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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박정희, 참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사내였어 … "내가 사고 당해

fabiano 0 1582  

1952년 4~8월 김종필 대위(왼쪽)는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본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육사 교정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종필 대위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文官)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박정희란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내가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행정처에 사병으로 근무할 때 7기 특별반 1중대장을 하던 분이었다. 그러다 어디로 잡혀갔다고 하는 소문만 들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듬해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었다.

 박정희 사관학교 제1중대장은 비분에 차 있었다.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울분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일제의 지배 시대, 박정희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新京, 지금의 長春)에 갔다.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특별 입학, 졸업(57기)한 엘리트 장교였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나와 소위로 임관했다. 미 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군인정신을 찾기 힘든 장교들도 있었다. 사명감 투철한 엘리트 장교 출신의 박정희 소령이 개탄할 만했다. 해방공간 속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50년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시절 육사 8기 동료들. 앞줄 왼쪽부터 서정순(훗날 정보부 차장)·석정선(정보부 차장)·전재덕(정보부 차장), 뒷줄 왼쪽부터 이영근(유정회 국회의원)·고재훈(정보부 국장)·안영원(경제 과학심의회의 부이사관). [중앙포토]
 사관학교 2중대장이던 강창선 대위는 박 소령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친했다. 비밀 남로당원이었던 강창선은 우수한 장교와 육사 생도를 당원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강창선 대위가 박정희 소령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도, 그 뒤로도 박정희 소령은 술과 술자리를 좋아했다. 강창선은 박 소령에게 접근해 저녁 자리를 벌였다. 박 소령은 술만 들어가면 마음속 응어리를 분출해 내곤 했다. 세상과 군대에 대한 답답함과 비분강개를 한바탕 쏟아내야 속이 시원했다. 술김에 과장되고 격한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군 내 빨갱이 검거에 열을 올리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는 이미 강창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좌익계열 숙군(肅軍)의 바람은 거셌다. 일본군 헌병보 출신인 김창룡은 공산당을 때려잡겠다며 한창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강창선과 자주 어울리는 박정희가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나중에 육사 8기로 나와 동기생이 되는 전창희에게 밀명을 내렸다. “박정희가 사상이 온건치 않아 보인다. 네가 책임지고 전모를 캐라.”

 박정희 소령이 술자리에서 터뜨린 불평불만이 전창희를 통해 고스란히 김창룡에게 보고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과격한 발언이 그를 옭아맸다. 48년 11월 강창선에 이어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남로당에 가담해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 10·1사건 때 사망한 셋째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에 물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 꾸며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멋대로 갖다 붙인 소리다. 내 장인 박상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두 형제분 간 사이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의 장인에 대해선 황태성 사건과 관련 있어 나중에 기술하겠다.

 박정희 소령은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박정희 소령을 구해준 건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그는 군대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백 대령이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침 김창룡은 사생활이 깨끗한 백선엽을 가장 존경하는 상사로 여기고 있었다. 김창룡도 백 대령 뜻을 따라 박 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박 소령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그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한 것도 백선엽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위해 원래 직제에 없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선 그때가 특히 불행했던 시기다. 타의에 의해 군인의 길을 접고, 사관학교 중대장 시절 직접 가르쳤던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육사 특7기) 밑에서 편제에도 없는 실장으로 일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대해 그가 불평의 말을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육사 후배들에게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라고 말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정을 그땐 나도 미처 알 수 없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중앙일보 창간 50년 기획] 김종필 증언론 '소이부답' 더보기

◆남조선노동당(남로당)=박헌영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그해 8월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된 뒤 남한 내 좌익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됐다. 남한의 공산화 공작을 진행하다 48년 12월 국가보안법으로 당이 불법화되자 간부들이 대거 월북한다.


● 인물 소사전 김창룡(1920~56년)=이승만 정권 시절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특무대장. 일본 관동군 헌병보로 근무하다 광복 후 귀국해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사) 3기생으로 졸업했다. 여순사건 직후 숙군작업에서 이재복·이중업 등 남로당 간부를 잇따라 체포해 이름을 떨쳤다. 51년 육군 특무대장(대령)이 됐고 53년 준장, 55년 소장으로 승진했다. 군내 좌익 제거에 앞장서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56년 그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은 허태영 육군 대령과 그 부하들에게 저격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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