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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의지다, 숫자가 아니다" 60만 대군 중 3600명 거병 … 박정희 "중심

fabiano 0 1595  

1962년 4월 경기도 포천 6군단사령부를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에서 둘째). 6군단포병단은 5·16 당시 가장 먼저 육군본부를 접수했다. 맨 왼쪽은 황종갑 최고회의 총무처장(준장), 김종필 부장오른쪽은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소장), 그 옆은 김계원 6군단장(중장). 김계원 장군은 이후 5대 중정부장과 대만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그 무렵 나는 기도를 했다. 혁명의 성공을 간절히 구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고 했다. 영어로 ‘메이 가드 블레스 어스(May God bless us·신이여 축복하소서)’를 되뇌었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적은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데 별로 저항이 없었다. 석 달간 거사 준비 과정에선 비밀 누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군 사령탑은 이렇다 할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 그래’ ‘그게 사실이야?’ 하는 반응 정도였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1961년 5월 14일 오전. 거사 계획을 확정 짓는 마지막 회의가 서울 약수동 셋째 형님 댁에서 있었다.

종락(鐘洛) 형님은 한일은행에 다녔는데 우리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형님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집 앞 골목길 입구에 나가 군 방첩대(CIC)나 범죄수사대(CID)의 감시가 따라붙었는지 망을 봐주었다. 형님 댁이 25명의 혁명주체들로 꽉 찼다. 거사 당일 움직이게 될 책임자들이다. 한 달여 전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할 때 29명이 모인 이래 가장 많은 숫자였다.

 내가 총괄기획 및 조정 역할을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박정희 소장은 D데이 H아워가 5월 16일 새벽 3시임을 선언했다. 그 순간 긴박감이 고조됐다. 그 전에 잡았던 거사일 4월 19일과 5월 12일이 두 번이나 연기됐기에 선언의 무게감은 더했다. 박 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D데이 H아워의 변동은 없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 중 누군가 “출동병력이 한 곳으로만 몰리는 것 아닌가. 대구나 부산, 인천, 수원 등 지방 주요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박 소장은 “서울이 중요하다.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적은 병력으로 큰 군대를 상대할 땐 중심부를 쳐야 한다는 게 박 소장의 생각이었다.

 혁명은 기습이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핵심부를 전격적으로 집중해 치는 것이다. 대상이 움직이기 전에 이쪽의 선제(先制)공격이 승부를 가른다.

칭기즈칸이 10만의 군사로 몽골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지역을 평정한 비결도 이것이었다. 주변부를 버리고 중심부만 장악하는 방식이다. 칭기즈칸은 광대한 지역의 주요 도시, 요충지에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앞으로 전진했다.

 회의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로 합니다. 의지는 자기 몸을 집어던지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결의로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의지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전 기안을 맡은 박원빈 중령(6관구 작전참모)은 “16일 0시를 기해 예하부대에 비상훈련을 가장한 혁명군 출동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고 보고했다. 6관구는 혁명 지도부의 첫 지휘소로 결정됐다. 6관구는 수도권을 방위하는 사령부다.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거사 책임을 맡았다. 첫 지휘소 임무가 끝나면 두 번째 지휘소는 남산 KBS방송, 세 번째는 육군본부로 옮길 예정이었다. 박원빈 중령이 발표한 거병과 점령 목표는 이랬다. 괄호 안은 거사 책임자.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육사 5기) 대령. 영등포에 주둔한 6관구는 5·16의 첫 지휘소 역할을 했다.
 ◆제1공수단(단장 박치옥 대령)=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과 방송·통신 기관, 중앙청, 국회의사당 ◆해병1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6군단 포병단(단장 문재준 대령)=육군본부 ◆30사단(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청와대, 시경탄약고, 서대문형무소, 연희송신소 ◆33사단(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전화국, 중앙우체국 ◆특수임무(오치성 대령, 옥창호·김형욱·이석제·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출동부대 독려 및 요인 체포.

 마지막 분위기는 비장했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면 다음에 만날 곳은 육군본부이거나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이승의 끝이 될지 모르는 동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는 신문지에 싸서 미리 준비한 100만환(지금 1000만원 정도)을 그들에게 쪼개서 나눠줬다. 한 사람당 쌀 한 가마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양식이라도 사주시라”고 말했다. 그 돈은 남상옥 사장(사업가·뒤에 타워호텔 사장)한테 마련했다.

 무산된 두 차례 거사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날 동대문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3만 명이나 모여 기념식이 있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꿨다. 상황이 조성되어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2군 부사령관)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계획은 5월 12일이었는데 주체세력 중 한 명의 부주의로 비밀이 누설됐다. 육본의 이종태 대령이 경인 통근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포섭하기 위해 혁명 준비 상황을 발설한 것이다. 이 동료는 방첩대에 밀고했다. 거사 계획은 서울지구 방첩대장(이희영 대령)→육본 방첩대장(이철희 준장)→장도영 참모총장(중장) 순으로 보고됐지만 방첩대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 대령 한 명만 구속시키고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쿠데타 소문이 날짜까지 박아 군내에 널리 퍼지게 돼 부득이 그날 궐기를 중단했다. 우리들의 거사 계획은 여러 쪽에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장도영의 군 수뇌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신빙성을 두지 않든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생겼다. 기묘한 상념이 일었다. 1950년 6·25 남침 때다. 정보국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무관)과 북한반장(중위)인 나는 49년 12월에 전쟁 발발 시점과 징후를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군과 정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안일함,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때 군 수뇌부는 알면서도 남침을 당했다. 그 11년 뒤 군 지휘부는 군사혁명을 눈치챘으면서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중앙일보 창간 50년 기획] 김종필 증언론 '소이부답' 더보기

● 인물 소사전 김종락(1920~2013년)=김종필의 셋째 형으로 5·16에 민간인 신분(한일은행 과장)으로 가담했다. 1949년 상호은행(한일은행 전신)에 입행해 전무까지 지낸 뒤, 68년 서울은행장에 올랐다. 66년 9대 대한야구협회장에 취임(66~80년)해 12대(89~93년)도 지내 최장기(18년) 협회장으로 재임했다. 국제야구연맹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업체 ‘코리아 타코마’를 운영하다 91년 한진그룹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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