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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혁명 지지행진 … 상황 종료, 구질서가 무너졌다 … 이한림 "내

fabiano 0 162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2> 18일, 5·16의 완결
 
1961년 12월 서울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열린 송년 파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대장)과 재건복을 입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칵테일 잔을 들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 부장은 반혁명 사건으로 장도영 참모총장을 제거(7월)하고 박정희 의장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11월)을 통해 군사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인해 박-김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한 세밑을 맞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역사는 의지로 쓰여진다. 5·16의 성패는 인간 의지로 갈렸다. 거사의 설계자인 김종필(JP)은 “성공 요체는 의지”라는 확신을 전파했다. 전격적으로 실천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의 체포는 그가 주도했다. 장면 정권 쪽에도 반격의 기회와 역전의 공간이 있었다. 저지의 수단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진압 의지는 허약했다. 그들은 분산된 채 파산했다.


 5·16 당일은 격랑(激浪)의 24시였다. 우리는 목표를 점령했고 상황을 잡아챘다. 박정희 장군이 이끈 궐기군은 한강 다리를 돌파했다. 수도 서울, 군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새벽 KBS 라디오 방송은 군사 혁명을 역사의 운명으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거사는 미완성이었다. 그 물결 속에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의 비판적인 자세,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모호한 처신, 1군사령관(중장) 이한림의 거부 언동은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한국군 작전 지휘는 주한미군 매그루더(대장)의 권한이었다. 매그루더는 궐기군 출동을 작전지휘권의 이탈과 훼손으로 규정했다. 그는 저지와 진압 작전을 구상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내각제의 총리는 실질적인 군 통수(統帥)권을 갖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피신 상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나는 “의지가 핵심이고 병력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한림의 1군 존재는 우리 혁명 세력을 긴장하게 했다. 다음 날인 17일 ‘이한림 야전군’의 반격설이 퍼졌다. 이한림(40세)은 우리의 거병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1군(당시는 3군이 없었음)은 대규모 야전부대로 구성됐다. 5개 군단,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했다. 우리 병력은 3600명, 1개 사단도 못 된다. 1군의 1개 군단이 진압군으로 나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군본부 혁명지휘소에 초조와 불안감이 감돌기도 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생도들의 오른쪽에 덕수궁 돌담과 대한문의 지붕이 보인다. 몰려나온 시민들 앞엔 계엄군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다. 5·16은 육사를 비롯한 3군 사관생도들의 거사 지지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중앙포토]

 장도영 참모총장의 어정쩡한 태도는 계속됐다. 그는 궐기 취지에 동참했다. 군사혁명위 의장에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추이와 미군의 눈치를 봤다. 그 때문에 육본 장군들의 과반수가 관망적인 자세를 취했다. 혁명 대열은 아직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우리는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 이한림 장군을 현지 체포하기로 했다. 상황 주도권을 확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세력에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걸 막아야 했다.

 박정희·이한림 장군은 젊은 시절 우정과 경쟁의 사이였다. 둘은 만주군관학교(2기)→일본 육사(57기, 편입) 동기다. 네 살 어린 이 장군은 먼저 한국군 장교로 임관(군사영어학교)했다.

이 때문에 계급 차이가 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 성적은 박 소장이 1등, 이 장군은 2등이다. 졸업 성적 우수자에겐 일본 육사 3학년 편입 특혜가 있었다. 둘은 일본 육사에 들어갔다. 졸업 때 두 사람의 성적은 바뀌었다. 1등이 이 장군, 3등이 박 장군이었다. 그때 이 장군은 박 소장에게 “야, 꼬맹아. 내가 너한테 늘 질 줄 알아. 어때 봐. 이게 내 실력이야”라고 자랑했다. 박 소장은 그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그러면서 박 장군은 “나는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이한림 얘기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

  거사 준비 단계 때다. 박 소장은 이한림 사령관한테 동참을 제안했다. 이 장군은 피식 웃었다. ‘네가 무슨 혁명을 하겠느냐’는 식으로 일축했다. 그런 이 사령관은 우리의 감시 대상 1순위였다. 나는 ‘이한림 대책’을 모색했다. 1군 사령부 내부에 믿을 만한 동지를 찾았다. 작전처에 육사 8기 동기 조창대 중령이 있었다. 그를 거사 대열에 끌어들였다. 같은 8기 동기생인 박용기·이종근·심이섭·엄용길 중령(8기)도 참여했다.

 그 덕분에 이 사령관의 동향 정보는 나에게 즉각 들어왔다. 나는 1군의 8기 동기생들과 수시로 교신했다. 이 사령관은 “내 승인 없이 군사 혁명은 절대로 성공 못한다”고 호언했다. 그리고 “동원한 부대를 전원 복귀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17일 오후엔 매그루더 사령관이 사령부(원주)로 날아갔다. 매그루더는 그에게 진압부대 출동을 종용했다. 이 사령관의 진압 의지는 주춤했다. 그의 지휘 부대 내부 균열 때문이다. 문재준 6군단 포병단장은 이미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어 채명신 5사단장, 박춘식 12사단장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한림의 존재’는 골치 아팠다. “진압하겠다. 나의 승인 없인 안 된다”는 그의 언행은 혁명군으로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면 그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결행은 불가피했다. 나는 이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모두 같은 목적에 목숨을 내놓았다. 호흡이 탁탁 맞았다.

18일 새벽 조창대 팀은 이 사령관의 관사를 급습했다. 관사 주변을 지키는 헌병들도 길을 열었다. 헌병부장이 조창대 팀에 포섭됐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을 통한 ‘혁명 기정사실화’의 효과였다. 대다수 1군 장교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 사령관은 권총을 빼어 든 조창대 체포 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혁명은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 사령관은 18일 정오께 서울 덕수궁으로 압송됐다. 그곳에 주둔하던 공수특전단이 그를 감금했다. 누군가 이 사령관을 어떻게 처리할는지 물었다. 나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조금 있다가 ‘혁명, 계속 반대하느냐’고 물어봐라. 그러고 반대 않겠다면 함께 일하게 만드는 게 좋다”고 답해줬다. 박 소장도 “그거 잘했어. 그 친구 머리가 좋아. 성격은 좀 뭐하지만…”이라고 말했다. 이 사령관이 공수단한테 총살 위협과 모욕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18일은 거사 완결의 하루였다. 이 장군이 압송당하던 그 시간. 젊은 생도들이 군사혁명 무대에 등장했다.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이다. 1~4학년 생도(18~21기)와 육사 장교단 전원이 참여했다. 800여 명 생도는 흰색 바지와 X자 멜빵, 화려한 예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서울 동대문에서 시청 앞까지 행진했다. 시민들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젊음의 패기, 원색의 복장은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그 광경은 혁명의 안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시가행진의 반환점인 시청 앞 광장에서 생도 대표는 “조국아, 민족아, 상기하라. 부패와 무능에 감연히 항거하여 일어난 국민의 군대는 새로운 조국 건설의 역군이 될 것임을”이라고 외쳤다.

군사혁명위 장도영 의장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격려사에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부패·무능의 상징인 기성 정치인을 배제하고 국가 재건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장 총장의 대중연설은 우리의 궐기 대의(大義)와 같았다. 그전의 모호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육군본부 장군들의 흐릿한 자세도 사라졌다. 육사 생도에 이어 이튿날 공군 사관생도들은 서울에서, 해군 생도들은 부산에서 각각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사관생도의 시위가 군내 기회주의적 분위기를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이어 낮 12시30분 피신했던 장면 총리가 중앙청에 나왔다. 5·16 새벽 0시부터 사흘, 긴박과 불안이 겹쳤던 60시간의 상황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장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군사혁명위가 선포한 비상계엄령과 각종 포고문을 추인했다. 민주당 정권은 9개월 만에 구질서가 되었다.

 나는 사흘간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그날은 집으로 갔다. 늦은 저녁 귀가길, 용산 전차역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전차에 서로 올라타려고 했다. 계엄령의 통행금지 시간은 밤 10시부터. 서둘러 귀가하는 모습이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질서에 순응, 협조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조창대(1927~69) 중령과 그의 팀=5·16 당시 이한림 1군사령관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한 육사 8기생팀. 조창대·이종근·박용기·엄용길·심이섭 중령 등으로 이 사령관의 참모들이었다. 1군사령부는 원주에 있었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거사 계획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이한림을 감시하기 위해 육사 동기생인 이들을 끌어들였다. 박정희를 5·16의 지도자로 옹립한 이른바 ‘4·7 명동회합’ 때 조 중령이 참석했다. 조창대는 재선 의원(진해)을 지냈고 69년에 경비행기 추락사했다. 이종근은 충주에서 6선 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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