 ‘빨갱이’로 몰았다. 박 의장은 15만 표의 적은 표차로 당선됐다.

 박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63년 10월 15일)되자 미국 측의 황태성 조사 요구가 쑥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CIA가 조사에 시간을 끈 건 꿍꿍이속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여차하면 박정희 의장을 공격하는 자료로 황태성을 활용하려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만일 그때 박 의장이 선거에서 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황태성을 문제 삼아 박 의장을 결딴내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박 의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상 미국 측도 더 이상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처음 CIA에 황태성의 신병을 넘겼을 때 우리가 알아낸 정보를 함께 넘겼다. 나중에 CIA 측 관계자를 만났을 때 “황태성한테서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빼낸 게 있느냐. 있으면 우리 쪽에 넘겨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I’m sorry. Nothing.” CIA는 황태성의 지위(북한 무역성 부상 역임)나 그와 박 의장의 관계를 보고 뭔가 상당히 기대했겠지만 실제 얻어낸 정보는 없었다.

 63년 대선 때 중앙정보부 책임자는 김형욱(4대 부장)으로 바뀐 뒤였다. 63년 10월 22일 대법원은 황태성에게 간첩죄로 사형을 확정했다. 내가 8개월간 외유를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 일이다. 그해 12월 14일 황태성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됐다. 군부대의 처형 현장엔 국방부 출입기자를 입회시켰다고 한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걸 증명해줄 손 끝 매서운 기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12월 31일 KBS 남산 스튜디오에서 열린 TV 개국 기념식에 참석한 송요찬 내각수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오재경 공보부 장관, 박종규 경호대장, 임택근 아나운서(왼쪽부터). [중앙포토]

 사형이 집행됐을 때 나는 6대 국회의원(총선 11월 26일)으로 당선돼 공화당 당의장을 맡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을 사흘 앞둔 박정희 의장이 황태성의 처형 사실을 보고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박 의장은 표정이 굳은 채 “그렇게 했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밖으로 말을 내뱉으면 크든 작든 영향이 올 수 있으니 그 상황에서 많은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태성은 박 의장이 어려서 친형처럼 따랐던 사람이니 고민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혼자 참았다. 나도 ‘황태성에 대해 뭐 느끼시는 게 없느냐’고 박 의장에게 여쭤보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자문자답(自問自答)했다.

 황태성 처형을 두고 떠드는 이야기 중엔 거짓이 적지 않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박 의장을 설득해 황태성을 서둘러 처형토록 했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이다. 황태성은 법적 절차를 거쳐 사형이 집행된 것뿐이다. 정보부장이 거기에 개입할 게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된다.

 박 의장이 황태성 사진을 보고 “황태성 선생도 많이 늙으셨구나”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전해들은 적 있는데, 이 역시 누군가 지어낸 말이다. 그 상황에서 박 의장이 그런 소리를 내놓을 수가 없다. 이런 것만 봐도 허튼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게 꾸며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된 황태성의 24세 때 모습. 그의 이명(異名)인 황대용이라고 적혀 있다. [중앙포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황태성은 김일성이 보낸 간첩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박정희 의장을 잘 설득하면 북한에 합작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황태성을 내려 보낸 게 분명하다.

 ‘황태성 사건’ 하면 61년 KBS TV방송국 개국이 떠오른다. 61년 여름, 나는 오재경(吳在璟, 1919~2012) 공보부 장관을 만나 TV 방송국 설립 계획을 논의했다. 서로 뜻이 통했고 오 장관도 그런 구상을 갖고 있었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환을 마련해 TV 방송국을 연내에 짓기로 했다. 개국 예정일을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0월 남산 기슭에 TV 방송국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내가 일본 도쿄에 가서 마주친 장면이 있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니 집집마다 TV 안테나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부러웠고 또 속상했다. 우리나라도 집에 TV가 한 대씩 있는,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방송 스튜디오 건물은 착공됐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나는 오재경 장관을 불렀다. 중앙정보부는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한 공작금 20여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61년 20만 달러는 2억6000환). 거기엔 황태성이 가져온 돈도 포함됐다. 내가 “이 돈으로 방송 기자재를 사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 장관은 “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 돈을 오 장관에게 넘겨줬다. 그 돈으로 카메라를 포함해 필요한 기자재를 미국에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 됐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늦은 61년 12월 31일 저녁 6시, KBS TV(채널 9)가 첫 TV전파를 발사했다. TV청사 제1스튜디오에서 박정희 의장과 송요찬 내각 수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국식이 열렸다. 급한 개국 일정 때문에 스튜디오 공사가 제대로 안 돼 개국식 때 천장에서 물이 새 나왔다.

 나는 그때 텔레비전 방송 이야기를 박 의장에게 처음 털어놨다. “사실 간첩들에게서 압수한 공작금으로 기계를 사서 방송을 하는 겁니다.” 박 의장이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는 “임자는 가끔 엉뚱한 짓을 잘해”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그 시절 나는 여러 번 박정희 의장을 놀라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 소사전 1963년 대선 사상 논쟁 = 제5대 대선에서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사상을 문제 삼아 공격했다. 63년 9월 24일 윤보선은 “여순사건 관련자가 정부에 있다”고 폭로했고, 9월 25일엔 윤보선 측이 “간첩 황태성사건엔 정부 고위 당국자가 관련돼 있다”는 전단을 서울 시내에 뿌렸다. 논쟁이 가열되자 박정희는 10월 10일 기자들을 만나 “황태성은 친형 친구지만 해방 뒤 보니 이미 공산주의자였다. 그가 내려와서 나와 접선했다는 건 조작된 허위사실”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윤보선의 이념공세는 실패했다. 박정희는 1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윤 후보 발언은 유권자에게 어두운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의 실언은 치명적이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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