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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 '마지막사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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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1932년 9월 30일 아사히신문이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에는 이 의사 사진 옆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적어 놓았다. “대역범인 이봉창(상) 그의 생가(우하)와 도쿄에 있는 숙박 장부에서 확인한 필적.” [사진 매헌기념관]
독립운동가 이봉창(1900~32) 의사의 ‘최후 사진’으로 보이는 얼굴 사진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1932년 9월 30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실린 사진이다. 이 사진이 나오고 열흘 지난 10월 10일에 이 의사는 교수형을 당했다.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매헌기념관의 윤주 관장은 2일 “매헌 윤봉길 의사의 자료를 수집하다가 일본에서 이 사진을 찾았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사진은 몇 장 안 된다. 이 사진 이후의 사진은 나온 적이 없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마지막 사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거사는 실패했다. 체포된 이 의사는 도쿄 형무소에 수감됐다. 9월 30일 도쿄 법원에서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날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이 의사의 옆얼굴이 실려 있다. 열흘 뒤인 10월 10일 교수형으로 순국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이 의사는 미혼이었다. 윤 관장은 “사진만 봐도 양 볼이 앙상하다. 상당히 수척한 얼굴이다. 심한 문초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호외에는 이 의사의 생가 사진과 도쿄 숙박지에 남긴 이 의사의 필적 사진도 함께 실렸다.

 이 의사의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일제시대 ‘3대 의열 투쟁’으로 꼽힌다. 이 의사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일하다 학대를 받았고, 만주의 남만 철도회사에서 운전견습을 하다 ‘조센진’이란 수모를 당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자극 받은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어를 배우는 등 6년 넘게 일본을 익힌 뒤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비밀리에 백범 김구를 만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백범은 이 의사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동생 집으로 갔다. 이 의사는 거기서 태극기를 앞에 두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일왕에 대한 저격을 선서했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침체했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불을 지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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