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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사진 ①

fabiano 8 3719  

아래의 포스팅은 국립중앙도서실에서 미국의 NARA의 기록사진자료실의 수많은 사진박스 속에서

찾아 낸 전쟁 중의 인간군상- 피란민, 고아, 군인들(국군, 유엔군, 인민군), 종군기자, 민간 노무자들의

모습과 전쟁의 와중에 다시 열린 장터, 상여꾼, 추수 중인 아낙네들 등 전쟁 중의 삶의 모습이 담긴 기록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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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이었다는 작전을 성공시킨 직후. 썰물이 빠져나간 직후의 월미도 풍경이다. <개펄 위의 LST> 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1950년 9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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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직후 월미도 해변. 월미도의 한 해변 휴양소에 설치된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이 심문을 받고 있다.
625개전 직후인 1950년 7월에 244명에 불과했던 인민군 포로 수는 인천 상륙 작전 직전인 9월말 3만8천250명으로 불어났고, 10월에는 8만1천765명으로 급증했다. 월미도의 이 포로들은 한국전 이후 다수가 한꺼번에 생포된 최초의 포로들이다. 1950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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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해병의 포항 폭격 개시 직전에 함대 폭격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주민들.
이부자리, 식량 보따리, 거적자리, 지게는 피난민의 필수품이었다. 1950년 10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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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상륙 작전을 위해 동원된 미 해병 수송선들이 원산항이 있는 영흥만에 정박해 있다. 인천 상륙 작전 직후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원산을 제2의 상륙지로 점찍고 미군 내에서의 일부 반대에서 불구하고 상륙 작전을 감행했으나,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육로를 통해 먼저 원산을 탈환하자 애초에 계획되었던 원산 무력 상륙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상륙 작전 주력 부대로 원산 앞바다에 집결했던 미 해병 1사단과 10군단은 영흥만의 기뢰에 발이 묶여 무혈 상륙마저
날짜를 늦추어야 했다. 1950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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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이 시작된 지 보름째 되던 날의 개성 회담장의 조선인민군들. 1951년 7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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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여전사의 웃음. 여전사복을 입은 정전회담장의 한 안내원이 공산군 종군 기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1951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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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를 위해 연안으로 접근하는 수송선들. 1950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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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난 원산의 한 마을 현장을 취재 촬영중인 미 해병 취재팀과 구경나온 마을 주민들. 1950년 11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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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을 위해 대만 정부가 제공한 쌀을 노무자들이 트럭으로 옮겨 싣고 있다. 1951년 12월18일, 장소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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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가 결정된 후, 현지 아낙네들이 보급품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밀가루를 트럭에 옮겨 싣고 있다. 1950년 12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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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T(Landing Ship, Tank)에 타기 위해 몰려든 북한 피난민들. 피난민들 뒤로 야적되어 있는 미군들의 포탄이 보인다.
1950년 12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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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T로 옮겨 타고 흥남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깃배에 올라탄 피난민들. 1950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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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 사다리에 매달려 수송선을 기어오르는 피난민들. 1950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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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포로수용소 3 캠프 제4의료 구역. 미 속어인 <똥통(Honey Bucket)> 스트릿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1951년 2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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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보병 7사단 헌병들과 한국군들이 갓잡힌 북한군 포로들의 몸수색을 하고 있다. 1950년 9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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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자휘관이 혜산진 압록강변에서 강 건너 만주의 산록을 건너다보고 있다.
미 공군 폭격으로 강 기슭의 정자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1950년 11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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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남단인 신의주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사진 설명은 1950년 11월22일이라고 촬영 날짜를 기록해 놓았다.
압록강 북단(사진 오른쪽)인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1천2백미터 길이의 신의주교는 미 5공군 B-29 중폭기의 전략 폭격으로
12일 전인 11월10일에 이미 끊어져 있었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워싱턴의 북폭 자제 지시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주 보급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신의주교 폭파를 명령했었다.
이후 워싱턴은 한만 국경 남쪽 5마일 이내 폭격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된다. 1950년 11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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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으로 후퇴하던 중 부상당해 길바닥에 누워 있는 전우의 안부를 묻는 한 앳된 병사. 1950년 7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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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빠져나가며(1· 4후퇴 직전) 한강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 마을 어귀에 줄지어 서 있는 유엔군 차량들.
1950년 12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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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피난민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이라면 뭣에든지 올라탔다. 피난민을 태운 LST가 민간인 고깃배들과 함께 뒤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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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부두에서 유엔군 수송선을 기다리는 젊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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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비행장을 가로지르는 인민군 포로들의 행렬. 원산이 한국군에 의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10월16일에 촬영된 이 사진은, 미 7함대 소속 미조리 전함에서 발진한 헬리콥터에서 촬영된 것이다.
1950년 10월16일

 

8 Comments
abendort 2014.12.28 18:59  
Forgotten war to korean....
fabiano 2014.12.28 23:39  
이제, 우리 세대가 그나마 한국전쟁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인데... 갈수록 잊혀져 가는 한국전쟁의 교훈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어여쁜 나 2016.08.05 11:09  
저기 북한 인민군여성의 자연스러운 웃음 지금도 잊지못합니다~!!!! ㅠㅠㅠㅠㅠㅠ
fabiano 2016.08.17 10:29  
당시는 몰라도 지금은 전세계가 몇몇 나라만 빼고 자유로운 국가인데... ism에 농락된 웃음이네요.
어여쁜 나 2016.08.21 20:03  
전쟁과 분단의 아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ㅠㅠㅠㅠㅠㅠ
fabiano 2016.08.24 09:21  
전쟁은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니...
어여쁜 나 2016.12.01 18:51  
맨아래 대한민국으로 피난가는것을 앞두고 기념사진에 찍힌 저기 저 젊은부부의 모습을 보니까 지금의 젊은부부들과는 비교하기 힘들정도네요? 하기야 요새 우리나라 남녀들이 평균결혼연령이 만30세를 넘어가는 지금 저때당시 남녀들의 평균결혼연령이 10대후반에서 20대초반이었다고하니 짐작이 가죠~!!!!
fabiano 2016.12.01 20:36  
어쨋거나, 그 시절은 참으로 질곡의 세월이었으니...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죽었어도 끝까지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는 북한은 세습으로 대를 이으니 제2의 비극은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상황이라...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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