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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도 해 본 놈이 잘하지 않소" 남궁련 '구속 실업인 석방' 요구 …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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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0> 근대화 선봉에 선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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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6월 13일 김종필(오른쪽) 국무총리는 삼청동 공관에서 일본 경제인단 환영 만찬행사를 열었다. JP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과 쪽지를 보고 있다. JP 뒤쪽 벽의 편액은 구한말 서예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쓴 붓글씨 ‘以心傳神’(이심전신). 지금은 JP의 신당동 자택 고 박영옥 여사의 방에 걸려 있다. 요즘 JP는 “부부 사이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차원을 넘어 신통(神通)한 경지여야 한다”고 했다.

5·16의 성공으로 군사정부가 들어섰지만 혁명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해야 혁명은 완수된다. ‘근대화’는 당시 별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나는 근대화라는 용어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길 기대하면서 공식적으로 자주 사용했다.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은 혁명정부의 상징이자 목표였다. 거대한 역사의 전환을 이끄는 30대 내 머리에선 불이 번쩍번쩍하듯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이 나왔다. 근대화란 개념도 그런 인스피레이션이 작용해 정립됐다. 근대화란 ‘자유 민주주의’가 기초가 돼 국민이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활동하면서 희망을 갖고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하려면 경제발전이 우선돼야 한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겠는가. 자유나 민주주의는 그걸 누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다. 근대화의 첫 번째는 경제발전이다. 국민이 잘살 수 있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하고 그 다음에 복지국가로 이행하면 된다. 이 목표들을 동시에 이룰 순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많은 신생·후진국들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 것이다.

 이런 정신은 2300년 전 맹자(孟子)가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고 한 얘기에 잘 나타난다. 항산은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을 말하고 항심은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을 뜻한다. 항산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지도 않고, 자유로운 생활도 못한다. 맨날 허리를 구부리고 살 수밖에 없다. 재산이 있으면 싫어도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고향 부여에 미리 만들어 놓은 내 묘비에 ‘無恒産 無恒心을 治國(치국)의 根本(근본)으로 삼아…’라고 써 놨는데 거기엔 산업화를 먼저 해서 민주화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는 내 평생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내가 초대 부장을 맡은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과업 수행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자 근대화의 싱크탱크였다. 혁명의 명분과 근대화의 실질이 부딪칠 때 나는 실질 쪽을 중시했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는 내가 쓴 혁명공약 제3항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출범과 동시에 ‘부패·구악 일소’란 혁명과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961년 5월 28일, 최고회의는 부정축재처리위원회(위원장 이주일 소장) 위원 명단과 함께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발표했다.

 이날 내로라하는 재계 거물들이 죄다 부정축재자로 잡혀 들어갔다. 최고회의가 결정한 일이라 내가 손 쓸 틈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장인 나는 혁명정부를 뒷받침한다는 뜻에서 최고회의 위원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가난을 추방하고 산업화 기반을 다지기 위해 실업인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 경제인 구속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6월 8일 한국일보사 장기영 사장(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9대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신경 쓰던 바로 그 부분을 긁어 줬다. “경제의 ‘경’자라도 아는 건 실업인들뿐이니 활용을 해야 합니다. 극동해운 사장인 남궁련이라는 분이 있는데 우리 경제의 실상과 경제인의 역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 부장이 한번 만나서 조언을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한국일보 옆에 있는 그의 집을 밤중에 예고도 없이 찾아갔다. 남궁 사장은 초면인 중앙정보부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기업인들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경제재건을 하려고 하는데 조언을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실업인들을 잔뜩 잡아넣은 게 중앙정보부에서 한 일이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아니, 내가 한 게 아니라 최고회의에서 했다”는 대답에 남궁 사장은 “그럼 정보부장이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느냐”고 되묻곤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박정희(가운데)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9월 18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인들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박 의장을 중심으로 왼쪽이 김종필 중정부장, 오른쪽 첫째가 유원식 최고회의 재정위원, 둘째가 박태준 상공위원이다. 맨 왼쪽은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한국일보 창업주인 장기영 전 경제기획원장관. 친구인 남궁련 극동해운 사장을 JP에게 소개했다.
 남궁 사장의 논지는 분명했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잘 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소. 혁명정부가 경제계획위원회 같은 걸 출범시킨 거 보니까 경제재건을 최우선으로 하려는 모양인데 그 사람들 잡아넣으면 경제활동은 누가 하겠습니까. 구속된 실업인들을 내놓고 활동하게 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소? ” 나는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기업인들의 활동을 활발하게 넓혀 가도록 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남궁 사장은 내 손을 꼭 잡았다. “아, 무지막지하게 혁명을 하는 사람들 속에 부장님 같은 분이 있었습니까. 놀랐습니다”고 말했다.

 이튿날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을 찾아갔다. 남궁련 사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하고 구속 경제인들의 석방을 건의했다. “실업인들 말고 경제를 일으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경제기획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경제를 아는 사람들은 몇 명의 학자들뿐이지 않습니까. 구속된 사람들 전부 풀어서 밖(외국)으로 내보내서 한 건(투자유치)씩 물어 오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고 박 부의장을 설득했다. 박 부의장은 처음에 “최고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한 건데 할 수 있나…”라고 하더니 내 말을 듣고 나서 “나도 사실은 실업인 잡아넣는 데 동의하지 않았어. 잘 처리해 보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당시 발표된 구속대상자 중에서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마침 일본에 머물러 있어서 체포를 피했다. 혁명정부가 기업인들을 다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귀국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월 22일 마침 재일거류민단 권일 단장이 5·16 혁명을 지지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그날 권 단장이 투숙하던 명동 사보이 호텔에서 그를 만나 이병철 사장 문제를 꺼냈다. “도쿄에 돌아가면 이 사장을 만나서 ‘신변 문제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주시라’는 내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권 단장의 말을 전해 들은 이병철 사장은 6월 26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던 이병희(육사8기·후에 7선의원)를 시켜 공항에서부터 깍듯이 모셔오라고 지시했다. 이병희는 중앙정보부의 검은 지프에 이 사장을 모시고 명동 메트로 호텔로 데려왔다. 그날 밤, 호텔 2층 방에서 나는 이병철 사장과 처음 만났다. 그의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나는 “잘 오셨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경제인 중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분이 이 사장님밖에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 말에 마음을 놓은 듯 표정이 풀어졌다. 나는 대뜸 “사장님께서 실업인들을 전부 모아 경제인협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맡아 주십시오. 우리나라 경제재건에 앞장서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그는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인 27일 이병철 사장은 이병희 서울분실장 안내로 태평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청사에 갔다.

이병철 사장이 검은 안경을 낀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과 첫 대면하는 자리였다. 박 부의장은 “이 사장이 선두에서 경제인들을 규합해 달라”고 당부했다. 구속된 실업인들은 6월 29일 모두 풀려났다. 이 사장은 61년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나는 실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여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대줄 테니 밖으로 나가서 어떻게든지 일감을 잡아갖고 오시라”고 독려했다. 역시 기업을 꾸려본 경제인들은 수완이 좋았다. 서독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가서 일감을 하나씩 둘씩 따냈다. 외자 유치를 위해 가장 선두에 서서 뛴 사람은 이병철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이었다. 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2~66년)에서 제일 노력을 많이 한 분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남궁련(1916~2006년)=한국 해운업을 개척한 기업인. 1949년 극동해운을 설립했다. 부산 앞바다에 침몰해 있던 일본 대형 화물선을 인양·수리해 52년 한국에서 가장 큰 선박인 ‘고려호’(별칭 미스코리아, 적재량 1만230t)의 선주가 된다. 54~59년 국영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61년 창립된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의 부회장으로 외자 유치에 적극 나섰다. 68년 민영화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인수해 88년까지 회장직에 있었다. 그의 뜻에 따라 평생 모은 문화재 256점은 사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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