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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기 "자유찾아 천만리" - 탈북여성작가 지현아씨의 수기

fabiano 0 1203  
[연재1] 자유찾아 천만리
 
1장  _  참혹의 현장
 
 온성 보위부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젊은 엄마가 붙잡혀 들어오면서 왜 아이는 중국에 맡겨두지 않고 데리고 왔수? 아이고 고생이구먼!”
“그러게요.”
한 할머니가 안쓰러운지 조용히 이야기하니 주변의 사람들도 혀를 찼다. 아이 엄마는 40대였는데 계속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런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는 철없는 아이는 보위부(남한의 국정원)에서 주는 배부르지 않은 국수 죽을 먹고는 또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에구! 저걸 어쩌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아이 엄마의 아픔을 가셔주지 못했다.
아이 엄마는 그릇에 발라주는 죽도 먹지 못한 채 앉아만 있었다. 자리가 비좁기도 하지만 보위부에서는 누워 있을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누워 있으면 규율 위반이기에 누우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배고파 울고 있었고 이 아이뿐 아니라 복도에 있는 몇 명의 아이들까지 함께 울어댔다.
“엄마, 나 배고파요! 으앙!”
아이들은 보위부 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보위부는 남한의 국정원과 같은 곳이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배고프다고 난리들이야! 조용 못해? 중국에 가서 배부르게 처먹었으면 됐지, 뭐가 배고파 또 지랄들이야! 그치지 못해?”
우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는 보위부 지도원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웠다.
 아이들의 울음은 잠시 그쳤지만, 엄마들에게 또다시 칭얼댔다. 배고프다고 귀에다 대고 칭얼대며 조용히 엄마 품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들은 아이를 붙잡고 눈물만 흘렸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들의 울음소리, 엄마들의 흐느낌 소리, 심문을 하며 때리는 소리, 맞으며 우는 소리, 이 소리들이 온 북한 땅에 울려 퍼지고 있다.
북송된 사람은 보위부에서 혹독한 신문을 겪었다. 일단 격리 수용된 뒤 중국에서 체류한 기간만큼을 지내면서 그동안 하루하루 겪었던 일들을 일자, 시간대별로 고스란히 토해내야 했다.
 탈출 경로, 머문 시설과 남측 접촉 관계자의 신상 등 듣고 본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과정을 거쳤다. 몇 차례 정확도를 높이고 거짓 진술을 가리는 절차도 통과해야 했다.
이런 절차를 넘어선 뒤 이른바 자본주의 물빼기 작업이 시작되는데 자아비판과 김정일 혁명역사 교육, 사상교양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인간은 없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보...올...”

“야! 이 개새끼야! 똑바로 말 못해?”
남자 감방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보올수 있틉니...니...”
알고 보니 3호실에 중국 사람이 들어와 갇혀 있었다. 이 사람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어서 조선말을 잘 못하고 감방에서 화장실 볼 때의 말을 억지로 배운 것이었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바지에 싸게 했다.
“선생님, 3호실요. 토변 뽀수 있틉니까?”
“저 개새끼, 아직도 말을 저렇게 하냐? 야, 반장. 너 뭐해?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해? 다시 가르쳐!”
매 감방마다 반장이 있었다. 한족이 있는 감방의 반장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고 보위부 지도원에게 욕을 먹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왜 그렇게 가르쳐 줬건만 아직도 못해? 다시 해봐! 선생님, 3호실입니다.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해봐! 이 개새끼야!”
“선생님, 3호실입니다. 토변 뽈투 있틉니까?”
중국 사람을 발로 차면서 가르쳐 주는 반장과 발에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는 한족이었다. 3호실 감방에서는 한족의 비명소리가 흘러넘쳤다. 겨우 선생님한테 말하는 데 성공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놀랬다. 나이가 60세가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멍이 들고 눈이 부어 있었으며 코에서는 코피가 났다.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저렇게 해놓았다니 너무했다. 한족은 팬티 같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짝이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기 들어 온 지 3달이 됐다우! 중국 두만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경비대 군인들이 고기를 많이 줄 테니 담배와 바꾸자고 해서 담배를 들고 건너갔다가 붙잡혔다우. 올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은 군인들에게 빼앗기고 저런 헌옷만 입구 다니네. 불쌍하구먼! 빨리 중국에 가야 할 텐데….”
보위부 감방에 오래 있던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우리가 아무리 중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대접을 받지는 않았는데 너무 했다.
며칠 뒤,
“3호실 5번 나와! 너 좋겠다. 이젠 집에 가게 되어서 좋겠다.”
드디어 한족이 중국 땅 고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소리가 우리 감방까지 들렸다. 우리도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가 들어올 때만 해도 살이 붙어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동안 먹지 못해 많이 야위었다. 그래도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좋은가 보다. 우리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눈인사를 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밖에 나가 본 지도 오래되었다. 이젠 제법 바람이 선선한 초가을로 들어선 요즘 여전히 부모들과 동생들 생각이 간절했다.
감방에서는 원래 두 명의 여자만 따로 밥을 주었는데 국수 죽을 먹는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서 쌀밥에 반찬도 많이 주었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길에 붙잡혀 북송되어 온 여자들이었다. 한국으로 가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무조건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사형하게 되어 있다. 그중의 대표적 수용소가 요덕수용소인데 생명까지 위협받는 강제 수용소로 악명이 높은 탄압의 현장이다.
정치범 수용소란 김일성, 김정일의 정치적 사상에 대한 반대나 조선 법을 어기거나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써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다시 나올 확률은 거의 없는 곳이다. 한국으로 탈출하는 것은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었으며 김일성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여자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갈지 사형하게 될지 모르기에 가기 전에 식사만은 우리보다 고급스럽게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지만 다행히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슬픈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차려질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웃지 못 할 검사와 뽐뿌질

 
온성 보위부에서 많은 탈북자들이 돈 때문에 죽도록 맞았다. 중국 변방대에서 옷을 홀랑 벗고 돈 검사를 마쳤음에도 보위부에 들어오면 어디에들 감춰서 들어오는지 돈들이 많이 나왔다.

보위부에 도착하자마자 몸수색을 하고는 주사기로 피를 뽑아 무슨 병 검사를 한다고 했다. 여자와 남자를 갈라서 여자 쪽은 여자 군의가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임신한 여자건, 처녀건 상관없이 자궁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항문에도 손가락을 넣었다. 또한, 머리에 손을 얹고 제자리에 서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뽐뿌질을 100개씩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돈이 빠져나오기도 했다. 벗어 놓은 옷은 솔기마다 숨긴 돈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감방으로 보내지고 임신한 사람이 있으면 보위부 밖으로 나가서 낙태를 시켰다.
옷섶에 감춰서 가져오고 항문에 넣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궁에 많이들 감춰가지고 들어오는데 돈을 삼켜 배에 감추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돌돌 말아 비닐에 꽁꽁 싸서 약을 먹듯이 삼킨 뒤 나중에 대변을 보아 대변을 뒤져서 다시 씻어서 건사하곤 하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 비운이 감도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불려 나갔다. 무슨 일인가 해 알고 보니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에게 화장실 뒤에 쌓인 대변을 처리 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아직도 개방 화장실을 쓰는데 개방 화장실도 남한에서와 달리 화장실 뒤에 변이 가득 넘쳐 있고 그 변을 가져다 농장 밭에 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보위부 한편에는 경비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다란 바가지에 나무로 된 긴 손잡이로 변을 퍼내는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지만,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우리는 부지런히 변을 퍼냈다.
한창 퍼내고 있는데 “잠깐만!”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퍼내기를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보위부 지도원이 입에 손수건을 틀어막고 걸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여기에 비닐로 꽁꽁 싼 쬐꼬만 것이 있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퍼내려 하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면서 해!”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아줌마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보위부 지도원 말대로 우리는 아주 천천히 살펴보면서 퍼내는데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였다. 자그마한 것이 비닐에 돌돌 말려 있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차에 같이 일하던 한 아줌마가 나뭇가지를 꺾어 가지고 오더니 그걸로 건져 내었다. 우리는 경비군인이 안 보이는 사이에 그것을 조심히 풀어 보았다. 다름 아닌 중국 돈 200원(한국 돈으로 약 36,000원)이었다.
그 돈은 누군가가 삼키고 변에서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북한의 사정은 먹지 못해서 사경을 헤맬 정도의 상황인지라 목숨 걸고 돈을 가지고 왔을 것인데 그렇게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상황에서 그 돈을 가질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우리는 그 돈을 새로운 임자에게 주었다. 변 냄새가 진동하는 돈을 받아 든 보위부 지도원은 입에 웃음을 띠며 계속 찾아보라고 했고 그날 그렇게 11개인지 12개의 돈을 감싼 비닐들을 발견했다.
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구원의 손길 같고 저녁에 들어오는 노을은 우리들의 복수의 피가 물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연재2] 자유찾아 천만리
탈북여성작가 지현아씨의 수기
박영순기자2012.06.23 0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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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북한에 오다
 
  북한으로 온 아버지

우리 집안은 매우 평범한 계층으로서 계급으로 따진다면 중간쯤에 속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 내가 맏딸이고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명순이와, 나와 9살 차이인 남동생 명국이를 포함해서 식구가 모두 다섯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이 고향인 조선족이었고 중국에서 고중까지 다녔으며 문화혁명 때 북한으로 귀환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늘 들려주시던 중국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는 고중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며 집안은 가난했고 또 아버지의 생모는 아버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혼자서 아버지를 키우시다가 새 할머니를 만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새 가정을 이루시면서 아버지에게는 동생들이 줄줄이 생기게 되었다. 자식들이 많은 할아버지의 가정은 온통 가난으로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도 마음씨 고우신 새 할머니는 아버지만은 공부시켜야 한다며 아버지를 고중까지 보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공부를 해야 한다며 삯일을 해가며 아버지를 공부시키신 새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가 개학 준비를 하느라 다시 고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아버지는 버스 안에서의 승객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는 가슴에 무언가 와 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인즉, 북한은 사회주의인지라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돈을 안 받고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무료교육, 무상치료, 세금 없는 나라가 북한이라는 말에 아버지는 곧바로 도문으로 향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책가방을 매고 도문으로 가는 도중 할머니가 준 학교비로 밥을 사 먹으며 여러 사람에게 길을 묻고 물어 드디어 도문에 도착했다. 도문에 있는 두만강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줄을 지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 직접 중국까지 나와서는 한 사람 한 사람 검열을 해 가며 배에 오르게 했다는데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향해 북한 검열관은 다시 중국으로 넘어올 수 있을 어린 나이라며 입국을 거절했다. 안 된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냐며 검열관에게 대들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배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북한으로 향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노 젓는 부분을 꽉 잡고 물밑에 몸을 숨겼다. 뱃사공이나 검열관이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설마 물밑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배와 노 젓는 부분의 사이에 손을 넣었기 때문에 손에 피가 나고 매우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어느덧 북한에 도착했다.
그 이후 함북도 길주군에 위치한 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북한 학원의 교복이 여느 학교와 달리 군복이었으며 대우도 매우 좋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학원을 한 1년 정도 다녔을 무렵 설이 다가오자 다른 애들은 다들 친척 집에 간다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북한에 친척이 없었던 아버지는 중국에 있는 집에 잠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도착하니 난리가 나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디에 갔었느냐며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며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또 북한에 가야 한다는 말을 꺼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놀라며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집은 또다시 부모?형제와의 헤어짐을 면치 못했으며 학원을 졸업한 아버지는 자동차 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고말산 수산사업소에 배치된 아버지는 기숙사에 기거하며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연습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버지는 편곡도 하고 지휘까지 하는 훌륭한 지휘자가 되었다. 그 시기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나와 두 동생을 낳았는데 어머니의 집안은 공산당 집안으로서 외할머니는 20세에 화선에 입당했고 외할아버지는 도당 선전부장으로 일했으며 또 외가는 김정일과 사돈의 사돈이었다. 그 때문에 해마다 있는 신원조회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북한 정부로부터 별도의 선물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며 또한 중국에 계시는 고모가 다니러 오는 때에는 집에 더욱 활기가 넘쳤는데 고모는 중국에서 잘 사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선물을 보내 주곤 했다.


어머니가 그리던 농촌

도시에서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하루는 어머니가 농촌으로 이사를 하자며 아버지를 졸랐다. 어머니가 농촌에 가려는 이유는 TV에서 나오는 사회주의 문화농촌에 대한 좋은 이미지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는데 텃밭에 예쁜 꽃도 심고 콩과 옥수수, 갖가지 채소들도 심으며 즐겁게 사는 것이 어머니의 농촌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농촌 이사에 응하지 않던 아버지는 말리다 못해 결국 기권을 하고 말았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농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남동생 없이 나와 여동생만 있었지만, 농촌으로 이사 후 남동생을 낳았다.
이사하자마자 아버지는 임산사업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사업소 바로 옆에 집을 배당받았다. 직접 농사를 짓는 그런 곳은 아니지만, 앞뒤가 산으로 막힌 농촌에 있는 직장이었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구상은 농촌에 가자마자 깨지고 말았으니, 도시에서 살 때 아버지의 직장에서 달마다 내주는 석탄으로 난방하며 편안하게 살림을 하던 어머니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지 않으면 밥도 못 해먹는 상황하며 앞뒤가 다 산으로 둘러막힌 기막힌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마 이런 줄도 모르고 좋은 것들만 내보내는 북한 TV에서의 농촌 생활의 환경은 어머니를 너무도 많이 실망시켰다.
어린 나이였던 나 또한 깜짝 놀랄 일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학교는 멀고도 멀었고 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또한, 아버지가 그때 거주 퇴거 때문에 호적을 떼어 오는 것이 워낙 힘들어 호적을 농촌에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1년 가까이 배급이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로인해 생활난을 겪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남동생까지 임신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TV를 장터에 가져가 팔아서 그 돈으로 식량을 샀다. 그 때문에 해산 후 어머니는 부실한 음식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남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TV와 바꾼 애라는 우스갯소리를 두고두고 듣게 되었다.
그렇게 농촌의 가난을 알게 된 우리 가족은 그 후 아버지가 원료기지 사업소 자재지도원으로 다시 일자리를 옮기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비록 산골이었지만 그래도 전에 살던 농촌보다는 살기 좋아서 감자와 옥수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농사 경험이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옥수수와 감자, 갖가지 채소와 과일을 심어야 할 텃밭에 조찰을 심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곳은 한창 개발을 시작한 곳이라 사람들도 얼마 없었고 앞으로 들어올 종업원들의 집을 짓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밭을 일궈 거기에 농작물들을 심었기 때문에 비료를 따로 주지 않아도 농사가 잘되었고 감자와 옥수수도 잘 되었다. 그때 그렇게 컸던 옥수수와 감자를 지금은 어디에 가서도 볼 수가 없다.
그 당시 기업소에서는 다양한 공연을 했기 때문에 군에서 공연 경연에도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연지휘는 아버지가 맡았다. 그것은 기업소 내에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아버지는 다룰 줄 모르는 악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기타면 기타, 손풍금이면 손풍금, 나팔이면 나팔 등등. 아버지의 악기 다루는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직접 편곡과 지휘도 했으며 어디 가나 음악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나 또한 음악에 소질이 있어 학교에서 음악 소조에 다녔으며 바이올린을 배웠고 또 집에 와서도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다.
북한에서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정전이 자주 되어서 저녁에는 집집이 기름등잔을 켰다. 저녁밥을 먹은 후 우리 가족은 음악에 취해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켜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기타를 치면서 단란한 가족의 향수를 즐겼다. 아버지는 특별히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두 노래를 술을 마시고 술상에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가락에 맞추어 부르기도 하고 악기로 연주하기도 했다.

 

1절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이 그리워서
밤하늘 별을 보며 갈 길을 물어 보네
고운 옷 입는다고 부자가 아니에요
배불리 먹는다고 호자가 아니에요
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 언제면 가볼까


2절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이 그리워서
밤하늘 별을 보며 갈 길을 물어 보네
파묻힌 부모?형제 그리운 내 친구들
네 이름도 잊었겠니 까맣게 잊었겠니
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 언제면 가볼까


나는 노래의 제목을 몰랐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또 하나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제목을 몰랐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 “희망가”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고향이 중국이었던 아버지로서는 그런 노래들이 감성에 맞았을 테고 “희망가”는 겉으로는 사회주의지만 너무도 힘들게 생활하는 북한 백성들의 현실에 걸맞은 노래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는 술을 들면 그런 노래들을 부르면서 그때마다 울었는데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주정한다고 계속 잔소리를 하며 싫어했지만 어린 나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고 또 그런 아버지가 측은하고 불쌍했다.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부모와 형제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런 노래들을 불렀을까?
북한에서는 중국이 고향이라 해도 북한이 아닌 중국이기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말은 못하고 그냥 노래만 부르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지금 너무도 보고 싶고 그립다.


고난의 행군

우리 가족은 탈북 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우리는 임시 여권을 떼서 중국의 친척 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도 다녀오고 또 어머니도 다녀오는 등 우리 집은 그 산골에서 잘 사는 계급에 속한 것만 같았다.
자재지도원이라는 직책으로 출장을 많이 다니던 아버지는 워낙 마음이 어질고 고지식하며 자상한 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아버진 사람들에게서 신용을 얻은 분이었기 때문이며 흠이라면 술을 좋아해서 가정보다는 기업소나 친구들에게 더 잘하고 가정 일에는 관심을 덜 쓰는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의 시기가 닥쳐왔다. 국제적 고립과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로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을도 식량난이 절정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죽을 먹으며 직장에 출근했고 배급이라곤 아예 주지 않았으며 배급소조차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다. 배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모두들 봄이 되면 언 감자를 주우러 다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나물을 캐러 산속을 누볐는데 나의 꿈이 음악가에서 문학가로 다시 바뀐 것이 이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전공하라고 가르쳤고 나 스스로도 음악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 왔는데 “고난의 행군”이 달려들면서부터 보이는 모든 현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책 속의 주인공으로 실어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장사까지 해가며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물건이나 쌀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팔아 생활을 했고 쌀이 없으면 또 여권을 떼어 중국에 가서 쌀을 가지고 오곤 했는데 그때까지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걸 팔아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면 자재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직장의 물자들을 거래하는 일들을 했기에 장사를 너무도 잘 알았던 아버지는 장사를 못하는 그런 어머니를 항상 나무랬다. 하지만 장사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로서는 아버지의 그 나무람을 그저 참고 들어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중국의 친척들 덕분에 우리는 남들보다 옷도 잘 입고, 신발도 좋은 걸로 신고 다녔으며 학교에 다니고 먹는 것도 고급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잘 살았지만, 우리 집에도 서서히 생활난이 시작되었다.
중국에 계시는 친척들이 다들 한국으로 돈 벌러 가버려서 중국에 가도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와 여동생 명순, 남동생 명국 이렇게 셋은 먹지 못해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다리에 골수염이 있던 어머니는 아무 일도 못했으며 아버지도 출장에서 돌아오면 우리와 함께 소나무 껍질인 송기를 벗기러 다녔다. 송기란 소나무 겉껍질을 낫 아니면 칼로 한번 벗겨 낸 그 속에 있는 얇은 껍질을 말한다. 그걸 한 배낭씩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동생들은 산나물을 뜯고, 나와 아버지는 낫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송기를 벗기고 집으로 와서는 산나물은 끓는 물에 데쳐 내서는 죽을 쑤었다.
송기는 가마에 양잿물을 넣고 오래도록 끓인 후 물에 하루 동안 펴서 재워놓고 다시 방망이로 두드려서는 옥수수 가루 한 줌을 넣고 떡을 만든다.
당시 그 송기떡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아서 정말 속상했었는데 그렇게 못사는 것이 북한의 독재 정권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서럽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 달에 한 번씩 강연회를 하는데 그때마다 하는 강의 내용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산이 많고 논과 밭이 적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와야 한다. 하지만 수입하는 도중 쌀을 실은 배를 경제봉쇄 하는 미국에서 총질을 해 다들 희생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미국 때문에 이렇게 생활난을 겪는단다.

이와 같은 사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우리의 철천지원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의 일 때문에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 보니 그 가장의 자리를 내가 메워야만 했다. 땔 장작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기업소 소를 빌려서 나무를 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왔는데 정말이지 매우 힘들었다. 나무를 톱으로 벤다는 게 어린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없는 힘을 다해서 나무를 베면 그 나무가 내게로 넘어와 팔이나 발을 다치기 일쑤였고 너무도 힘들어서 쌓인 눈 위에 철퍼덕 앉아 울 때도 많았다. 닳아진 신발을 신고 장갑도 없이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며 나무를 베는 내가 미웠고 소로 나무를 해오는 동네아저씨들이 부러웠다. 나무가 무거워 힘에 부치니 밧줄로 질질 끌고 오면 동네 사람들은 ‘너, 힘들겠다….’하고 말만 할 뿐 도와주지는 않았다.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 내 나이 17살, 나무하기가 그처럼 힘든 만큼 나무를 아끼려 불을 조금씩 땔 수밖에 없다 보니 방바닥에 습기가 많아 불을 땔 적마다 연기가 나서 문을 항상 열어놓고 밥을 해야 했으므로 방안에서도 솜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온돌을 놓고 시멘트로 바르고 그 위에 장판지를 밀가루 아니면 옥수수 가루로 쑨 풀로 발랐는데 불을 때지 않아 습기가 많아지면 방바닥에 바른 장판지가 모두 들뜨고 일어나 시멘트를 바른 방바닥이 드러났다.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지 않고 아궁이로 나왔기 때문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방바닥을 뜯어서 온돌 수리를 했는데 17살 소녀가 온돌수리를 한다고 해야 얼마나 잘하랴! 방바닥을 뜯어내려니 곡괭이질을 해야 했고 얼굴에 온통 숯검댕이를 묻히고 짧은 팔로 큰 돌 사이를 헤집으니 옷도 숯검댕이가 되어 버렸다. 굴뚝으로는 연기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방바닥의 온돌과 온돌 사이에 그을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을 다 꺼내야만 했다. 그래서 온돌에 놓인 돌들을 들어내고 그을음을 꺼내야 하지만 힘이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긴 쇠줄에 헝겊을 동여매고는 그것을 온돌 사이에 쑤셔 넣은 다음 그을음을 앞으로 당겨서 작은 삽으로 퍼냈는데 엎드린 자세에서만 이 작업이 가능했으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무리로 뜯어낸 온돌을 다시 메우는 작업은 진흙으로 해야 했는데 엄동설한에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찬물에 진흙을 이겨 온돌 사이를 메우는 것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하시지, 동생들은 어리지, 정말 나 혼자서 너무도 힘들었다.
조금만 성숙한 나이였으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아직 엄마, 아빠의 그늘 아래 부모가 해주는 데로 생활해야 할 나이에 동생들을 챙기고 아프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고 내 어깨에는 점점 무거운 짐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점점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기업소 일 때문에 지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으며 봄이 되면 기업소의 비료 때문에 은덕군으로 가야만 했다. 비료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지만 가난한 기업소에서는 거래 돈을 아버지에게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집에 있던 녹음기며, 재봉기며 TV 등을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잘사는 집에서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비료는 기차방통으로 기업소에 들어왔었고 비료 없어 헤매는 농장에 비해 기업소는 그해 농사 비료는 끄떡없게 되었지만, 결국 집의 살림은 쪼들리는데도 집의 재산을 기업소에 바친 셈이 된 것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여권을 떼어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사는 고모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덕분에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오셨다. 그것으로 한동안은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빌린 돈 때문에 그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빚 꾼들은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매일 찾아왔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돈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자가 불어서 빌린 돈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그 이자만 갚는다 해도 아득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에 찾아가 돈을 요구해 보았지만, 지배인이라는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드디어 생각을 고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가족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하고 말이다. 북한 체재의 와해 조짐을 본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을 노예로 담보 잡아 평양 주민들만 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은 평양 주민 3백만 명을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2천만 명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을 시키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중국으로 가자는 놀라운 말을 했다. 나는 물론 어머니와 두 동생들도 깜짝 놀랐다. 웬일로 중국으로 가려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여기에서 이렇게 해서는 앉아서 굶어 죽는다며 하루가 멀다 하게 빚 꾼들이 오고 기업소에서는 나 몰라라 하는데 어떻게 살겠느냐고 했다.
중국에 가서 한국 방송을 들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남조선은 잘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에 남조선에는 거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못 간다고 했다.
우리 가족의 고난의 그림자가 드디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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