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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국시 처음 본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 " 거사 전날 JP "배

fabiano 0 1457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5·16군사혁명은 구질서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의 지휘자라면 JP는 5·16의 설계자다. JP의 현대사 증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석 달 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벗어뒀던 카키색 군복이다. 중령 계급장은 달려 있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이 군복을 입고 먼 길을 나설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가슴 온 구석을 채웠다. 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글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면서 썼던 선언문은 다름 아닌 ‘혁명공약’이었다. 그것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거사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그 혁명의 물결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나와 내 조국 대한민국에 닥치고 말았다.

 글 솜씨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 격문만큼은 잘 써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썼다가 지웠다. 이틀 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나열했다.

52년 4월 김종필 대위의 가족사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전해인 60년 4·19가 벌어졌다.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이 가셨을까. 전혀 아니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던 민주당 장면 내각은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수수방관했다고 할 정도다.

 혼돈이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엔 경찰관 데모가 있었고 9월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61년 3월 21일 대구에선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선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하는 ‘민족자주통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었다.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수 국민도 사회 혼란을 걱정했다. 국민 대부분이 결정적인 전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전쟁의 기억, 그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맞이할 위험은 거세고 높은 파도처럼 우리 사회에 닥칠 기세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1300여 명 가운데 전쟁 때 절반을 잃은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결의였다.

 거사를 앞에 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10대 후반 시절 내가 감명을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 펜은 거침이 없었다. 내 글에 제법 힘이 담겼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취지문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의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가 계획한 디데이, 5월 1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5일 아침 혁명취지문과 포고문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아내 박영옥(朴榮玉)이 말을 꺼냈다. 당시 아내는 첫째 예리(禮利)를 낳고 10년 만에 둘째 진(進)을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하시는 거예요?’ ‘응,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내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불룩해진 아내의 배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놈은 아들이 틀림없을 거요. 잘 키워서 훗날 녀석에게 이 아비가 헛일 하다가 죽지는 않았다고 가르치라고.’

 비감(悲感)이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있던 집 앞의 언덕을 내려갔다. 아내는 문밖에서 떠나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언덕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내가 저만치 보였다. 역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정이 그랬을까. 장미의 5월 속 적막한 봄날이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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