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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 정명훈 카퍼레이드 … 미스코리아 오픈카 빌려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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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의 산증인.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기 힘들다. 이종덕(79) 충무아트홀 사장 얘기다. 1963년 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 주사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88서울예술단장(1989∼94), 예술의전당 사장(95∼98), 세종문화회관 사장(99∼2002), 성남아트센터 사장(2004∼2010)을 거쳐 2011년부터 충무아트홀 사장을 맡고 있다. 공연 행정가로 그가 일해온 50년은 한국 공연의 발전사와 겹쳐진다.

어느새 팔순(21일)을 앞둔 이 사장이 자서전 『공연의 탄생』을 펴내며 자신이 경험한 70년대 공연계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사무실에서 10일 오후 이 사장을 만나 그만이 전해줄 수 있는 ‘공연 비사(秘史)’를 들었다. 우리 공연계가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시대의 추억을 4개의 에피소드로 되돌아본다.

이종덕
 ◆뮌헨올림픽 기념 해외 예술단=72년 8월 독일 뮌헨올림픽. 한국은 8개 종목 46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문화공보부에선 뮌헨올림픽 예술단을 구성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시작으로 4개월 동안 전세계 24개국을 돌며 우리 민속음악과 전통춤 공연을 펼칠 계획이었다. 예술단원으로는 인간문화재 김소희·박귀희·한영숙·강선영 등 전통문화계 실력자가 총동원됐다. 당시로선 무명이었던 이생강·박범훈 등이 대금·피리 등의 반주자로 동행해 짐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종덕 사장은 당시 예술단 총무로 동행했다. 신용카드는 물론 온라인 금융도 없던 때였다. 예술단원 50명이 넉 달 동안 쓸 돈(총 3억7000만원)을 손에 들고 다녀야 했다. 불안불안했는데, 결국 두 번째 방문지인 영국 런던에서 사고가 터졌다. 회계를 맡은 직원이 돈가방을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다. 이 사장은 “당시 내가 살던 집값이 8000만원이었다. 템즈강에 빠져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다음날 돈가방을 버스회사에서 찾을 수 있었고, 예술단의 향후 일정도 계획대로 진행됐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 않는 순간이다.

◆포드 대통령 긴급 피신 소동=74년 11월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 워커힐 호텔에서 만찬과 환영공연이 진행됐다. 이 사장은 공연 총책임을 맡았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정전이 됐다. 70년대 정전은 흔한 일이었지만, 한·미 국가원수가 한자리에 있는 상황에선 비상사태였다. 호텔 측이 재빨리 비상발전기를 돌린 덕에 30초 만에 불이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돌린 순간 이 사장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포드 대통령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정전이 테러범의 소행일지 모른다는 판단 아래 그 짧은 시간에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대역을 앉혀놓은 것이다. 포드 대통령은 단순 정전 사고라는 게 확인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이 사장은 “계속 자리에 앉아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적잖이 무안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올림픽 금메달 같은 성과=74년 7월 피아니스트 정명훈,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등. 당시 공연과 사무관이었던 이 사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국장실로 달려가 “올림픽 금메달과 같은 성과”라고 보고하며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하자”고 제안했다. 흔쾌히 승낙이 떨어졌다.

카퍼레이드용 오픈카를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미스코리아 대회 주관사였던 한국일보에 부탁해 빨간색 오픈카를 빌렸다.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이 탔던 차였다. 입국한 정명훈이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이 사장은 대한뉴스 제작진 차를 타고 오픈카를 바짝 뒤쫓았다. 도심에 들어서자 빌딩 옥상에선 오색 종이비가 내렸고, 연도에는 환영인파가 넘쳤다. 이벤트를 기획한 이 사장조차 예상 못한 열기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날 시청 앞 환영행사 실황은 TV·라디오로 중계됐다.

 ◆어렵게 찾아낸 성악가 이규도=74년 8월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 피살. 장례는 9일장이었다. 장례식에서 부를 추모곡을 만드는 일이 문공부에 떨어졌고, 실무를 이 사장이 맡았다. 작사는 박목월 시인에게 요청했다. 당시 문공부가 명랑한 음악을 만들어 보급하는 ‘국민개창운동’을 펼쳤는데, 박 시인이 자문위원이었던 게 인연이었다. ‘가시다니 여사님’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은 금세 완성됐다. 작곡은 김동진 당시 경희대 교수가 맡았다. 노래가 완성되기까지 딱 3일이 걸렸다.

이제 성악가를 찾아야했다. “분위기가 육 여사 품격과 잘 어울리는 성악가가 필요했다”고 한다. 김자경 오페라단 단장을 찾아갔더니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공부하고 막 귀국한 신예 성악가 이규도를 소개했다. 이 사장은 “작은 체구, 뛰어난 미모, 조용한 분위기에 예술가 특유의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어 추모의 노래 성악가로 적격이었다”고 기억했다. 김동진 교수의 누상동 집에서 사흘 동안 집중 연습한 이규도의 노래는 장례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이후 이규도는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우리나라 대표 소프라노로 활동했다.

이지영 기자

[사진 설명]

1 1974년 7월 12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등을 차지한 정명훈 환영행사가 열렸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온 시민들이 스물한 살 청년의 국위선양을 함께 기뻐했다. [중앙포토]
4 1972년 뮌헨올림픽 예술단이 전세계 24개국을 돌며 우리 전통공연을 펼쳤다. 사진은 당시 예술단 관련기사가 실린 뉴욕타임스. 이종덕 사장이 40여년 동안 보관해왔다.

4 Comments
어여쁜 나 2017.01.12 16:23  
정명훈씨 젊었을때 저때는 꽃미남이었네요? *^^******
fabiano 2017.01.20 20:32  
젊으나 젊은 시절엔 누구나 꽃미남이었슴다.
어여쁜 나 2017.02.05 17:38  
하기야 요새 젊은남자들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연예인급 꽃미남들이 넘칠판에....!!! ㅋㅋㅋㅋㅋㅋ
fabiano 2017.02.07 22:54  
이 몸도 젊으나 젊은 시절에...블로그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함, 찾아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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