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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 ⑧

fabiano 0 1132  
 
흐르는 江 7
 
* 독일로 간 민지

민혜의 아버지 서현수는 작은 섬유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하였고 집은 필동의 남산 아랫자락에 할아 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한옥을 새롭게 양옥으로 개조하여 보기에 근사했다. 당시 민혜 아버지 서현수는 장손으로 집안의 제사를 다 맡아 지내 친지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그 뿐 아니라 사촌 동생인 서현제의 두 딸인 민지와 민주, 아들 민우도 한 집안에서 살게 하였다. 사촌 서현제는 고향인 시골에서 제법 크게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일찍 서둘렀으면 암이라는 병명도 찾아내고 서울에서 최선을 다해봤겠지만 시골에서 그냥 인근의 한의원과 작은 병원만 찾아 다니다가 실기하였고 나중엔 민간요법에 의지하였으나 결국 임종을 하였다.
아플 당시에도 본인과 가족이 내색을 하지 않으니 그냥 몸이 부실 한가보다 하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동생 서현제의 사후 아이들 교육문제로 종수씨인 서현제 부인과 아이들을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유를 하였지만 아이들만 서울로 보내고 시골서 살겠다고 하기에 두 딸 민지와 민주, 아들 민우가 올라와서 민혜와 민혜 동생이자 민우 형인 민수와 함께 살게 되어 대식구가 모두 한 집에 기거하였다.
양옥으로 개조하였어도 옛날집이라 뜰도 마당도 넓고 방도 충분하여 불편하진 않았다. 이들은 6촌 남매지간이나 친남매보다 더 다정하게 지냈고 서로가 흉허물 없이 울타리가 되어 참으로 든든했다.
부모들은 물론 시골에 있는 아주머니도 이런 가족애를 아주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래서 더 안심이 된다고 상경할 때마다 너무 감사하다고 강조했다.
자녀들 생활비와 교육비조로 곡물과 야채를 절기 따라 보내고 돈도 적당히 보냈지만 서현수는 종수씨가 혼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해도 본인이 서울생활이 싫고 논밭 다 팔고 갈 수 없다고 하니 별 도리가 없었다.
야산이긴 하지만 종산을 지키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겠기에 그냥 그러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잘 자랐는데 큰 딸 민지가 독일 간호사를 모집한다고 응한 다음 꼭 보내달라고 서현수에게 부탁 아닌 부탁도 하였다.
민지 는 “아저씨. 제가 독일에 간호부로 가려는 게 집안 살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시골에 논밭이 적당하게 있고 한국에서 간호사로 취직해도 먹고 살기야 걱정이 없겠지만 제 나름의 공부도 하고 싶고 외국에 나가 세상살이도 더 알고 싶은 겁니다. 다행히 제가 집안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도 없으니 독일 가서 제가 벌어 저축한다면 나중에 정말 제 꿈대로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라며 자신의 입장을 요령껏 잘 설명하였다.
 
당시 경제개발이 되는 중이었어도 시골엔 보릿고개가 해마다 기승이었고 먹는다는 행위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식사 때엔 이웃 집이나 친구 집에 가도 눈치가 보였고 남의 집에서 밥 한 끼 먹게 되면 상당한 신세가 되고 접대를 위한 식사대접이 인기 좋은 시절이었다.
항상 먹는 타령이었고 늘 배가 고팠다. 한창 크는 중고등학교 시절엔 중국집에 가서 군만두와 탕수육을 실컷 먹는 게 소원이었다.
졸업이나 생일 정도의 기념일이 되어야 그런 음식을 구경 할 정도로 궁핍했다. 점심도시락은 3시간 정도 수업이 마친 오전 11시면 이미 깨끗하게 비워져 있기 일쑤였고 국화빵 같은 군것질도 부자 아이들 몫이었다.
소풍을 갈 때엔 사이다와 김밥, 삶은 계란이 주 메뉴였고 요깡이나 카라멜은 부잣집 아이들이 주머니에 넣고 혼자 슬슬 먹었다.
어쩌다 쌀밥 이라도 먹는 날이면 일본 간장을 넣고 슥슥 비벼서 김에 싸 먹으면 최고의 성찬이었다.
누가 아프다 고 병원에 입원하면 환자 먹으라고 사 오는 깡통 통조림인 파인애플이나 칵테일 과일이 먹고 싶어 일부러 자주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기름기가 항상 부족하여 이를 보충한답시고 버터라고 부르지 않고 소위 빠다라고 하는 서울식품의 소머리표 마가린을 따뜻한 밥에 비비는 영양식이 대유행을 하였다.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선 도깨비 시장에서 미제 빠다를 사서 자녀들에게 주곤 했는데 빠다만 먹어도 목구멍이 미끈거렸고 속이 든든하였으며 먹고 난 다음 날엔 얼굴에 기름기가 돌았고 농담으로 똥도 잘 나온다고 했다.
이런 시절이니 독일에 가서 돈을 번다는 현실은 일종의 출세이기도 했다.
처음에 독일 광부 5천명과 간호사 2천명을 선발하는데 광부지원자가 무려 4만 여명이었고 간호사 역시 2만여 명이 지원할 정도이니 그 만큼 살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민지가 간호사로 갈 당시엔 ‘유 자격 한국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독일 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 이후라 처음 간호사 출국처럼 요란한 송별행사는 없었고 공항에서 교인들과 간단한 예배로 환송을 대신하였다.
시골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이 올라왔고 친구 몇과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남 보기에 창피 할 정도로 울진 않았기에 비교적 조용하게 떠났다.
민지가 떠나기 며칠 전에 전 집안 식구들과 명동 한일관에서 송별 저녁을 마치고 민지와 민혜는 함께 남아 명동장에서 맥주를 한잔하며 아쉬운 이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둘은 모든 마음 속 얘기를 자주하며 친하게 지냈고 다른 식구보다 더한 친밀감을 항상 가졌기 때문이다.
약간은 공식적인 집안 식구들과의 저녁 외에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민혜가 먼저 “언니, 고생이 많겠네. 가면 바로 연락해. 응 알았지.” “그래, 연락이야 당연히 하지. 너도 공부하다가 독일로 날아 와. 이제 곧 졸업이니 그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내가 자리 잡아 놓을 테 니까 말이야. 넌 독일을 매우 좋아 하잖아. 전공도 독문학이고. 독일 현장에서 본토 언어공부와 문학 공부를 해 놓아야 나중에 교편을 잡더라도 학생들에게 얘기할 거리가 있지. 안 그래?” “그야, 형편 이 되면 가봐야지. 안 그래도 지금 독일문화원에도 자주 들락거리곤 해. 근데 언니. 찬호 오빠도 매 우 섭섭해 하겠네. 괜찮아?” “찬호? 아니야. 그냥 시골에서 이웃이고 서울에서 공부하기에 만났지. 그냥 이웃의 착한 사람이지. 아직 공부도 그렇고 나하곤 아니야. 문제는 너다 얘. 우태 씨는 요즘 사 람치곤 착하던데 어쩔 셈이야.” “언니. 우태 씨 군에 입대했어. 편지가 왔더군. 그냥 소식을 전한 것인 데 너무 갑자기 결정된 거라 정신이 없었나봐. 그리고 난 그 3년을 어떻게 기다려. 말이 안 되지. 또 뭐 뚜렷한 약속을 한 사이도 아니고 우린 손도 만져보지 않았어. 만약 내가 우태 씨 군대 3년을 기다린다고 쳐. 우태 씨는 그 후 다시 대학 3학년이야. 난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 고물단지인데 말이야. 그런 다음 또 졸업이 2년 걸리고 직장 찾고 뭐하면 얼마야. 그 시간을 내가 견뎌내겠어? 아니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더 성화를 부리실 거야. 문제는 내가 이렇게 허전한 건 우태씨 때문만이 아니 고 언니와 우태씨가 한꺼번에 떠나는 때문이야. 아니 내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곧 떠나는 언니 에게 위로의 말은 못해주고 내 타령만 하다니. 언니 미안해.” “아냐 아냐 괜찮아. 난 이미 간호학교 다닐 때부터 마음 단단히 먹었으니 하나도 동요가 없어. 한국사회에서 여자라는 지위가 빤하잖아. 시집가서 남편과 시집 눈치보며 아이 낳고 살아야 하는 거. 난 그게 싫어. 나중엔 그렇게 변할지 모르 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인생이 아닌 인생을 경험하고 싶은 거야. 사실 간호사로 독일 가지 않으면 언제 외국에 나가보겠어. 더욱이 여자가 말이야. 독일에 일단 나가면 처음엔 고생이 되겠지만 이웃나라인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등도 구경하게 될 거고 한국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살아도 되는 나라 아니니. 그래서 난 꼭 나가려고 애를 쓴 거야. 다행히 월급도 많다고 하니 내가 야무지게 저금만 한 다면 나중엔 내 인생을 살아가는 큰 밑천이 되지 않겠니.” “그래도 언니. 무척 힘들다고 하던데. 독일 환자들이 덩치가 커서 수발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습디까. 한국 간호사는 시체 만지는 일이나 대소변 받아주는 험한 일만 주로 한다며? 하여간 언니가 잘 하겠지만 걱정도 많이 되지. 사실이야.” “내가 이래 봐도 어머니 농사일도 거들어 준 사람 아냐. 한국 농사일 그거 장난 아니다 너. 힘든 시골 일도 예사로 했는데 뭐든지 처음엔 힘이 들겠지만 요령이 생기면 아무 것도 아니야. 하여간 네가 우태씨와 그렇게 되었다니 내가 독일에 가서 참하고 좋은 신랑감이나 애인감을 찾아보지. 기다려.” “아니 언니나 먼저 찾아. 객지 외국에서 힘들고 외로울 텐데 심적으로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잖아. 나야 지금은 언니와 우태씨가 다 떠나 힘이 들지만 바로 안정이 되겠지. 만약 잊어야 할 사람이라면 바로 지금 잊어야 할 거야. 미련을 두고 생각해 봐야 어리석은 일이지. 우태씨도 그런 각오를 한 모양이야. 편지도 그렇게 썼어. 이제 나도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야지. 벌써 3학년 아니우? 곧 방학이 되고 그러면 새 학기고 금방 4학년이지. 어쨌건 내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언니가 가서 힘들지 않게 지내고 좋은 사람 만나요. 독일에 간 광부들도 진짜 광부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하든데 언니의 꿈을 이해하는 멋진 사람을 만나야지. 아주머니도 심란해 하시겠지만 그래도 대단하셔요. 내색도 별로 않으시니 말예요.” “어머니야 아버지를 잃은 충격보다 더 큰 게 뭐 있겠어? 그 충격도 견디시고 꿋꿋하시잖아. 이제 우리가 효도를 잘 해드려야지. 재혼이야 나이가 들어 하시지도 않을 테니 내가 독일 가서 자리 잡고 오시라고 해서 유럽이라도 잘 구경시켜 드려야지. 하여간 너도 꼭 와. 그러기 위해 준비도 미리 해두고. 독일 유학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하드라. 내가 너희 집에서 몇 년을 신세 졌으니 너도 내 신세 좀 져야지. 안 그래.” “참 언니도 별 소릴 다 하네. 그게 왜 신세요. 신세긴.” 두 자매는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며 명동에서 맥주도 마시다가 천천히 걸어서 필동의 집으로 돌아갔다. 
 

 

흐르는 江 8

 


* 독일로 간 민지 민지는 그렇게 독일로 떠났는데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 다들 안타까워했는데 약 8개월 만에 첫 소식이 날아왔다. 민혜도 바로 답장을 하였다.

 


민지언니에게

언니. 오늘 등기우편 잘 받았어요. 모든 생활이 만족하시다니 너무 좋고 안심도 되네요. 사실 우리는 언니가 떠난 다음 날부터 편지를 기다렸어요. 물론 그게 말이 안되지만 그래도 기다려지는 걸 어떡해. 아주머니와 민주와 민우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민수도 모두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처음에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어 그런다는 건 알지만 송금한 돈은 꼬박꼬박 오는데 소식이 없다고 아주머니가 얼마나 섭섭해 하셨다고. 그래도 건강하시고 자신의 선택과 직업에 더 없이 행복해 하시니 듣는 저희도 힘이 막 솟아납니다. 언니의 편지는 어머니와 함께 읽었고 나중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다시 읽어드릴 테니 따로 안부 전하지 못한 부분은 염려하지 마세요. 객지에서 일일이 편지 쓴다는 게 마음대로 되겠수?

힘든 일이지. 그 시간이면 잠이라도 조금 더 자야지. 안 그러우? 아무리 선배 간호사들이 길을 잘 닦아 놓았다 해도 객지는 객지 아니우. 무조건 건강에 최선을 다하셔요. 감기같은 가벼운 증상에도 마음이 서러워지는데 더구나 타국에선 절대 안되지. 저도 이제 마음이 잘 정돈된 상태입니다. 힘든 고비는 넘겼고요. 우태씨도 군에 간 이후로 연락이 통 없으니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졸업반이라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집 준비하라고 하며 선볼 곳도 몇 군데 알아봤다더군요. 난 지금 그럴 마음이 전혀 없고 공부를 좀 더 하든지 아니면 언니 곁으로 갈 작정이우. 독일 문화원에 연결해두고 있으니 조만간 결론이 날 것 같아요. 참, 그리고 언니. 민주가 대학 다니다가 하와이에서 온 남자친구와 잘 지낸다고 해요. 피터라는 교포3세인데 한국어도 더 배우고 대한민국 공부를 더 하려고 유학을 왔다나 봐요. 아마 이민1세의 자녀인가봐? 그러니까 갤릭호를 타고 조부님이 사탕수수밭으로 떠나신 거지. 뭐가 이상해. 언니는 독일로 가고 민주는 하와이 교포를 사귀고 갑자기 집안이 국제화되는 느낌이야. 언니. 잘 지내요. 또 연락할게. 무조건 건강이오. 알았지요? 서울에서 동생 민혜가

 

* 20년의 세월

“혹시 서 민혜씨 아닌가요? 저 강 우태입니다.” 하고 우태는 예쁜 중년여성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민혜는 전혀 놀라지 않고 빤히 쳐다보면서 “맞아요. 우태씨 정말 오랜만이네요. 몇 주 전부터 보았어요. 저는 2부 예배를 보는데 주로 1부 예배를 보시더군요. 혹시나 해서 제가 오늘 우태씨를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1부 예배에 나왔습니다.” 라며 살갑게 인사를 받았다. “아. 그래요. 지금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어디 얘기 좀 합시다. 어때요?” “네. 오후에 봉사할 일이 좀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게요. 그럼 제가 잠깐 들어갔다 나올 테니 바로 이 아래 샌드파이프 커피샵에 가 계세요. 어딘지 아시죠? 제가 바로 갈게요.” 해서 두 사람은 정말 흔히 말하는 재회 아닌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재회라기보다는 그냥 뜻밖에 아니 우연히 옛사람을 만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어떤 언약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냥 젊은 시절 짧은 기간의 연인이었으니까. 민혜는 우태를 처음 교회 주차장에서 보았을 때 어디서 많이 낯이 익은 사람인데 하는 느낌을 가졌지만 정확하게 기억해 내지 못 했다. 웨스턴가에 있는 대양교회는 교인이 약 5천 명 정도 되니까 예배가 3부까지 이어진다. 민혜는 주로 11시에 흔히 대예배라고 말하는 시간에 참석해 예배도 보고 교인들과 점심식사도 나누며 오후에 성경공부도 하면서 혼자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그날도 오전 11시 예배시간에 맞추어 조금 일찍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막 주차하려고 하는 순간 민혜의 자동차에서 몇 자리 건너편에 어떤 중년 남성이 1부 예배를 마친 후 나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보진 못한 셈이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몇 주가 지난 후에 다시 주차장에서 마주쳤는데 이때는 정면에서 바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강우태가 맞다는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민혜 혼자서 보았고 우태는 민혜를 보지 못했다. 민혜는 가슴이 뛰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살아가는 형편도 궁금했다.

 


학창시절 긴 시간 만난 사람은 아니나 민혜에겐 첫사랑과 같은 우태였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 두근거리는 부분이 좀 덜하고 새콤한 가슴앓이는 없지만 그래도 남자와의 데이트로는 첫 상대였다. 민혜는 그렇다고 바로 아는 체 하기도 뭣해서 또 시간이 흘러갔다. 교회 사람들을 통해 우태에 관한 수소문을 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이상하게 될지도 몰라 직접 부딪히기로 작정하고 기다려 왔다. 민혜는 우태가 우선 가족과 함께 교회를 다니는지 아니면 혼자인지를 알아야 했는데 처음과 두 번째 모두 혼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닌 걸 봐서 지금 LA엔 당분간 혼자 있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진 않고 가족이 있다 해도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모두 지난 옛날이고 학창 시절 추억인데 부인이 알아도 거리끼거나 우려할 게 없으며 자녀 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지난 5월 어버이 날 행사가 있던 날 일부러 1부 예배 에 참석하여 행사도 도우면서 우태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하기로 결심을 했고 실천을 하였다. 우태 역시 어버이 날 행사를 맞아 교인들에게 꽃도 달아주고 하며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여성을 보고 민혜인지 아닌지 긴가 민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예배를 마친 후에 복도에서 어정대다가 민혜를 가까이서 보려고 일부러 다가갔다. 맞았다. 틀림없는 민혜였다. 이미 중년의 여인으로 변모해 살이 좀 쪄있었으나 예전의 미모가 다 사라지진 않았다. 아니 민혜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독일로 유학 가서 시집갔다고 하더니 결혼하곤 미국으로 왔나? 교회에서 저 정도로 봉사한다면 꽤 오래된 교인이란 뜻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일단 불렀다. 두 사람의 뜻밖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둘은 예전의 감정으로 되돌아갔어도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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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파이프 커피샵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후에 우태가 먼저 “언제 미국에 오셨어요? 전 독일에 계신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십년이 조금 넘어요. 80년에 왔으니까. 물론 독일에서 결혼하고 살았지요. 그 다음 한국에도 잠깐 있었고.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오게 됐어요. 운명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는 게 전혀 제 생각하고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더군요. 이렇게 남의 나라를 전전하며 산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요.” “오래 되셨네요. 그럼, 지금 무슨 일을 하세요?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시던데, 실례지만 남편은? 전 학교 졸업 후부터 하던 섬유계통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배운 도둑질이 섬유계통이라 다운타운에 사무실을 두고 쟈바시장과 또 다른 업체들과 비즈니스를 하지요.”라며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존칭을 사용했다.

 

학창시절엔 서로 높임말이 아니었는데 자연스레 그렇게 말이 나온 것이다. 민혜도 마찬가지로 “저희 아버지도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섬유 계통의 사업을 오래 하셨어요. 그런데 매번 볼 때마다 혼자시던데 가족은 이곳에 없나요?” 라며 존대를 하였다. “네, 아직. 아이들이 학교가 어중간해서 전학하기도 그렇고 저도 영주권이 없고 지사요원 비자를 가지고 한국에서 자주 왕래를 합니다. 동남아에 제가 하는 일이 많아 홍콩이나 태국에 오래 나갔다가 4~5년 전부터 미국 비즈니스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 아파트를 얻어놓고 일 년에 1/3은 미국에 있고 나머지는 한국과 동남아로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대학교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는데 두고 봐야지요. 아까 물어 본 데 대한 답이 없네요. 많이 궁금한데. 직업과 남편이?...

“저는 미국에서 얼마 전까지 마켓을 했어요. 그러다가 4.29 폭동으로 몽땅 날리고 남편도 그 때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래 몸이 약했지만 마켓을 오래하다 보니 피로가 쌓였고 온 재산이던 마켓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화병까지 났는지 아프더니 그냥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전 부인과 함께 살고 저는 제 아이 둘을 데리고 세명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우린 재혼이었거든요. 사실은 전 세 번째입니다. 여자가 무슨 운명으로 남편을 세 번이나 맞았는데 또 그렇게 되니 정말 웃음만 나오더군요.” 하며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우태는 참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여자처럼 보였던 민혜에게 세 번째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학창 시절 데모도 하지 않는 착하고 선한 여학생이었고 시대적 감각이 풍부했고 감성도 메마르지 않고 촉촉하며 남에게 베풀기도 잘 하던 민혜였다. 많이도 얻어먹지 않았던가. 당시의 맥주는 고급술이었고 명동이란 곳도 함부로 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물론 민혜는 집이 필동이라 명동과 충무로를 지나다니는 게 이웃집 같았겠지만 우태는 그렇지 못했고 무일푼으로 데이트 자금이 없던 우태의 형편을 잘 헤아려 자신의 용돈으 로 명동의 구석구석까지 구경시켜주고 촌놈이 들어가면 어리둥절한 맥주 집에서 술도 자주 사주던 민혜. 간단하게 표현하면 마음이 넓고 포근한 양반집 규수 감이었던 민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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